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

이해찬을 만났다. 그는 더불어민주당 대표 임기를 8월에 마치고 은퇴했다. 4월 총선에서 180석(비례위성정당 성적 포함)을 가져오면서, 직업정치가 인생 마지막 선거를 역사적인 압승으로 마무리했다. 8월28일 퇴임 기자간담회 말고는 일절 언론에 나서지 않던 그를, 9월9일 여의도 개인 사무실에서 독점으로 만났다. 2시간을 예정한 인터뷰는 20분 더 길어져 140분 만에 끝났다.

‘버럭 해찬’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맡은 과업을 잘 끝내 홀가분한, 유쾌하고 배려 많은 정치가가 있었다. 그는 줄담배로 유명하다. 이날도 담배를 연이어 다섯 대 피웠다가, 취재진이 창문을 여는 걸 보고는 딱 멈췄다. 무심코 담뱃갑을 잡다 멈칫하고 내려놓는 동작을 인터뷰 내내 반복하면서도 끝내 다음 담배를 물지 않았다. 농담도 자주 했고 ‘자학 개그’도 했다. 초선 의원 시절이던 1991년 탈당했다 돌아온 일을 회고하다 “한 짓 봐서는 날아갔어야 마땅한데”라고 말해 기자를 웃겼다.

딱 하나만 물어보겠다고 해서 성사된 인터뷰였다. 20년 집권론. 이해찬은 당 대표가 된 2018년 8월 전당대회 때도 20년 집권론을 내걸었고, 올해 8월28일 퇴임 기자간담회에서도 20년 집권을 당부했다. 그는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 장관, 노무현 정부에서 국무총리, 문재인 정부에서 집권당 대표를 지냈다. 각 대통령과 관계가 그보다 긴밀했던 사람은 있었을지라도, 세 정부 모두에서 이 정도로 핵심이었던 사람은 그밖에 없다. 그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지금 집권세력의 세계관과 사고구조를 그보다 잘 보여줄 적임자는 없다. ‘20년 집권론’이라는 슬로건은 그 세계관이 응축된 결과물이다.

왜 20년 집권인가. 뭘 하려고 20년 집권이 필요한가. 민주당은 무엇을 해야 20년 집권을 해낼 수 있나. 당 대표 2년 동안 어떤 준비를 했나. 2022년 대선이 요구할 리더십은 무엇인가. 이 모든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화두다. 그래서 딱 하나를 물어보는 인터뷰가 140분 걸렸다.

 

2018년 전당대회 때 ‘20년 집권론’을 들고나왔습니다.

사실은 전당대회 이전에, 2017년 대선 유세 때 처음 그 얘기를 했어요. 이번 대선 승리를 넘어서 앞으로 계속 집권을 해야 한다고. 얼마나 해야 한다는 거냐고 묻는 사람도 있고 하다 보니 그게 20년 집권론으로 발전을 했지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지형을 보면 정조 대왕이 1800년에 돌아가십니다. 그 이후로 220년 동안 개혁 세력이 집권한 적이 없어요. 조선 말기는 수구 쇄국 세력이 집권했고, 일제강점기 거쳤지, 분단됐지, 4·19는 바로 뒤집어졌지, 군사독재 했지, 김대중 노무현 10년 빼면 210년을 전부 수구보수 세력이 집권한 역사입니다. 그 결과로 우리 경제나 사회가 굉장히 불균형 성장을 해요. 우리 사회를 크게 규정하는 몇 가지 영역들이 있습니다. 분단 구조, 계층 간·지역 간 균형발전 문제, 부동산 문제, 또 요즘 이슈인 검찰개혁 문제 등이 그렇죠. 이런 영역들이 다 규모는 커졌는데 구조는 굉장히 편향된 사회로 흘러온 겁니다.

 

ⓒ시사IN 조남진2018년 8월25일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해찬 대표 후보가 인사하고 있다.

편향을 복원하려면 20년은 집권해야 한다는 뜻이군요.

복원도 아니고, 복원을 시도해볼 틈새. 그 틈새 정도만 만들려고 해도 20년은 노력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분단구조에 틈새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그게 이명박·박근혜 정부 들어와서 5·24 조치(천안함 침몰 이후 이명박 대통령이 내놓은 대북 교류 단절 및 봉쇄 조치) 하고 개성공단 폐쇄하고 하면서 다 무너지지 않습니까. 부동산도 그래요. 노무현 정부 시절 제가 총리를 할 때 국민소득이 2만 달러고 가계부채가 600조원이었습니다. 그때도 유동성 때문에 부동산 투기가 심하다고 그랬는데, 지금은 국민소득 3만 달러에 가계부채가 1500조원이 넘어요. 소득은 50% 올랐는데 가계부채는 150% 늘어난 겁니다. 노무현 정부 때 LTV와 DTI를 처음 만들어서 부채를 컨트롤하니까 2008년 금융위기 때 같이 쓸려가지 않고 살아남았잖아요? 그런데 이명박 정부부터 초과이익환수제 풀고 다주택 보유 풀고 하면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버렸어요. 이런 게 균형이 깨진다는 겁니다.

 

20년을 연속 집권하면 다릅니까?

개혁 정책이 뿌리내리려면 그 정도는 걸립니다. 미국의 사회제도는 참고할 만한 게 별로 없어요. 독일이나 영국이나 또는 북유럽 국가들에서 자리 잡은 개혁정책을 보면 사민당이나 노동당이 20~30년씩 집권하면서 만들어낸 겁니다.

 

보수가 너무 약해 보여서 승리를 과신하는 건 아닌가요?

보수가 너무 세기 때문에 20년 집권이 필요합니다. 제도정치권 딱 한 군데만 보수가 약해요. 220년 중에 210년을 집권한 세력이 보수입니다. 경제, 금융, 언론, 이데올로기, 검찰… 사회 거의 모든 영역을 보수가 쥐고 있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이렇게 균형이 무너진 나라가 없어요.

 

어째서 제도정치는 예외인가요?

한국의 큰 역설입니다. 보수에 하도 시달리다 보니 역설적으로 국민의 정치의식이 매우 높아졌습니다. 1980년 광주에서는 군이 나왔는데 1987년엔 못 나왔어요. 전국이 다 들끓으면서 군이 나왔을 때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습니다. 이길 수 있다는 경험, 폭력 없이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경험을 하니 정치적 효능감이 올라갔습니다. 결국 대통령 탄핵까지 시켰잖아요. 1987년 6월항쟁부터 2016년 촛불까지가 하나의 흐름인 겁니다. 국민들 정치의식이 굉장히 높아졌기 때문에 다른 분야가 다 보수인 와중에도 제도정치만 섬처럼 예외가 되었습니다. 그것마저 없었으면 일본처럼 되었겠죠.

 

민주당이 이제는 집권세력인데도 아직 민주화 투쟁 중이라고 착각한다는 냉소도 있습니다.

그렇지가 않아요. 경제, 사법, 언론 이런 곳이 민주화가 안 돼 있잖아요. 사회 제반 영역이 다 민주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강하고, 시민사회가 강하고, 언론이 강해져야 해요. 사회의 나머지 영역이 민주화되어 있으면 우리가 선거 한두 번 국민 선택을 못 받아도 사회는 회복이 가능해요. 지금은 제도정치 한 곳에서 정당만 섬처럼 있으니까, 노조·시민사회·언론이 다 취약하니까, 정당이 밀려나면 다 밀려나는 겁니다.

 

민주화의 의미를 일반적 용법보다 훨씬 넓게 쓰는 것 같습니다.

민주화는 투표나 직선제 같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가치와 주체의 문제입니다. 투명성이 높아야 하고, 참여의 공간이 있어야 하고, 균형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게 총체적으로 달성되는 게 민주화인데, 지금은 사회 각 영역이 불투명하고 참여가 제약되어 있고, 그 결과로 균형이 무너져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 경제가 재벌 위주 아닙니까. 재벌이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리는 것처럼 아우성을 치는데, 실제 현실이 그런 면도 있어요. 워낙 독점이 돼 있으니까. 이런 곳들이 속속들이 민주화되어야 정권을 놓쳐도 사회가 후진하지 않고 균형을 잡을 수 있지요.

 

재벌이 민주화된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기업 이사회에 주주 말고 다른 이해관계자가 들어가야죠. 그런 참여가 의사결정구조를 개방적이고 투명하게 해주거든요. 그 결과로 균형 잡힌 결정이 나오는 것입니다. 개혁 세력이 장기 집권한 나라에서는 이사회에 노조가 참여하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제가 교육부 장관을 할 때 사학재단을 보면, 교육법인이라 증여세나 상속세를 면제받아요. 공익 기관으로 인정하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런데 재단 이사회는 공익성이 없어요. 이건 이상하다 해서 개방형 이사제 도입해서 재단 운영을 투명화시켰습니다. 사기업도 마찬가지죠. 기업 활동에 이해관계가 있는 주체는 자본과 노동과 소비 아닙니까. 주주도 노동도 이사로 들어가는 게 맞습니다. 소비 쪽에서도 공익이사 같은 식으로 들어갈 수 있지요. 이러면 기업의 의사결정구조가 투명해집니다. 지금은 투명하지 않으니까 사업 방향이나 투자 결정이 개방적이지도 객관적이지도 않은 것이죠.

 

기업은 주주의 것인데 주주의 소유권을 침해한다는 반론이 많겠는데요?

재산권만 중시하니까 그런 사고가 나오는 겁니다. 어느 나라든 이해관계자들이 두루 참여하는 의사결정구조를 만듭니다. 어느 정도로 들어오느냐 차이지.

 

비슷한 맥락에서, 민주당의 부동산 정책이 집주인의 소유권을 침해한다는 비판을 받곤 합니다.

우리가 기본적으로 토지공개념을 가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국민적 동의가 있어요. 토지는 확장할 수 없는데 땅은 좁고 인구는 많으니 토지공개념 없이는 유지가 안 되는 나라입니다. 이게 공식화된 게 노태우 정부 때입니다. 그때부터 토지공개념을 잘 발전시켜왔으면 지금 이런 꼴이 안 되죠. 반포에 재개발을 하겠다고 조감도 만들어놓은 걸 보니까 호화판도 이런 호화판이 없습니다. 5층짜리를 35층으로 올리는데 그중에 일부라도 공공주택으로 하자니까, 그냥 안 하겠다 해버리잖아요. 은마아파트도 지금 그런 거잖습니까. 정부가 용적률을 준다는 건 공적 자원을 준다는 뜻이거든요. 하늘은 개인 소유가 아니잖아요. 공적 자원을 줘서 고층으로 올릴 수 있게 해주되, 거기서 나오는 초과이익은 공공의 것이니까 환수하라는 것이지요.

 

ⓒ연합뉴스1987년 6월 연세대 학생들이 호헌 철폐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해찬에게 ‘민주화’란 군사독재를 종식하고 주기적으로 선거를 치르고 대통령을 직접 뽑는 것, 그 이상이다. 그에게 민주화란 의사결정구조가 개방적이고 투명하고 이해관계자 모두의 참여가 보장되는 것이다. 그 결과로 균형이 복원되고 더 나은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규모만 커진 불균형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민주화는 투명성·개방성·참여를 무기로 이 불균형 구조를 치유하는 것이다. 이러면 소유권이라는 개념도 재구성되기에 이르는데, 기업 이사회에 노동과 소비의 이해관계자가 참여하는 것은 주주의 소유권을 신성불가침에서 끌어내려 상대화한다. 21대 국회에서 민주당이 통과시킨 임대차 3법은 세입자의 권리를 강화하여 집주인의 소유권을 상대화한다. 이렇게 개념을 확장하면 경제계, 시민사회, 학계, 언론계, 법조계 등 사회 전 영역이 민주화라는 과제를 안게 된다.

 

이러면 ‘보수’의 의미도 확장된다. 이해찬에게 보수란 특정한 세력을 뜻하기도 하지만, 민주화된 의사결정구조의 반대말이기도 하다. 효율, 선택과 집중, 상명하복, 권위주의로 작동하는 의사결정구조 그 자체다. 그러므로 정치세력으로서의 보수가 쪼그라든 후에도 보수적 의사결정구조는 사회 제 영역에서 여전히 표준으로 통한다. 정치적 보수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그 표준을 내면화한 사람들이 사회 곳곳에서 의사결정자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보수가 너무 세기 때문에 20년 집권이 필요한 겁니다”라는, 얼핏 현실과 반대로 보이는 진단은 그래서 나왔다.

 

* 인터뷰 전문은 판매중인 〈시사IN〉 679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2편은 내일 공개됩니다.

구독 - https://subscribe.sisain.co.kr/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