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조정래 작가는 최근 오대산 월정사 입구에 ‘세심헌’이라는 작업실을 마련했다. 창작을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집이라는 뜻이다.

예상치 못했다. 10년 전에 읽은 책이었다. 표지와 본문 편집이 바뀌었다고 해서 무에 그리 다르랴 싶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새 책 같았다. 대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는 작가의 답변은 ‘자전소설’에 가까웠다. 문학론에서부터 작가 정신, 창작 기법, 인생론은 물론 남다른 성장 배경에 이르기까지 소설에서는 접하기 힘든 작가의 또 다른 ‘문학 산맥’이었다. 이번에 등단 50주년을 기념해 새로 독자들과 만나는 조정래 작가의 〈황홀한 글감옥〉 얘기다.

지난 8월4일 유례없이 긴 데다 유례없는 폭우를 쏟아붓던 장마를 뚫고 강원도 평창으로 향했다. 조정래 작가가 최근 마련한 ‘글감옥’이 오대산 월정사 입구에 자리 잡고 있다. 자신의 실존 전부를 글쓰기 안으로 유폐시키는 새 작업실의 당호는 세심헌(洗心軒). 오로지 창작을 위해 마음을 다스리는 집이라는 뜻이겠다. 단정한 한옥 두 채와 낮은 담장 뒤로는 아름드리 금강송들이 하늘을 향해 곧추 서 있었다. 솔숲 뒤를 에돌아가는 계곡 물소리 또한 넉넉했다.

두 권의 책을 들고 갔다. 새로 나온 〈황홀한 글감옥〉과 월간 〈현대문학〉 1970년 6월호. 작가는 50년 전 저 문예지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이후 반세기에 걸친 창작 생활이 저 ‘자전소설’에 응축되어 있다. 작가에게 ‘등단 50년’은 어떤 무게일까. 동행한 김은남 기자가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어렵사리 구한 〈현대문학〉을 받아든 작가는 감회가 남다른 듯했다. 누렇게 바랜 문예지를 펼쳐보던 작가는 “그때는 앞이 캄캄했다. 이렇게 50주년을 맞이할 줄은 꿈도 못 꿨다”라고 말했다. 그때 작가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박정희 정권의 근대화가 본격 시동을 걸던 시기였다.

등단 50주년이다. 소회가 남다르실 텐데.

모든 문인이 그렇겠지만 등단하면 천하를 얻은 기분이다. 1970년 등단했을 때 나도 기쁨에 취해 있었다. 그런데 어떤 저명인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불쾌했다. 난 다 완성된 작가라는 자부심이 대단했기 때문이다. 일 년도 못 돼 그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나는 출발선상에 있었다. 문학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고, 그때 정신적으로 준비를 하게 됐다. 낭만이나 방탕은 예술가에게 주어진 특혜가 아니다. 나는 철저하게 나 자신을 관리하기로 했다. 문학을 형식이 아닌 내용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등단 50주년을 맞아 현대사 3부작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개정판을 낸다고 들었다. 한번 쓴 글은 다시 보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번에 자신의 소설과 다시 만나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예술을 한다는 건 무모하거나 잔인한 일이고 시건방진 일일 수도 있다. 수많은 천재가 나보다 먼저 좋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걸 능가하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도전하는 게 예술이다. 내가 쓴 작품조차도 나의 적이었다. 〈태백산맥〉은 〈아리랑〉의 적이었고, 〈아리랑〉은 〈한강〉의 적이었다. 새로움을 찾기 위해 나의 이전 작품을 읽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허례허식을 싫어해 출판기념회를 하지 않았다. 환갑이나 칠순 잔치도 안 했고 아들 결혼식 때도 양가에서 50명씩만 초대했다. 그런데 50주년이라고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내자고 해서 4개월에 걸쳐 아내(김초혜 시인)가 먼저 읽고 지적한 것을 중심으로 수정했다.

어느 정도 수정했는지 궁금하다.

문장 위주로 수정했다. 굳이 수치로 말하자면 전체의 1~2% 정도. 이번에 통독하다 보니 ‘내가 왜 이렇게 썼지?’라는 생각이 드는 데가 있었다. 처음 쓸 때 너무 잔혹하다 싶어 바꾼 대목들이 걸렸다. 예컨대 〈태백산맥〉에 손승호가 당의 지령을 받고 고향에서 잠입 활동을 하다가 지리산 계곡에서 물을 먹다 총에 맞아 즉사하는 장면이 좋은 예다. 원래 피가 물에 번진다는 식으로 끝냈는데 이번에 ‘느리게 맴돌이질하기 시작했다’라고 수정했다. 김범우의 형 범준이 기관총 세례를 받고 죽는 장면도 ‘총탄 수십 발이 그의 몸을 꿰뚫었다’라는 식으로 비장미를 더 강조했다. 〈태백산맥〉을 쓸 당시 신경이 많이 쓰였다. 빨치산이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갔다고 표현하면 군인이나 토벌대가 잔인하게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빨치산 이야기가 나올 때는 잠을 못 잤다. 새벽 네 시면 벌떡 일어났다. 꿈에 기관에 끌려가 엄청난 고문을 당하는 악몽에 시달렸다. 그렇게 신경을 쓰다 보니 위궤양에 걸리고 말았다.

ⓒ시사IN 윤무영조정래 작가는 젊은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했다.

〈황홀한 글감옥〉 얘기를 듣고 싶다. 표지에 ‘이 책은 나의 자전소설과 같다’라고 밝혔는데 이런 성격의 책은 처음 아닌가.

처음이다. 10년 전 등단 40주년을 맞아 대학생 독자들과 직접 대화하는 형식으로 쓴 책이다. 문학론, 창작기법, 성장 배경, 인생론 등 나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주려 했다. 얼마 전 임헌영 민족문제연구소장(문학평론가)과 대담을 했는데 임 선생께서 “조정래 소설을 다 읽어봤는데 〈황홀한 글감옥〉이 소설 못지않게 재미있다. 조정래론을 쓰는 데 결정적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황홀한 글감옥〉에 대한 독자 반응을 살펴봤더니 이 책을 문학론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젊은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큰 변화 중 하나가 ‘자기계발’에서 ‘자기관리’ 시대로 무게중심이 옮겨 간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두드러지는 작가의 엄격한 자기관리가 요즘 청년들에게 새로운 모범이 되는 것 같다. 이 팬데믹 상황을 어떻게 보시는지.

새삼스러운 상황이 아니다. 인류가 살아오면서 저지른 자연 파괴에 대한 인과응보라고 생각한다. 산업혁명 이후 학교에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가르쳤다. 자연을 마음껏 착취하라는 얘기다. 화석연료를 과도하게 사용하고 삼림을 황폐화하고 직선 도로를 뚫고…. 이렇게 150년 넘게 살다 보니 오염물질이 배출되고 극지방의 얼음이 녹고 동식물은 멸종위기에 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 인구가 70억명을 넘어섰다.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인구가 90억명이라는데 20년 뒤쯤에는 어떻게 될까.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량폐기의 악순환이 코로나19를 만들어낸 것이다. 모두 자업자득이다. 코로나 팬데믹은 굉장한 경종이다. 우리 인류가 욕망을 버리고 겸손해져야 한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야 한다.

올해가 6·25 70주년이다. 현대사 3부작을 쓴 작가로서 전쟁 발발 70주년을 어떻게 보내셨는가.

이번 70주년 행사 때 철원 백마고지에서 종전 기원문을 낭독했다. 여기 세심헌에 와서 처음 쓴 원고인데 그걸 쓰면서 정말 비참했다. 우리 민족이 뭐를 잘못해 전쟁을 하고 이토록 오래 분단돼 있는가. 남북만 잘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어서 미국과 중국을 비롯해 다른 블록 등 전 세계를 향해 도와달라는 글을 쓸 수밖에 없었다. 평화통일이 언제 이뤄질지 비감했다. 내가 〈태백산맥〉 〈아리랑〉을 연달아 쓰면서 또 하나 구상한 소설이 있다. 통일문학이다. 통일이 되면 역사가, 인문사회학자에게 통일의 책임을 묻는 일이 시작될 것이다. 내가 아는 바를 기록으로 남겨두지 않으면 엉뚱한 사람들이 비판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0권이 될지, 20권이 될지 모른다. 놀랄 만한 사건이 소개될 것이다. 남과 북을 막론하고 해방공간에 대해 아무도 연구하지 않았다. 잘못 연구하면 죽이니까. 내가 죽은 뒤에 발표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싶을 정도로 매우 위험한 소설이 되리라 생각한다.

해방공간 관련 자료는 어떻게 구했나.

해외에서 많이 구했다. 이승만, 박헌영, 김구, 김원봉, 신채호 등 해방공간 관련 인물 중 역사적으로 가장 무게가 있는 인물이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김원봉이다. 남과 북이 다 버린 사람이다. 그가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모른다. 혁혁하게 싸운 사람이다. 그래서 가장 많은 현상금이 걸렸던 사람이다. 그가 해방 3년을 앞두고 대한광복군을 만든 것을 보고 김구 선생이 남북 합작 가능성을 생각했던 것이다.

〈황홀한 글감옥〉에서 현대사 3부작의 공통점 세 가지로 “역사의 주인이고 원동력인 민중의 발견, 민족의 비원인 통일의 자각, 민족의 현실을 망치고 미래를 어둡게 한 친일파 문제”를 들었다. 이 가운데 민중을 ‘시민’으로 이해해도 무방하다 싶은데 시민사회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입시 위주 교육이 건강한 시민을 길러내지 못하고 있다. 플라톤이 이렇게 말했다. ‘정치에 무관심하면 가장 저질의 인간들에게 지배당한다.’ 기성세대가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이기주의를 키워온 결과 정치의식이 고양되지 못했다. 지금 활발하게 움직이는 시민단체가 40~50개 정도밖에 안 된다. 내가 참여연대 창립 때부터 이사로 참여하고 있는데 현재 참여연대 후원자가 1만5000명밖에 안 된다. 기성세대에 문제가 많지만 젊은이들이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새로운 세대가 덤비지 않으면 안 된다. 인류 역사에 변화를 가져온 것은 언제나 20대 청년들이었다.

ⓒ시사IN 윤무영조정래 작가가 등단한 〈현대문학〉 1970년 6월호(왼쪽)와 〈황홀한 글감옥〉 특별판.

요즘 문학은 역사, 시대, 정치 등 이른바 ‘거대담론’과 거리를 두는 것 같다.

〈태백산맥〉 연재할 때, 소설 쓰는 친구와 광화문 네거리를 걷고 있는데 그 친구가 내 소설을 잘 읽고 있다면서 자기는 충청도 출신이어서 전라도 빨치산 얘기를 못 쓰겠다고 말했다. 작가들의 문제의식이 이런 수준이다. 그럼 내가 살지 않았던 〈아리랑〉은 어떻게 쓸 수 있겠는가. 소설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고 의식의 문제, 치열한 작가정신의 문제다. 〈황홀한 글감옥〉에도 썼듯이 젊은 작가들이 너무 일인칭 소설에 매달리는 것이 안타깝다. ‘나’에게서는 사건이 만들어지기 어렵다. 삼인칭 소설로 총체적 소설을 쓰라고 권유하고 싶다. 내가 10년만 젊었어도 1980년대 민주화가 이뤄지던 격랑의 시대를 소설로 썼을 것이다. 몇몇 후배들에게 ‘80년대 소설’을 장편으로 쓰면 엄청난 반응을 몰고 올 것이라고 귀띔해줬는데 아직 그런 소설이 나오지 않고 있다.

〈황홀한 글감옥〉 후속편에 해당하는 책을 집필 중인 것으로 안다.

이번에 나온 리커버판이 대학생들의 질문에 답하는 형식이라면, 곧 나올 책은 일반 독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것이다. 독도나 중국에 관한 것 외에도 문학적인 것, 시사적인 것 등 주제가 다양하다. 〈황홀한 글감옥〉에 쓴 내용을 반복하면 안 되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이 두 권을 다 읽으면 내 문학론, 작품론, 인생론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황홀한 글감옥〉 후속편은 오는 10월12일 등단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새로 나오는 현대사 3부작과 함께 독자와 만나게 될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거론했지만 이번 리커버판이 젊은 독자들에게는 ‘자기 관리 지침서’ 구실도 할 것 같다.

우리 세대 작가는 보통 50대 후반이면 펜을 놓는다. 그런데 나는 70대 중반이 넘은 지금도 글을 쓴다. 창작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는다. 젊은이들에게 두 개의 롤모델을 말해주고 싶다. 장애인과 운동선수다. 장애인들이 불편한 몸으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가. 운동선수 또한 최선을 다해 정상에 오른다. 손흥민 선수는 양발을 다 쓰는 공격수로 유명한데 왼발, 오른발 슈팅 연습을 매일 천 번씩 한다고 한다. 김연아 선수도 끝없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죽음과 같은 순간을 맞닥뜨려야 한다. 나는 그런 순간을 수백 번 겪어내면서 매일 14시간씩 글을 썼다.

 

〈황홀한 글감옥〉 보러가기 http://sisainbook.com/post_prison/

기자명 이문재 (시인·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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