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pedia‘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물려받은 펠리페 2세.

세계적 패권을 쥔 나라를 두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표현을 쓰지. 제국의 어딘가에는 반드시 해가 떠 있을 만큼 그 영토가 넓디넓다는 뜻이다. 대항해시대 이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실제로 출현하기 시작했어. 특히 19세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표현에 걸맞은 대표적인 나라라고 할 수 있지. 남극 대륙을 제외한 모든 대륙에 식민지를 두었고 유니언잭(영국 국기)이 펄럭이던 땅이 최고 3670만㎢에 달했으니까.

하지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대항해시대를 주도했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먼저라고 봐야 해. 포르투갈이 인도 일부와 동티모르, 신대륙의 브라질을 차지하고 중국 땅이었던 마카오에 똬리를 튼 것이 1557년의 일이었거든. 스페인 역시 비슷했어. 필리핀을 점령하고 1571년 마닐라에 통치기관을 설치했으니까. 필리핀이라는 이름은 스페인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이룩한 왕으로부터 비롯됐단다. 바로 펠리페 2세(1527~1598)야.

펠리페 2세의 아버지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이면서 스페인 국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로 불린 사람이야.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스페인 왕을 겸한 권력자였지.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다스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타이틀은 삼촌 페르디난트에게 넘어갔지만, 아메리카와 아시아, 유럽 곳곳에 영토와 식민지를 거느리고 라이벌이라 할 포르투갈의 왕위까지 계승한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이는 신대륙의 노다지 덕분이었어. 아래 글은 당시 스페인의 위세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스페인은 암소를 길렀고 유럽은 그 우유를 마셨다.’ 이는 독일 계몽주의의 선각자로 통하는 17세기 법학자 겸 철학자인 사무엘 폰 푸펜도르프의 말이다. 여기서 암소란 아메리카 대륙을 칭하며 우유란 은을 말한다. 한 학자의 계산에 따르면 1545년에서 1800년 사이 아메리카의 은 생산량은 13만t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10만t이 유럽으로 왔다(〈월간중앙〉 2019년 11월호 ‘조홍식의 부국굴기’).”

지금도 스페인어에는 ‘어마어마한 대박’이라는 뜻으로 ‘valer un Potosi(포토시만큼 가치 있는)’라는 관용어가 남아 있어. 여기 나오는 포토시는 수백 년 동안 엄청난 은을 캐냈던 은광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희생을 바탕으로(“포토시 은광에서 죽은 인디오 시신을 다리로 놓으면 영국 런던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였지) 은을 캐내야 했지만 스페인 왕에겐 거대한 축복이었지.

펠리페 2세는 폭군이 아니었고 어리석은 사람도 아니었어. 그는 궁에 틀어박혀 수많은 서류를 검토하며 스페인 통치에 관심을 기울이는 성실한 왕이었다. “문서 속에 파묻혀 있을 때에만 편안함을 느꼈다. 그 어떤 비서보다도 글 쓰는 속도가 빨랐고 장부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훤히 알았으며, 많은 양의 문서들을 일일이 검사하느라 눈은 늘 충혈돼 있었다(이강혁 저 〈스페인 역사 다이제스트 100〉).” 그의 별명은 ‘서류왕’ 그리고 ‘신중왕(愼重王)’이었어. 그가 얼마나 성실히 정사(政事)에 임했는지 짐작할 수 있겠지.

그토록 열심히(?) 일했지만 그는 그 치세 중 네 번이나 국가파산을 선언해야 했어. 식민지에서 은이 쏟아져 들어오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답게 부가 집중되었지만 스페인 왕이 자신의 채권자들에게 “돈 없으니 배 째라”라고 몇 번을 나자빠졌지. 궁전 안에 얼마나 거대한 밑 빠진 독이 존재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진 걸까.

이 밑 빠진 독의 이름은 전쟁이었어.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아버지 카를로스는 유럽으로 진출하려는 오스만튀르크와 혈투를 벌이는 한편, 종교개혁 후 가톨릭에 반기를 든 신교도 국가나 제후들과도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거든. 그런데 아들 신중왕 펠리페 2세는 어땠을까. 별명대로 신중히 했더라면 오죽 좋았으랴마는 신앙 문제에 관한 한 펠리페 2세는 부전자전을 넘어 청출어람이었어.

“만약 내 아들이라도 이교도가 되면 화형에 처하기 위해 땔감을 아끼지 않으리라.” 그는 아버지보다 더 열렬한 가톨릭의 수호자로 나섰고, 종교재판소를 확대해 신교도들을 불태워 죽였다. ‘순혈령’을 선포해 조상 중에 무슬림이나 유대인이 끼어 있는 사람들은 사정없이 추방했고 스페인 젊은이들이 외국에서 공부하는 것도 막았으며 외국의 책이 들어오는 것도 금지했어. 스페인에 거주하는 무어인들(이슬람교도)에게 스페인어를 배우고 가톨릭을 받아들이라 강요했고 무어인들이 저항하자 짓밟아버렸다.

국제무역이 활발하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넘쳤던 네덜란드, 그래서 선왕 카를로스가 폭넓은 자치를 허용했던 그곳에서조차 펠리페는 가톨릭을 강요하고 자치권을 박탈하려 들었어. “‘나의 종교만이 참되고, 나의 혈통만이 순수하며, 나의 권리만이 정당하다’는 왕의 편협은 일말의 도전도 용납하지 못했다. 왕은 선을 넘고 있었다(〈조선일보〉 2019년 3월25일 ‘송동훈의 세계문명기행’).”

ⓒWikipedia스페인과 영국이 벌인 칼레해전을 묘사한 그림. 펠리페 2세의 종교 강요로 영국의 대포 기술자를 얻지 못한 스페인은 이 전투에서 패한 후 급격히 쇠퇴했다.

“그에게 변화는 악이었다”

펠리페 2세의 부인은 그 유명한 메리 여왕이야. 그의 배다른 동생인 엘리자베스는 영국 여왕으로 즉위한 뒤 자주 스페인의 비위를 건드렸어. 영국 해적들이 신대륙에서 재화를 실어 나르는 스페인 보물선들을 습격했고 엘리자베스 여왕은 네덜란드 신교도들의 반란을 부채질했지. 급기야 엘리자베스 여왕 보호하에 있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가톨릭 신자)가 반역 혐의로 참수되자 펠리페는 영국과의 전쟁을 선포해.

그런데 당시 해전(海戰)의 추세는 점차 변하고 있었어. 스페인 해군은 상대방 배에 접근하여 사다리나 갈고리를 놓고 배에 뛰어들어 전투를 벌이는 방식을 고수했지만 영국은 값싼 주철 대포 기술을 개발해 대량생산한 대포를 배에 장착하고 활용했다. 펠리페 2세도 정보를 듣고 독일에 건너와 있던 영국 출신의 대포 기술자들을 초청했어. 하지만 그들 중 단 한 명도 스페인으로 가지 않았어. “이유는 악명 높은 종교재판 때문이었다. (···) 스페인 제국은 반드시 가톨릭으로 통일돼야만 했다. 대포 기술자들은 대부분 신교도들이었기 때문에 제정신이라면 건너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이주희, 〈강자의 조건〉).”

이렇게 펠리페 2세의 신념은 그의 신민(臣民)과 왕 자신의 발을 묶는 족쇄가 됐다. 영국을 치기 위해 보낸 무적함대는 거센 풍랑과 영국 해군의 대포 앞에 어이없이 몰락하고 말았다. 펠리페 2세는 “누가 자연과 싸우라고 했는가”라고 통탄했다고 해. 그러나 실상 그의 함대가 악전고투를 거듭하다가 끝내 참패했던 대상은 자연도 아니고 영국 해군도 아닌 펠리페 그 자신의 가톨릭 신념이었지.

누구에게나 신념은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야. 그러나 정권의 책임자가 다른 이들에게 신념을 강요하려 들고, 반하는 주장을 하면 탄압하고, 신념에 어긋나는 정보와 지식을 차단해버린다면 신념은 그 순간 혹이 되고 종양으로 번져 신념의 주인들을 좀먹기 마련이란다. 그래서 “이단의 통치자가 되어 하느님의 가호와 신앙에 손상을 입히느니 차라리 국가와 함께 목숨을 버리겠다”라고 선언했던 펠리페 2세의 신념은 독을 피우며 최절정에 달해 있던 스페인 제국을 내리막길로 인도하게 돼.

“그에게는 아버지를 위한 의무가 있었고, 그의 하느님과 교회에 관한 의무도 있었다. 그는 기존의 질서가 유지돼야 한다고 믿었고 (···) 그에게 변화는 악이었다(〈강자의 조건〉 중).” 신념은 인간을 꼿꼿이 세우는 척추 같은 것이지만, 유연함을 갖추지 못하면 똑바로 서지 못하게 만든단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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