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처음 ‘코로나 블루’라는 말을 들었을 때 “이름이 참 예쁘기도 하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엔도 슈사쿠의 소설 〈침묵〉 속 문장이 떠오른다.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나도 푸릅니다.” 요즘 자주 너무 깊고 푸르러, 오히려 까맣기까지 한 아득한 심연으로 가라앉는 경험을 한다.

방역 당국이 지난 8월30일부터 수도권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를 시행하면서 내가 일하는 곳도 본격적으로 근무 방식을 바꾸었다. 집에서의 일상도 달라졌다. 작은 원룸은 집이자 사무실이 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출근하기까지 3초면 충분했다. 작은 노트북에 얼굴을 파묻고 일하느라 금세 허리가 아파왔고, 하루 종일 ‘셀프 감금’ 상태가 되니 우울감과 고립감이 찾아왔다. 마음의 증상은 몸으로 이어졌다. 꼬박 나흘간 심한 두통과 고열에 시달렸다.

그즈음, 친구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회사 사정도 어려워졌고, 아이들이 집에서 수업을 해야 하는데 전적으로 돌볼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매일 수다 떠는 ‘자매님’들과의 단톡방들도 점점 말을 잃어갔다. 일하며 아이를 양육하는 S는 매일 양육자, 학습지도자, 돌봄 노동자, 프리랜서 노동자라는 ‘다중 소명’을 감당하다 번아웃 상태가 되어 며칠 내내 잠만 잤다고 한다. 프리랜서 강사인 A는 ‘수입 0원’ 상태가 되었다며 한숨을 쉰다.

코로나19 이후 각종 사회지표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는 가운데, 코로나19가 유독 여성의 삶을 더 잔인하게 후려치고 있다는 데이터가 속속 보고되고 있다. 여성 실업률은 높아지고, 노동환경은 악화되었다. 돌봄 노동의 부담은 마냥 증가하는데 대책은 없다. ‘이 시국’에도 각종 성범죄는 줄어들지 않는다. 최근 발표된 바에 따르면, 20·30대 여성 중심으로 자살률이 급증하고 있다. 국가적 재난 상황에는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회적 유대감이 작동하여 오히려 자살률이 감소하는 ‘지연된 자살’ 효과가 나타나기 마련인데, 비대면과 고립이 일상화된 코로나19 사회에서는 그 효과가 오히려 축소되었다. 사회적 안전망이 무너진 곳에서 견디고 견디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다. 이 심상치 않은 징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다들 어떻게 견디고 있는 걸까?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을 ‘업’시키고자 틈틈이 ‘오늘 경험한 좋은 일’ 같은 소소한 일상을 SNS에 올린다. 랜선 친구들이 그 글을 읽는 동안이라도 ‘블루’ 상태에서 벗어나 알록달록한 마음으로 살길 바란다. 다른 지인은 매일 고양이 사진과 식물 사진을 올린다. 맑은 날이면 SNS에 하늘 사진이 한가득이다. 다들 비슷한 마음일 것이다. 이렇게라도 좋은 순간을 공유하며 서로 위로하고 연결되려는 마음 말이다. 이렇게라도 코로나 블루에 갇히지 않으려 다들 애를 쓰고 있다.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음의 방역’

코로나19에 관한 정부의 대응을 보며 생각한다. ‘높으신 분들은 시민들의 마음 상태에는 관심이 없는 걸까?’. 사회적 거리두기를 조절하는 기준도, 재난지원금 지급 대상을 선정하는 기준도 언제나 ‘경제’ 논리가 앞선다. 물론 생계를 지원하는 일은 시급하고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도 많다. 아이를 양육하는 가정에 돈을 지급한다고 돌봄 노동 지옥에 빠진 여성들이 탈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사각지대에 고립된 여성들을 구원하기도 역부족이다. 자영업자들의 영업권 논의만으로는 ‘일할 권리’를 빼앗긴 이들의 목소리를 모두 담을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마음의 방역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의 말처럼, 경제 논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존재를 살필 수 있는 사회안전망이 시급하다.

기자명 오수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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