ⓒ위키백과메리 맬런(맨 왼쪽)은 장티푸스 ‘무증상 보균자’였고, 모진 수난을 겪다 1938년에 삶을 마감했다.

현대 사회학의 실질적 창시자라 할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이렇게 얘기했다. “성자들로만 구성된 완전한 사회에서도 범죄는 발생한다. 모든 사회 구성원은 물질 환경, 세습 요인,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에서 다른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규칙들에 완벽하게 순응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류가 사회를 이룬 이래, 악의를 지니고 한 행동이든 어쩔 수 없이 규범을 위반한 것이든 범죄는 항상 있어왔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겠지.

“BBC 방송은 2015년 5월28일 스페인 북부 산악지대에서 발견된 43만 년 전 유골의 주인이 폭행당해 희생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연합뉴스〉 2015년 5월28일).” 땅덩이의 모양조차 지금과 많이 달랐던 아득한 옛날, 돌을 깨서 만든 도구를 들고 가냘프게 생존하던 인류의 조상들도 그렇게 서로에 대한 범죄를 자행했다. 동시에 범죄를 방지하여 집단의 안정과 안전을 지키려는 몸부림 또한 있었겠지. 그것이 법과 규범일 거야. 고대 바빌로니아에는 함무라비 법전이, 유대인들에게는 십계명이 주어졌고 우리에게는 고조선 시대 팔조법금이 존재했듯 말이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법이 수호하는 정의의 내용과 방식 또한 변하기 마련이고 옛날에는 명징한 범죄였던 것이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상이 돼버리는 경우도 흔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을 규정한 함무라비 법전은 요즘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야만적이지만 당시로서는 “누가 네 이를 부러뜨렸으면 상대의 이만 부러뜨려야지 그 이상은 안 돼”라며 손을 붙드는 합리적인 법률이었음을 상기해보렴. 그래서 각종 범죄, 그리고 범죄를 응징하는 법과 질서는 그 시대와 사회를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거울이 되는 거란다. 앞으로 몇 주 동안은 기나긴 세월 속에 모래처럼 흩뿌려진 세계사 속 범죄와 범죄자들의 사연을 통해 그들이 살았던 세상을 이야기해볼까 한다.

2020년 가을에도 코로나19의 기세는 여전하다. 미지의 바이러스에 맞서 싸우는 의료진이 있는 반면, 방역 규칙을 어기고 검사를 거부하며 나아가 병을 퍼뜨리는 이들도 있지. 자신을 찾아간 보건소 직원에게 침을 뱉으며 난동을 부린 개신교 광신도는 그 딱한 예가 되겠다. 아빠는 그들이 엄중히 처벌돼야 한다고 생각해.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포에 질려 감염자들과 보균자들을 적대시하고 병에 걸린 ‘책임’을 묻는 것 또한 지양해야 한다고 여긴다.

고대 그리스의 손꼽히는 도시국가,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맞붙은 펠로폰네소스 전쟁 중 아테네를 엄습해 아테네 시민들의 태반을 쓰러뜨리고 패망으로 몰아 넣었다고 추정되는 병이 있으니 바로 장티푸스야. 이후로도 이 전염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시로 출몰해 사람들을 쓰러뜨렸지. 20세기 초 장티푸스 대유행이 미국을 휩쓸기 시작했단다. 1906년 여름, 뉴욕의 은행가 찰스 워런 가족은 해외여행을 떠난 친구의 별장을 빌려 여름휴가를 보내게 돼. 그런데 찰스 워런의 딸이 고열·설사·발진 등 장티푸스 증상을 보였고 동일한 증상의 환자가 연거푸 발생했지.

면밀한 역학조사가 진행됐지만 장티푸스 감염경로는 오리무중이었어. 별장 어디에서도, 음식 재료에서도 장티푸스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를 추적하던 위생공학자 조지 소퍼 박사는 별장에서 일하다가 해고되었던 아일랜드 출신의 메리 맬런(1869~1938)이라는 여성을 주목하게 돼. 소퍼 박사는 메리 맬런의 이력을 추적하던 중 놀라운 사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녀가 거쳐간 대부분의 집에서 장티푸스가 발생했던 거야. “이 사람이 수상하다!” 그런데 정작 주범으로 지목된 맬런은 장티푸스를 앓은 적이 없었어.

마침내 메리 맬런을 찾아낸 소퍼 박사가 검사를 제안했지만 당연하게도 맬런은 자신은 병에 걸린 적이 없다며 검사를 거부했어. 소퍼 박사는 당국에 개입을 요청했고 공권력이 출동해 맬런을 체포한다. 병원에 강제 입원당한 맬런은 각종 샘플을 강제로 채취당하게 돼. 그리고 그는 요즘도 귀에 익은 ‘무증상 보균자’로 밝혀졌어.

필요한 조처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이후 맬런에게 일어난 일은 지나칠 만큼 가혹했어. “1907년 한 해만 전국에서 장티푸스로 2만8971명이 사망해 ‘국가 위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상황이었다. 사람들의 이성은 작동하지 않았다. 황색 저널리즘으로 유명한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가 운영하는 신문 〈뉴욕 아메리칸〉은 이 사건을 처음 보도하며 ‘인간 장티푸스균’이라는 선정적인 제목을 썼다. 몇 달 뒤엔 맬런을 마녀처럼 묘사한 삽화와 함께 실명을 공개한 큼지막한 기사를 내보내 80만 부를 팔아치웠다. 학회에선 어떤 의사가 그녀를 ‘장티푸스 메리’라고 부른 별명이 널리 쓰이기 시작했고, 이 별명은 ‘타락’한 여성들을 뜻하는 말로까지 쓰인다(〈한겨레〉 2018년 1월25일, ‘장티푸스 메리는 어떻게 마녀가 되었나’).”

소퍼 박사는 장티푸스의 온상으로 추정되는 맬런의 담낭을 제거하자고 했으나 그녀는 완강히 거부하지. 사실 그 반항은 넉넉히 이해가 가는 행동이었다. 장티푸스 보균자 가운데 강제 입원으로 격리된 것은 ‘장티푸스 메리’가 유일했기 때문이야. 남자 보균자들, 귀부인 보균자들은 누구도 강제 격리의 대상이 되지 않았고 ‘감호’ 처분에 그칠 뿐이었어. 아일랜드계에다 하류층 여성이라는 이중의 핸디캡이 맬런을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로 옭아맸던 거야. 맬런은 만만한 여자가 아니었어. 자신이 당한 불법적 체포와 수감에 항의하여 재판을 걸었지. 법정은 ‘공동체의 권익을 위한 공권력 집행은 정당하다’는 판결을 내렸지만 “왜 맬런만?”이라는 질문에는 여전히 답이 없었다.

아일랜드 이민자에 가난한 독신 여성

1910년, 당국은 조리 업무를 맡지 않고 정기적으로 동정을 보고하는 조건으로 맬런의 격리를 해제해. 하지만 가족도 없고 기술도 없는 40대 중반 여성이 ‘요리’를 제외한 일자리를 찾을 수 있었을까. 맬런은 얼마 후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리고 5년 뒤 뉴욕의 한 병원에서 장티푸스 환자가 발생하게 되는데 여기서 또다시 ‘장티푸스 메리’가 등장한다. 음식 솜씨가 좋았던 맬런은 먹고살기 위해 가명을 써서 요리사로 취직했고, 결국 사람들을 장티푸스에 감염시키고 말았던 거야. 그녀는 다시 체포됐고 종신 격리형을 선고받는다. ‘장티푸스 메리’는 격리된 병원에서 잡역부로 일하고, 세균을 배양하는 임상실험에도 참여하면서 기나긴 세월을 보내다가 1938년에야 애달픈 삶을 마감해. 그녀는 평생 모은 5000달러를 기부하고 떠났다.

맬런은 수십 명을 감염시켰고 그 가운데 몇 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장티푸스 보균자임이 확실했지만 악의적인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었어. 그저 먹고살기 위해 법을 어겨야 했지. 질병에 대한 공포는 한없이 뜨거웠지만 그녀에 대한 배려는 차갑기 그지없었고 가난한 독신 여성, 아일랜드 이민자에 ‘병균 덩어리’라는 혐오는 그녀의 일생을 짓밟고 범죄자로서 종신 격리를 강요했던 거야. 남자 보균자들에게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던 혐의로 말이다.

다른 이들이 누리던 권리는 왜 맬런에게 허용되지 않았을까? 맬런의 호소는 그래서 가슴이 아프다. “세상 모든 바닷물로 제 몸을 씻어낸들, 보건국 사람들의 눈에 비친 제 혐의가 벗겨질까요. 그들은 저를 생색내기용으로 삼으려 합니다. 부자들을 보호해주고 그 공로를 인정받으려는 겁니다. 저는 희생물입니다(수전 캠벨 바톨레티, 〈위험한 요리사 메리〉).” 돌이켜 생각해볼 때 유죄를 받아야 할 이는 누구일까. 메리 맬런일까. 아니면 그를 마녀로 몰아붙였던 미국 남자들일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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