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는 ‘문화혁명’의 시대였다. 그 중심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있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10년 남짓 활동하는 동안 음악·방송·패션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바꿔놓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끄트머리에….
“유진 박이 있었잖아요!”
뭐라고? 유진 박? 아, 그렇지. 있었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유진 박! 그 사람 지금 어디서 뭘 할까? 아직도 바이올린 켜나? 하지만 한창 유진 박 얘기를 하면서 기분이 들뜬 손님에게 그렇게 말했다가는 책도 못 팔고 쓴소리나 들을 게 뻔하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유진 박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으니 뭐라고 추임새를 넣어야 할지 거듭 생각했다. 결국 선택한 것이라곤 이 정도였다.
“아, 유진 박! 알죠. 저하고 동갑이에요. 1975년생.”
말하고 나서 나 자신에게 엄청나게 실망했다. 순간 책방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어색한 분위기를 만회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조금 더 덧붙인다.
“개인적으로 안다는 건 아니고요. 그냥 동갑이라고요. 생일은 제가 한 달 정도 빨라요.”
이제 분위기는 어색함을 넘어 적막한 사막이 됐다. 나는 더 말해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인정하고 준비해놨던 〈유진박 질주〉를 재빨리 손님 앞에 내놓았다. 책 상태는 이만하면 준수하고 1999년 초판에 부록인 뮤직비디오 시디도 미개봉 상태다. 이 책을 처음에 산 사람도 읽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고는 책장 속 어딘가에서 잊혔다가 이사하는 날 발견하고는 ‘아, 이 책 있었지’ 하면서 잠깐 추억에 빠졌을 것이다. 마치 실제 유진 박이 그렇게 잊힌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전 서태지보다 유진 박이었어요. 그런데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하고 난 다음에도 친구들은 다들 여전히 서태지 팬이었기 때문에 저만 유진 박 좋아한다고 말하기 어려웠어요. 그냥 조용히 좋아했어요. 친구들한테 말도 안 하고 주말에 몰래 유진 박 콘서트 갔다 오고 그랬어요.”
유진 박이 한창 인기 절정을 달리고 있을 무렵 쓴 〈유진박 질주〉는 내용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는데, 앞부분에는 미국 줄리어드 음대를 졸업한 그가 한국에 와서 활동하며 느낀 여러 가지 단상을 적었다. 두 번째 부분은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뮤지션들에 대해서 썼다. 재미있는 점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며 인기를 끈 바네사 메이를 혹평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방송에서도 두 사람을 자주 비교했다. 이에 유진 박은 “그녀에겐 이미지만 있고 음악이 없다”라며 싱어송라이터이자 로커인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하긴 1999년의 유진 박을 누구와 또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서태지는 별것도 아니에요”
이 책을 산 손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대학 진학과 함께 자연스럽게 유진 박 음악과 멀어졌다. 졸업 후엔 곧장 취직했고 현재는 결혼해서 아이가 둘이다. 그동안 유진 박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이 안타까운 사연은 꺼내보지도 않은 뮤직비디오 시디처럼 기억 속에서 잠들어 잊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텔레비전을 보고야 유진 박을 다시 찾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서태지는 별것도 아니에요. 저는 아직도 유진 박 팬이에요. 이젠 누구에게도 숨기고 싶지 않네요.”
그런 말을 하며 웃는 모습이 마치 유진 박의 그것처럼 한없이 천진난만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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