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 황제.

‘전설의 고향’ 같은 이야기로 시작해볼까. 조선 후기 왕족으로 남연군이라는 사람이 있었어. 후일 흥선대원군이 되는 흥선군 이하응의 아버지였지. 남연군이 죽은 뒤 어느 날 이하응은 지관 정만인으로부터 ‘명당’을 추천받게 돼. “충청도 덕산(오늘날의 예산) 가야산 아래 이대천자지지(二代天子之地), 즉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명당이 있습니다.” 이하응은 포부가 큰 사람이었지. 그는 경기도 연천에 묻혀 있던 아버지의 무덤을 열고 충청도 가야산 기슭의 명당으로 아버지를 옮겼어.

명당을 차지한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1865년 철종 임금이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나면서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이 별안간 왕좌에 앉게 됐다. 조선 26대 임금 고종이야. 나이 열두 살. 고종이 왕위에 오를 당시 조선 왕조는 안이 다 파 먹힌 고목과 같았고, 밖으로는 서양 세력이 본격적으로 달려드는 내우외환에 처해 있었다. 알다시피 그의 치세에 우리 조상들은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아픔을 겪게 되지.

참담한 몰락의 원인으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오늘은 19세기 중엽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조선의 왕과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군주, 고종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볼까 해. 이왕 글의 서두를 전설로 시작했으니 야사(野史) 한 자락을 더 펼쳐보자. 구한말 궁궐에서 오래 근무했던 정환덕이라는 이가 쓴 〈남가록(南柯錄)〉이라는 비망록이 있다. 이 책에는 즉위 초 고종의 에피소드 하나가 등장하지. 자신이 왕이 되어 만백성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쥐었다고 확인받은 순간 고종은 첫 어명을 내린다. 그런데 그 어명이 매우 황당했어.

“우리 집 앞 골목의 군밤 장수를 죽여라. 그놈은 다른 애들 다 주면서 나한테는 공짜로 군밤을 준 적이 없다.” 신하들이 기절초풍하여 “그래도 이건 아닙니다” 뜯어말린 덕분에 군밤 장수는 횡액을 면했다고도 하지. 흥미로운 일화이지만 사실로 받아들일 근거는 없다. 그러나 전설은 크든 작든 진실을 함유하게 마련이야. 아빠는 이 일화에서 고종이 장차 보여줄 몇 가지 악덕(惡德)을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해. 첫째, 왕이라는 위치에 대한 통찰력 부족(왕으로서 처음 생각난 사람이 군밤 장수라니). 둘째,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성향(저 녀석은 나에게만 군밤을 주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거스르는 자에게 보여주는 잔인함(그러니 죽여라).

흔히들 드센 아버지 대원군과 그에 지지 않고 맞설 만큼 영민했던 아내 명성황후 사이에 끼어 샌드위치 노릇을 했던 허약한 군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아빠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고종은 자신이 조선의 왕이자 대한제국의 황제라는 사실을 결코 망각한 적이 없었다. 왕위를 지키고 싶은 열망은 하늘을 찌르나, 어떤 왕이 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통찰은 땅이 꺼질 만큼 허약한 것이 문제였지.

고종은 자신의 신하들을 믿지 않았고 자기 백성들을 존중하지 않았다. 그가 갈망했던 것은, 그의 지위와 권리를 지켜줄 ‘더 확실한 힘’ 외세였어. 전봉준과 동학농민군은 낡은 세상을 바꿔보겠다고 일어섰으나 “주상 전하는 영민하시나 그 신하들이 나빠서”라며 임금에 대한 충성을 버리지 않던 고종의 백성들이었다. 그런데 고종은 이들을 쓸어버리기 위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였고 이에 자극받은 일본군도 출동하게 만들어 급기야 자신의 나라를 외국 군대의 전쟁터로 전락시켜버렸지. 국왕으로서의 자격을 포기한 최악의 처사였어.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한 나라의 최고 통치자는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이 앞장서고 희생하는 모범을 보여 국민들을 단결시키는 구심점이 돼야 해. 그러나 고종은 최악의 행동을 보인다. 일제의 침략에 분노한 백성들이 의병을 일으키자 고종은 그들에게 비밀 교서도 내리고 벼슬도 주었지만 그뿐이었어.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그들의 패배는 외면해버렸지. 일종의 ‘간 보기’였다고 할까. 의병 투쟁이 성공하면 좋지만 여의치 않으면 모르쇠하고 손해 보지 않겠다는 심산. 수많은 조선인들이 싸우다 죽어갔지만, 그들의 황제 고종은 유유자적 일본 돈을 받아가며 여유롭게 살다가 죽었다.

일본 공사와 낭인은 건드리지도 못했으면서

전 세계적으로 절대군주제가 사멸해가던 시절 조선 민중의 정치적 각성을 드러낸 만민공동회, 외국인들도 놀라고 찬탄을 금치 못했던 그 뜨거운 열기를 산산조각 낸 후 그가 내밀었던 ‘대한국 국제(대한제국의 헌법)’는 수준 낮은 문장으로 가득하다. “대한국 대황제께옵서는 무한하온 군권(君權)을 향유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바 자립정체(3조) 법률을 제정하옵셔 그 반포와 집행을 명하옵시고 만국의 공공(公共)한 법률을 효방하사 국내법률도 개정하옵시고 대사(大赦)·특사·감형·복권을 명하옵시나니 공법에 말한바 자정율례(自定律例)한다(6조).” 이처럼 나라를 호주머니 속 군밤같이 여긴 고종은 후일 이토 히로부미로부터 망신을 당한다. 고종이 을사늑약 내용을 백성들과 상의하겠다고 하자 이토 히로부미가 한 방을 ‘멕인’ 것이지. “대한제국은 폐하가 선포하신바 황제에게만 주권이 있는 전제국가입니다. 전제국가 황제가 왜 백성에게 묻겠습니까.”

더하여 고종은 평생 잔인함을 버리지 않았다. 마키아벨리도 “군주는 잔인하다는 평판쯤은 개의치 말아야 한다”라고 했지만 고종의 잔인함은 군주로서의 그것이 아니었어. 외세에는 비굴했고, 군밤 장수처럼 자신이 돌보아야 할 약자들과 자신의 비위를 거스른 이들에게는 잔인했다. 을미사변으로 아내를 잃은 후 충격과 분노는 당연하지만 일본인들을 향해서 복수를 시행하거나 꿈꾼 적은 한 번도 없었어.

대신 화를 입은 건 그의 백성들이었지. 일본인들이 불태워버린 시신을 수습하려던 이가 도리어 ‘불경죄’로 참살을 당했다. 사건의 주범이라 할 미우라 고로 일본 공사와 일본 낭인들은 건드리지도 못하는 주제에 민씨 척족에 대한 분노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조선인들(농학자 우장춘의 아버지 우범선 등)은 절대로 용서치 않았어. 갑신정변 후 개화파들의 가족까지 연좌해 학살한 것은 물론, 끝내 김옥균을 암살한 뒤 그 시신을 싣고 와서 토막을 내고 팔도에 돌려버린 것이 고종이었어. 갑신정변 뒤의 연좌제 학살을 지켜본 일본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런 나라는 망하는 게 그 나라 인민에게 도움이 된다”라고 뇌까렸고, 김옥균의 시신이 전국에 조리돌림되는 걸 본 유학생 박중양은 이런 못난 조선 따위 망해도 좋다는 신념으로 ‘친일파’로 전락했다.

율곡 이이는 나쁜 임금의 종류(?)를 이렇게 구별했다. “폭군이란 욕심이 지나치고 바깥의 유혹에 빠져 백성의 힘을 다 빼앗아 (···) 스스로 멸망에 이르는 자이며, 혼군(昏君)은 정치를 잘하려는 뜻은 있지만 총명하지 못해 현명한 자 대신 간사 무능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자들을 기용해서 패망하는 군주이며, 용군(庸君)은 나약하고 과단성이 없어 구태만 되풀이하다가 나라를 망치는 이다(〈율곡전서〉 ‘잡저·동호문답’).” 이 기준에 따르자면 고종은 ‘폭군’으로 자리매김될 듯하다. 혼군이라기에는 ‘정치를 잘하려는 뜻’보다 ‘내 권력을 지키려는 뜻’이 절절했고, 용군이라고 하기에는 권력 앞에서 결코 나약한 인간이 아니었기에. 결론적으로 흥선군이 이장까지 하면서 마련한 아버지의 묘는 결코 명당이 아니었구나.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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