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에 관한 강의를 하러 가면 수강생들에게 본인이 생각하는 ‘차별’의 전형적인 사례를 하나씩 얘기해달라고 요청하곤 한다. 어떤 사람은 영화 〈그린북〉에 나오는, 주인공이 흑인이라는 이유로 레스토랑 출입을 제지당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최근 몇몇 공공기관과 금융기관에서 성별과 학벌을 이유로 불이익당한 사례를 언급하는 사람들도 있고, 비정규직에 대한 부당한 차별 대우나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러 관련 사례를 제시하고 차별에 해당하는 경우를 골라보라고 하면 수강생들의 선택지에 큰 차이는 없다. “무엇이 차별인가”에 관한 대중의 감각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차별이라고 꼽은 행위들이 왜 나쁜지, 왜 금지되어야 하는지 물으면 약간의 혼란에 빠진다. 나쁘니까 금지되어야 하고 금지된 것이 나쁜 것이라는 순환논법에서 쉽사리 빠져나오지 못한다. ‘평등한 기회를 누릴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에 나쁜 것이라는 얘기가 나와야 겨우 논의가 진전된다. 그런데 차별의 문제는 ‘평등권 침해’ 정도로만 얘기하고 넘어가기에는 훨씬 더 복잡하다. 이러한 난제에 답변할 수 있어야 왜 오늘날 우리가 그토록 차별 문제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며 차별금지법 제정을 목 놓아 외치는지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폭력·사기·부정부패 등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나쁜 행위 또는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 있다. 그중에서 차별을 별도의 범주로 분류하여 특별한 조치를 취하자고 주장하는 이유가 차별이 가장 나쁘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나쁜 정도로 치자면 차별보다 더 나쁜 행위도 얼마든지 있다. 차별을 독립 의제로 삼는 것은 차별에 대해 다른 범죄적 행위들과는 다른 특별한 조치를 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차별이 폭력이나 사기 같은 범죄라면 형법에 조문을 추가해서 경찰이 수사하고 검찰이 기소해 법원의 재판으로 처벌받게 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차별금지 법안에 담긴 차별금지 방법은 범죄에 대처하는 방식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차별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부당함(wrongness)과 개인적·사회적·집단적 해악(harm) 때문이다.
간단한 예를 생각해보자.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의 음식점 출입을 거절한 사례와 히잡을 입은 사람의 음식점 출입을 거절한 사례. 학교에서 선풍기로 시험지를 날려서 멀리 날아간 순서대로 높은 성적을 부여한 경우와 학교에서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또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불이익을 준 경우. 언뜻 보기에 모두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세상의 모든 바람직하지 않은 행위를 다 차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노란 옷을 입었다고 먹고 싶은 음식을 못 먹거나, 시험지가 덜 날아갔다고 불이익을 받았다면 분명 억울할 것이다. 그런데 종교, 성적 지향, 성별, 인종, 출신 지역, 나이 등을 이유로 불평등한 대우를 받았을 때는 단순히 억울하다는 심정 그 이상의 문제가 생긴다. 차별의 피해자들은 차별을 당했을 때 인격적 모멸감이나 수치심 또는 모욕·비하·멸시당하는 느낌이 든다고 말한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고 호소하기도 한다. 흔히 손님을 가려 받을 자유가 있고, 회사는 원하는 사람을 채용할 수 있어야 하며, 학교는 원하는 학생을 입학시킬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첫 손님으로 여성은 재수 없다며 문전박대한다면?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채용을 거부한다면? 특정한 종교를 가진 사람만 입학을 허용한다면? 당사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눈살이 찌푸려지고 거부감이 든다. 이 거부감의 실체를 파악한다면 차별의 부당함과 해악의 본질에 좀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행위를 하는 쪽에 주목하더라도 차별은 분명히 다른 차원의 문제를 야기한다. 노란 옷 입은 사람의 출입을 금지한 음식점의 사장이 노란색을 혐오하거나 노란 옷 입은 사람을 업신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은 아닐 터이다. 어떤 영업장에서 드레스코드를 정하는 일이 무조건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선풍기 교수’도 덜 날아간 시험지를 작성한 학생들을 증오하거나 비하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물론 부적절한 성적 처리는 잘못된 일이고 그 교수는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 교수가 차별했다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사안에서는 앞서 언급한 차별의 여러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차별의 결과는 특정 사건에 머무르지 않는다
사회적 영향은 어떨까? 차별은 특정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기반을 두고 있다. 편견과 고정관념이 머리와 마음속에 머물 때는 그 자체로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지만, 하나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기 시작하면 엄청난 파급효과가 나타난다. 윤리적 결단에 따라 편견을 억누르고 있던 사람도 주위에서 너나없이 차별을 말하고 실행에 옮기면 마음이 흔들리기 마련이다. 최소한의 심리적 장벽이 무너지고 편견과 고정관념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며 어느 순간 거리낌 없이 차별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결국 차별을 적절히 규제하지 않으면 차별이 허용되는 ‘사회적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란 옷을 입은 사람의 출입을 금지하는 음식점이 하나 있다고 해서 노란 옷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리는 없다. 하지만 ‘히잡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내건 음식점이 있다면 문제의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그건 “내 공간에 들어오지 마라”를 넘어 “무슬림에게 이런 대우를 해도 좋다”라고 만천하에 공표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동참을 호소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는 그냥 노란 옷이 싫어서요”라는 사장의 항변은 들어줄 만하지만, “그냥 무슬림을 제 가게에 들이기 싫다는 거지, 다른 뜻은 없어요”는 변명이 될 수 없다. 이 대목에서 ‘의도’가 아니라 (사회적) ‘효과’가 차별 여부를 판단할 때 중요한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실제로 차별을 심각한 사회문제로 여기는 까닭은 차별의 결과가 어떤 특정한 사건 하나에만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다. 노란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제지당했다면 다른 치킨집에 가서 사 먹으면 된다. 굳이 꼭 그 집의 치킨을 먹어야겠다며 우울해하는 노란 옷 친구가 있다면, “파란 옷 입고 가면 되잖아”라고 조언해줄 수 있다. 그런데 히잡을 입었다는 이유로 치킨집 출입을 제지당한 친구가 느끼는 분노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그 친구에게 “다른 치킨집에 가면 되잖아”라든가, “다른 옷 입고 가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를 굳이 더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히잡을 입었다는 이유로 출입을 제지당한 친구는 그 특정 가게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한이 맺힌 게 아니다. 이 사회에서 내가 ‘환영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목도했으며, 공부하고 일하고 먹고 쉬고 노는 일상생활을 영위할 때 언제 어디에서든 누군가가 나를 ‘환영하지 않을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에 분노한다. ‘히잡 출입금지’ 팻말을 내건 가게만의 문제가 아닐 수 있기에 어느 가게에서도 그런 팻말을 내걸지 못하게 하는 것이 차별금지의 원칙이다.
차별은 폭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차별은 어떤 집단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차별은 그 집단이나 그 구성원의 의견을 무시하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의 의견을 존중할 생각이 없고 내 맘대로 처분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폭력의 유혹에 빠지기 마련이다. 감히 나의 지시를 거부했으니 폭력으로라도 내 의사를 관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멸하고 무시하고 하찮은 존재로 대우받는 집단은 폭력에도 취약할 수밖에 없다. 더 큰 폭력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차별은 금지되어야 한다.
‘하필 지금’이 아니라 ‘이제야’ 해결하려는 것
이러한 차별의 특수성 때문에 차별에 대처하는 방법이나 조치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선풍기 교수’의 경우는 개인의 일탈행위일 가능성이 크다. 그 교수를 징계하고 공정하게 채점해 성적을 다시 부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 어떤 교수가 종교, 성적 지향, 성별, 인종, 출신 지역, 나이 등을 이유로 어떤 학생에게 불이익을 줬다면 그건 특정 학교의 특정 교수의 일탈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다. 다른 교수들도 비슷한 차별에 알게 모르게 동참했을 수 있고, 다른 대학에서도 이미 만연한 일일 수 있다. 우리 사회 전반의 문제일 가능성도 당연히 고려되어야 한다. 즉, 어떤 교수의 차별행위가 적발되었다면 그 교수를 징계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대학은 물론이고 교육부, 범정부 차원의 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구체적인 제재 또한 달라야 한다. 설명의 편의를 위해 아주 전형적인 예를 들었지만 사실 차별의 양태와 수위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어떤 교수가 수업시간에 차별적 편견이 담긴 일화를 소개한 정도로도 차별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수사를 해서 감옥에 넣어야 할 범죄 취급을 할 수는 없다. 차별 문제는 유죄냐 무죄냐의 일도양단으로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다반사다. 차별 조사와 구제조치를 위한 전문기관이 있어야 하며, 차별의 양태와 종류, 정도에 따라 다양한 조치들이 촘촘히 마련되어야 한다. 세계 각국이 차별에 대한 예방, 정책 수립, 조사, 구제 등을 차별 시정기구에 일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모든 조치가 총망라된 법률이 다름 아닌 차별금지법이다.
여기서 차별은 공적 영역뿐 아니라 사적 영역에서도 문제가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여러 차별의 문제들은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또는 공공기관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회사, (사립)학교, 음식점, 카페 등 일상적인 삶의 영역에서도 차별의 해악은 마찬가지다. 사적 자치와 자유가 보호되어야 하는 사적 영역에서도 차별의 해악은 똑같은 방식으로 발생하고 작동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 하필 지금 차별을 이슈화하고 차별금지법 제정을 주장하느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하필 지금’이 아니라 10년 넘게 정체됐던 해묵은 과제를 ‘이제야’ 해결하려는 것이다. 차별이 사회에 해악을 끼치고 있고 차별로 고통받는 개인과 집단이 존재하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특별한 대책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5000개에 달하는 법령을 가진 대한민국에서 차별금지법이라는 법률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