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크림은 문질러 바르면 안 된다. 얼굴이 허옇게 떠서 보기 흉하다. ‘톡톡’ 두드리다 보면 얼굴은 제빛을 찾는다. 선크림의 하얀색을 띠는 이산화티타늄(TiO2) 성분이 얼굴에 다 흡수된 것이다. 이산화티타늄은 자외선을 차단하는 기능을 한다. 이는 나노 크기로 작게 나뉘어 선크림 등 각종 화장품의 재료로 사용된다.

입자가 길고 곧은 다중벽 탄소 나노 튜브(위)는 석면과 마찬가지로 폐질환을 일으킨다.
머리카락 8만 분의 1 크기인 나노 입자는 화장품을 만들기에 유용하다. 입자가 작은 만큼 더 빠르고 깊이 몸속으로 스며들기 때문이다. 샴푸 속의 나노에멀전은 활성 성분을 캡슐에 넣어서 머리 속 깊숙이 운반한다. 프로레티놀A의 나노좀은 피부 표면에 침투해 들어가 주름을 부드럽게 해주고 목의 잔주름을 줄여준다(〈화장품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비밀〉, 예지 펴냄). 식품의약품안전청 정자영 과장은 “최근 기능성 화장품에 나노 크기의 입자가 많이 사용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노 물질의 안전성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미국 환경단체 ‘지구의 벗’은 2006년 5월 보고서에서 “석면 이후 가장 큰 규제 실패는, 나노 물질이 환경과 인체에 유해하다는 구체적인 증거가 늘어나고 있는데도 수많은 기업이 수천t의 나노 물질을 환경 및 수억명 사람의 얼굴과 손에 급속히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선크림에 사용되는 이산화티타늄 나노 입자가 신경세포를 손상하게 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미국 환경보호국(EPA) 산하 국립보건환경영향연구소(NHEERL)는 실험 결과 이산화티타늄 나노 입자에 실험용 생쥐를 1시간 이상 노출하면 활성산소가 과다 분비되면서 주변의 신경세포가 손상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김영훈 교수(광운대 화학공학과)는 “나노 크기의 이산화티타늄은 각질층이 벗겨진 상태에서 피부에 흡수되면 혈액을 타고 뇌까지 갈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나노 안전성’이 나노 기술의 발전 동력

나노 물질은 화장품뿐 아니라 식품·생활용품·전자·항공 등 각종 영역에 활용되고 있어 인체 유해성이 입증될 경우 사회적 공포가 심각할 수 있다. 심지어 영·유아용 ‘나노 젖병’ ‘나노 젖꼭지’도 판매 중인 실정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나노 기술 종합발전계획’에 의거해 2015년까지 나노 기술 선진 3대국에 진입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2004년 이후 발표된 나노 기술 관련 SCI(과학기술 논문 색인)급 논문 수는 매년 세계 5위를 유지한다. 반면 나노 물질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한 연구 부문에 투입되는 예산은 전체 나노 관련 예산 대비 10%에 불과하다. 환경부와 복지부가 ‘나노 기술 독성, 환경평가 기준 담당부처’로 지정되어 있으나 관련 연구는 부족한 상황이다.

나노 물질의 위험성에 주목하는 이유는 ‘위험성’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전자조작식품(GMO)의 경우와 비슷하다. 석면도 처음에는 강도가 세고 사용이 편해서 ‘신이 내린 물질’로 각광받았지만 현재 홍성, 보령 등 석면광산 일대 주민에게 폐암, 진폐증 같은 불치성 질환이 발병하는 등 뒤늦게 재앙이 나타났다.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나노 물질이 생활용품으로 쓰이는 것을 두고 선진국에서는 논란이 한창이다. 오른쪽은 은나노 입자로 항균력을 높였다는 ‘나노 젖병’.
미국에서는 소비자가 삼성 ‘은나노 세탁기’의 안전성이 입증될 때까지 판매를 금지해달라는 청원을 내기도 했다. 삼성 은나노 세탁기는 세탁할 때마다 세탁물에 은나노 입자를 흘려 항균 효과를 내는 원리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몸에 직접 닿는 옷에 은나노 입자가 묻는 것에 미국 소비자는 거부감을 보였다. 은나노 입자의 위해성에 대한 정확한 연구 결과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삼성 은나노 세탁기는 미국 환경보호국으로부터 ‘살충제’와 같은 규제를 받게 됐다. 새 규제가 발효된 뒤 세탁기를 판매하려면 살충제처럼 환경과 사람에게 유해한지 심사받아야 한다. 삼성전자 측은 “환경이나 인체에 해를 입힐 만큼 은나노 입자의 양이 많지 않다. 이 검증 결과를 환경보호국에 제시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라고 말했다.

입자가 긴 나노 섬유는 호흡기를 통해 들어갔을 때 석면처럼 폐에 치명적인 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 2008년 2월 일본에서는 쥐의 복부에 길고 곧은 다중벽 탄소 나노 튜브를 투여하는 실험을 했다. 그 결과 석면을 주입한 쥐와 마찬가지로 중피종 질병과 일치하는 암 질환이 발생했다(이후 영국에서 같은 실험을 실시했다. ‘길고 곧은’ 다중벽 탄소 나노 튜브를 주입한 쥐에서는 중피종 질병의 전조가 나타났지만 ‘짧고 서로 얽힌’ 형태의 다중벽 탄소 나노 튜브에서는 그런 결과가 관찰되지 않았다). 탄소 나노 튜브는 반도체를 비롯해 디스플레이, 전기통신, 전자회로, 전기소자, 제어, 검사장치, 정보저장 장비와 2차 전지 등에 광범위하게 응용된다. 동일한 굵기의 강철에 비해 최대 100배 이상 튼튼하고, 15%의 변형에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탄성이 좋다. 은과 비슷한 수준의 우수한 전기전도율과 다이아몬드 수준의 열전도율도 갖추고 있어 산업계에서 응용 분야는 더 늘어날 전망이다.

나노 물질의 독성 흡입에는 기술개발 분야의 연구자와 제조 노동자가 가장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지식경제부 기술표준원은 작업장에서 지켜야 할 ‘나노 물질 작업 안전지침’을 마련했다. 오경희 공업연구관(기술표준원 소재나노표준과)은 “나노 소재를 다루는 국내 작업장을 상대로 근로자들이 얼마나 노출되나 측정해 점검표를 만들었다. 4월 말이면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각국은 나노 물질 사용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있다. 타이완은 ‘나노인증마크’ 제도를 실시한다. 나노 크기의 고유 속성을 지닌 상품에 대해 품질 시스템 설치, 안전성 문제 추적 가능성 따위를 판단해 인증 마크를 주고 2년간 시장에서 감시한다. 유럽에서는 나노 안전성 연구를 위해 약 7900만 유로(약 1376억원)의 예산을 들인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이정일씨는 “유럽은 나노 안전성 연구가 매우 활발하며, 실제로 나노테크놀로지가 발전하는 데는 나노 안전성이 혁신의 동력이라고 믿는다”라고 말했다.
나노 물질의 유해성에 대한 두려움이 나노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국립환경과학원 최경희씨는 “나노 기술이 아니라 나노 소재의 안전성이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를 혼동하면 자칫 나노 기술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생길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박근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young@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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