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판된 책 찾아주는 일에 돈 대신 책에 얽힌 사연을 수고료로 받겠다는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떠올린 한 사건이 있다. 그때 나는 서울 금호동에 있는 규모가 큰 헌책방에서 직원으로 일했다.
어느 날 오후, 어르신 한 분이 헌책방 지하 매장으로 내려왔다. 나이는 70대 정도로 보였는데 허리가 곧고 차림새가 말끔해서 처음 봤을 때부터 뜻 모를 호감이 일었다. 어르신은 본인이 찾는 책이 있는지 혹시 알아봐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책 제목은 〈사랑과 인식의 출발〉인데 매장 컴퓨터로 검색해보니 이곳엔 없는 책이었다.
그런데 반년 정도 지난 후,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책이 우리 헌책방에 입고됐다. 서지면을 보니 1963년 창원사에서 펴낸 초판, 찾고 있던 책이다! 천만다행으로 어르신이 그날 남긴 연락처 메모지도 아직 갖고 있었다. 갖고 있었다기보다는 받아놓고는 그냥 한쪽에 밀어둔 채 잊고 있었다고 해야겠지만.
〈사랑과 인식의 출발〉은 구라다 하쿠조(倉田百三, 1891~1943)가 사랑에 관해서 쓴 짧은 글을 엮어 펴낸 책이다. 일본 초판은 1921년, 우리나라에서는 1950년대부터 꾸준히 번역됐다. 왜 어르신은 하필 1963년판을 찾았던 것일까? 그 사연은 대강 이렇다.
젊은 시절 일본에서 공부하고 우리나라에 돌아온 어르신은 처음에 번역 문학을 펴내는 출판사에서 일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일이 잘 풀리지 않아 그만두고 은행에 취직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아름다운 여자분을 짝사랑하게 되면서 힘든 일상을 조금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청년은 그 여자분에게 딱 한 번 연애편지를 썼는데 도무지 첫 부분을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가 〈사랑과 인식의 출발〉에 나오는 한 부분을 인용했다. 편지에 담은 마음이 짝사랑 상대에게 전해졌고 이내 두 사람은 애틋한 사이가 되어 얼마간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청년은 학문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 없어 3년 만에 은행에 사표를 내고 유럽 유학길에 올랐다. 공부는 길어졌고 그동안 연인과의 관계도 자연스레 멀어졌다는 것이다. 어르신은 공부를 마치고도 오랫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새로운 인연을 만나 결혼해 지금에 이르렀다.
청년은 이제 은퇴한 노신사가 되어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러다 몇 년 전부터 첫사랑 생각이 자주 떠올랐다. 어르신은 사람을 찾는 대신 연애편지를 쓸 때 도움받았던 1963년판 책을 찾기로 했다. 그것을 우연히 내가 발견해 찾아드린 것이다. 어르신은 그렇게 이 책에 얽힌 사연을 담담한 목소리로 말해주었다.
우편 거절하고 서울까지 온 노신사
그런데 알고 보니 어르신은 댁이 부산이라 내 전화를 받고 부산에서부터 KTX 열차를 타고 서울까지 온 것이다. 책 가격이 2만원이니까 우편요금을 더해 입금해주시면 댁까지 보내드린다고 했는데 책값보다 한참 더 비싼 차비를 들여 이곳까지 온 이유도 궁금했다.
어르신은 환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오랫동안 찾아다닌 짝사랑 같은 책을 찾았는데 어찌 우편으로 받겠소? 내가 직접 모셔가야지.”
책 한 권에 얽힌 이 애틋한 사연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몇 년 후, 헌책방 주인이 된 나는 때때로 손님들에게 찾고 있는 책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슬며시 물어보곤 한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거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사람과 책 사이엔 사연이 깃들어 있기 마련이다.
※ 책방에서 만난 사람’과 ‘책방에서 벌어진 일’ 칼럼이 ‘책 읽는 독앤독’으로 통합됩니다. ‘책 읽는 독앤독’은 ‘독’립언론 〈시사IN〉과 ‘독’립서점이 함께하는 콜라보 프로젝트(book.sisain.co.kr)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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