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정춘숙은 여성운동가다. 1992년부터 한국여성의전화에서 활동했다. 여성의전화는 폭력 피해 여성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시민단체로 1983년에 생겼다. 정춘숙(사진)은 2009년부터 6년 동안 상임대표로 일했다. 2016년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이 됐다. 2020년 총선은 지역구(경기 용인병)로 나가 재선됐다.

정춘숙은 고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28년 동지다. 1992년에 여성의전화에 합류했을 때, 변호사 박원순은 이미 이사였다. “왜 여성단체에 왔는지 물어본 적도 없네요, 그러고 보니까. 그냥 원래 당연히 같이하는 사람이죠. 회의 가면 당연히 와 있고, 법률 대응 준비 자기가 알아서 다 해오고…. 오히려 나중에 참여연대 만든다고 할 때 신기하다고 생각했지.” 변호사 박원순은 ‘그냥 당연히 거기 있는 사람’이었다. 정춘숙은 자신 있게 말한다. “한국 여성운동의 역사에서 박원순은 정말로 첫손에 꼽아요.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에요. 모든 장면에 다 있었어요, 박원순은.”

그런데도, 실종 소식이 전해지던 7월9일, 성희롱 고소가 있었다는 말을 듣는 순간 정춘숙은 직감한다. “아, 이게 무고일 리는 없겠다. 사실이겠구나, 정말로 그랬겠구나.” 믿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짓일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는 긴가민가하는 동료 의원에게도 이렇게 말했다. “그거 알아? 이런 일에는 무고가 없어.” 왜 그렇게 말했을까. “저는 그 생각을 버린 지가 아주 오래됐어요. ‘그 사람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야’라는 생각. 20년 넘게 여성의전화에 있으면서 ‘절대 그럴 리 없는’ 사람이 그러는 걸 너무 많이 봤고, 그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인정할 수 없어서 벌이는 이상한 일들도 너무 많이 봤고….”

이것은 박원순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여성운동사의 영웅으로 박원순을 기꺼이 첫손에 꼽는 동시에, 피해자의 호소가 사실일 것이라고 담담하게 인정하는 한 여성운동가의 이야기다. 정치인이 된 후에도 그가 서울시장이어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말하는 동시에, 몸담고 있는 민주당이 이번 일에 잘못 대처했다고 믿는 한 정치인의 이야기다. 그래서 이 죽음이 남긴 모순에 괴로워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서 결국, 같은 모순 앞에서 혼란스럽고 어떤 말도 하기 어려워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시사IN 조남진7월13일 서울시청 광장에 마련된 박원순 서울시장 분향소에서 시민들이 분향하고 있다.

정춘숙은 단국대 82학번이다. 학생운동을 했고, 졸업 후에는 노동운동을 했다. 여성운동은 한가한 여자들이 하는 주변부 운동이고, “더 중요한 걸 하려면 노동운동을 하는 게 당연한 시대”였다. 대학 시절 활동하던 탈패에서는 오금질(기마 자세로 앉았다 일어났다 반복하는 탈춤의 기본자세) 대결로 남자들을 다 쓰러뜨리고, 뒤풀이 때는 술로 한 번 더 쓰러뜨렸다. 그때는 그렇게 살아야 여자가 운동판에 남을 수 있었다.

“계집애가 공부해서 뭐하니”라는 말이 흔한 집안에서 오기로 공부하며 자랐다. 대학 때나 공장 취업 시절이나 성차별과 성희롱이 많았는데,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는 그런 걸 부르는 이름이 없었다. 노동자로 살고 싶었지만 학생운동 출신이라 “성분이 나빠서” 그럴 수가 없었다. 1992년, 여성이라는 자기 존재로부터 출발하려고 여성노동자회에 가려 했다. 사흘 동안 전화를 안 받아서 유령 단체인 줄 알고 여성의전화로 방향을 틀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워크숍으로 사무실을 비웠던 사흘이었다. 훗날 “너는 우리한테 왔어야지”라던 여성노동자회 선배들의 구박이 좀 억울했다.

여성의전화는 노동운동과 문화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공장에 가면 조직할 대상이 딱 정해져 있다. 여성의전화는 아니었다. 너무 막막해서 선배들에게 물었다. “누구를 조직하면 되나요?”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요.” 이 문답에 충격을 받고 새로운 눈을 떴다. 피해자 옆에 선다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었고, 스스로 피해자였다는 사실도 처음 자각했다. 여성운동이 다루는 여러 층위의 성폭력은 처음에는 사회문제로 거의 인식되지도 않았다. 여성운동은 “이게 대체 피해자는 맞느냐?”라는 힐난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스스로 피해자로 자각하는 일’과 ‘사회로부터 피해자로 인정받는 일’은 여성운동의 중심 서사였다.

성희롱이라는 개념의 역사가 생생한 사례를 보여준다. 강간은 성범죄다. 성적 수치심이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신체 접촉도 서서히 성범죄로 인정받아왔다. 이게 강제추행이다. 하지만 남자 상사가 일을 가르쳐준다며 뒤에서 껴안은 자세로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교육을 한다며 팔과 등을 쓰다듬거나, 눈으로 몸을 위아래로 훑거나, 자신의 사무실에서 옷을 갈아입으라고 권유하거나, 단둘이서만 환영회를 하자고 말하는 등의 ‘슬쩍슬쩍 찔러보기’를 지속하는 경우는 어떨까? 당하는 여성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주지만 강제추행으로 처벌하기는 애매하다. 그러다가 여성이 거부 의사를 명확히 하면 그녀를 업무에서 배제하는 식으로 보복한다. 1990년대까지는 이런 걸 부르는 법률용어가 없었다.

ⓒ연합뉴스7월22일 서울 중구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대리인 김재련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위에서 묘사한 상황은 모두 실제 사례다. 1993년에 터진 서울대 신 교수 사건(피해자를 거명하는 ‘우 조교 사건’으로 오랫동안 잘못 불렸다)에서 신 아무개 교수가 피해자에게 했던 행동이다. 신 교수 사건을 법정으로 끌고 가서 유죄판결을 받아낸 사람이 박원순 변호사다. 그의 법조인 경력에서 빛나는 장면 중 하나다. 변호사 박원순은 이 사건으로 ‘성희롱’ 개념에 법률적 시민권을 받아냈다. 강간도 아니고 강제추행도 아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피해, 하지만 이 피해자를 피해자라고 불러야 할지조차 논란이 많았던 그런 피해가, 이제는 이름을 얻었다. 성범죄 관련 법리에 밝은 한 현직 판사는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혁명이었다. 분명 존재하지만 법이 포착하지 못하던 피해를 이 판결 이후로 잡아낼 수 있게 되었다. ‘그 정도는 사회생활의 일부 아니냐’던 통념도 결정적으로 설 곳을 잃었다.”

박원순 변호사는 해외의 판결과 입법례를 뒤져가며 한국 법원이 낯설어하던 법리를 끊임없이 쏟아냈다. 박 변호사는 신 교수 사건에서 1심을 이기고, 2심을 지고, 대법원에서 다시 결과를 뒤집는다. 각 판결마다 이 새로운 법리를 어찌 다룰까 고민하는 재판부의 당혹스러움이 묻어난다. 2심은 “성적 괴롭힘 행위는 종전에 우리의 불법행위법에서는 인정되지 아니하였던 것”이라며 “구체적 기준이 되는 요소를 객관화·명확화할 필요가 있다”라고 쓴다. 그 판단 기준으로 “남녀 간의 관계를 투쟁적·대립적 관계로 평가하는 여성주의적 관점만을 표준으로 삼을 수는 없다”라는 문장도 등장한다. 이런 문제 제기에 어지간히도 당혹스러워하던 시대다. 여성운동가 정춘숙이 기억하는 변호사 박원순은 이런 난감한 시대를 함께 뚫고 나간 동지다.

‘그럴 리 없는 사람은 없다’는 규칙

7월9일, 그 동지가 실종됐다는 뉴스가 떴다. 이상했다. 정춘숙이 아는 박원순은 “정확한 사람”이다. 연락이 닿지 않거나 일정을 꼬는 일은 없다. 곧이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인연이 깊은 동지들은 전화도 하지 못하고 문자로만 대화했다. ‘미투래.’

ⓒ시사IN 신선영

무고라는 생각은 안 했다. 그럴 리 없는 사람은 없다. 정춘숙이 생애를 바친 여성의전화에서 여러 번 깨달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놀라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뭐라고 말해도 부족한데… 정말 그럴 줄은 몰랐다, 그런 기분이었죠.” 박원순의 삶과 너무 다른 결말이었으므로,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놀랐다. 그중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 그럴 리 없다’로 생각이 흘러갔다. 정춘숙의 생각은 ‘그 사람이 그럴 줄은 몰랐다’로 흘러갔다. 이 차이는 이후 며칠간 민주당의 대응을 가르는 결정적 문제였다.

밤늦게 시신이 발견됐다. 정춘숙은 7월10일에 곧바로 조문을 갔다. 조기도 보내고 페이스북에 추모의 글도 올렸다. “뭐라고 말할 수가 없다”라고 썼다. 양쪽에서 욕을 먹었다. 하지만 정확한 심경이었다. 마음의 분열이 하도 심해서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때 마음을 어떻게 글로 설명하겠어요. 왜 그렇게 살았냐 욕할 수도 없고, 훌륭한 인생 살았다고 할 수도 없고, 28년 동지 조문을 안 갈 수도 없고, 그런 짓을 한 걸 이해할 수도 없고, 죽음을 택한 것도 이해할 수가 없고, 내가 아는 박원순이라면 자기가 한 일을 다 밝히고 인정하고 벌받는 게 맞다 싶고…. 조문하고 나왔는데 정의당 류호정 의원이 페이스북에 피해자를 위해 조문은 가지 않겠다고 글을 올렸죠. 저는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제가 조문을 간 게 틀렸다고 생각하지도 않죠.”

내적 분열의 시간이 오래갔다.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이 양 갈래로 뻗어나갔다. 발인 날인 7월13일에 피해자 측 기자회견이 잡혔다. 꼭 오늘 해야 하느냐고 여성의전화(피해자 측을 대리하고 있다)에 물어봤다. 기자회견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계산,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계산 하지 말라는 법이 있나라고도 생각한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조문하고 나오는 길에 성추행 의혹에 대한 기자 질문을 받고 “나쁜 자식!”이라고 화를 내는 일이 있었다. 정춘숙은 꼭 그 자리에서 그걸 물었어야 했나 싶다가도, 아니 기자가 그 자리 아니면 또 어디서 묻나 싶었다. 그 며칠은 모든 게 이런 식이었다.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데, 분명히 그런 모순과 혼란에 짓눌린 사람이 대다수일 텐데, 아무 모순도 없다는 듯 확신에 차서 말하는 목소리만 양쪽 다 너무 컸다. 이 시기에 정춘숙은 이 문제를 말해야 할 때마다 눈물이 터져서 고생을 했다. 그가 기자와 만난 날은 사건 이후 2주가 흐른 7월24일이다. 이날도 어김없이 눈물이 터졌다. 이제 다 울어서 눈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눈물이 남아 있다며 신기해했다.

ⓒ연합뉴스1998년 2월23일 기독교연합회관에서 열린 서울대 조교 성희롱 사건 공동대책위원회 주최 ‘성희롱 사건 승소 축하연’. 왼쪽부터 참여연대 사무처장 박원순 변호사, 심영희 한양대 교수, 이은영 한국외대 교수, 최은순 변호사.

곧이어 용어가 논란이 됐다. 민주당 일각에서 피해자를 ‘피해호소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인과 정치적 인연이 깊은 의원들이 주도했다. 7월14일에는 ‘민주당 여성의원 일동’ 명의로 입장문이 나왔다. 피해자 보호를 강조하는 내용이었으나, 여기서도 ‘피해호소인’이라는 표현을 썼다. 두들겨 맞았다. 정춘숙은 피해자라고 썼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터뷰 내내 고소인을 ‘피해자’로 불렀고, 박원순 전 시장은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라고 불렀다. ‘피해자’는 형사소송법에 있는 용어다.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에서도 쓰는 말이라 무죄추정 원칙 위반이라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가해자’는 좀 다르다. 이건 죄가 확정되었다는 의미라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이 더 중립적이다.

용어의 문제는 이런 법률적 쟁점을 넘어선다. 여성운동은 피해자 여성이 ‘피해자’라는 지위를 획득하는 긴 싸움이기도 했다. 거의 모든 사건에서 피해자가 들었던 말이 “꽃뱀 아니냐”였다고 그는 회고한다. “제가 한동안 텔레비전을 못 봤어요, 피해자를 향한 2차 가해가 너무 자주 보여서. 사람이 죽었으니까, 지켜보는 사람들은 뭔가 사람이 죽을 만한 엄청난 일이 있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강간이나, 정말 못살겠다 싶을 만큼 세고 지속적인 성적 괴롭힘 같은 거요. 이러다 나중에 사건 진상이 나오고 나면 사람들은 또 그럴 거거든요. ‘어머나 이게 사람이 죽을 일이야?’ ‘이 정도 일로 피해자라고 호소한 거야?’ 그렇기 때문에 피해자를 피해자로 정확히 불러주는 게 중요해요.” 생전의 박원순은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누구보다 빨리 알아들었을 것이다. 그는 정춘숙이 말한 이 원칙이 정립되는 역사를 만든 사람이다.

이즈음부터 정춘숙은 마음의 분열에서 조금씩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계기는 의외의 장면에서 왔다. 그는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면서 첨예한 양쪽 의견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추모하는 글이 훨씬 잘 읽히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글이 눈에 잘 안 들어왔다. “그게 왜 신기한가요?” “반대여야 되거든요. 제가 평생 해온 일이 피해자 편에 서고 피해자 목소리를 듣고 피해자와 연대하는 건데, 그런 글이 훨씬 잘 읽혀야 정상인데, 박원순에 대한 글이 더 잘 읽히더라고요. 그걸 스스로 인식하는 순간 깨달았죠. 아, 나는 아직도 박원순이라는 사람을 눈에다 렌즈처럼 쓰고 보는구나.”

그는 자신이 ‘그럴 리 없는 사람은 없다 규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박원순이라는 사람을 빼고 읽으니 그때야 글이 제대로 읽혔다. 이 경험을 그는 “내가 주제파악을 했다”라고 표현한다. 평생 피해자 옆에 서는 훈련을 해온 자신도 이런 상황에서 흔들리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 “뭐라고 말할 수가 없는 시간”은 그렇게 더 길어졌다.

정치 지도자들이 피해자를 챙기는 모습이 더 나와야 한다고 여긴다. 그는 앞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모친상에 유력 인사들이 구름처럼 몰린 장면도 입맛이 썼다. 그는 이 장례식장에 가지 않았다. 그리고 박원순 조문은 또 가는 스스로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그렇게 “주제파악을 하는 시간”, 사람들의 마음이 저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생각하는 시간을 거치면서 조금씩 정리를 해나갔다. 그러고 나서 도달한 얘기를 동료 의원들에게 꺼냈다. 7월15일, 몸담고 있는 의원 연구모임 ‘더좋은미래’ 정례모임에서 말했다. “박원순을 빼고 봐야 보인다.” 며칠의 번민 끝에 도달한 답이었고, 바닥까지 내려간 후에 남은 한 문장이었다. 정춘숙은 이날로 무언가 마음의 매듭을 지었다고 느꼈다.

당내의 반향은 크지 않았다. 민주당은 용어 문제를 비롯해 사후 처리에서 젊은 세대와 여성들의 실망을 연이어 샀다. “세상의 흐름이나 속도에 비하면 여기는 정말 늦어요. 세상의 흐름을 받아들이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까지만 오고 멈추거든요. 그래도 되거든요. 그러면 설명을 해도 한계가 있죠. 계속 뭔가에 부딪히죠.” 그게 단적으로 드러난 장면이 ‘피해호소인’이었다.

ⓒ시사IN 신선영

이번 경험으로 새로 알게 된 건 아니다. 초선 의원 시절부터 그는 성평등 교육 강사로 나서서 의원들을 교육했다. 어느 날 유명한 강사가 왔다고 해서 들어봤는데, 강의를 너무 못했다. 일반인이 국회의원 100명을 앉혀놓고 주눅 들지 않기는 어렵다. “의원님께서는”이라며 극존칭을 쓰는데, 혼도 내고 겁도 줘야 하는 성평등 강의가 잘 될 리 없었다. 안 되겠다 싶어서 직접 강사로 나섰다. 여기서는 “술 먹을 때 러브샷 하면 안 된다”만 해도 아주 급진적인 얘기로 통한다. “잔은 혼자 드세요” 하면 충격받는 의원도 있다. “여자를 꽃이라고 부르면 왜 안 되나요?”라는 질문도 받아봤다. 그의 강의 수준을 전해들은 지인이 “뭐야?”라고 힐난했다. 정춘숙은 변명하듯 답했다. “수용성을 높였어.”

설명을 해도 한계에 부딪힌다 싶을 때는 전략을 바꾼다. 이제는 협박을 한다. “이러다 잘못하면 한 방에 훅 갑니다”가 입에 붙었다. 유력 정치가의 성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전화에 불이 난다. 남자 의원들이 메시지를 어떻게 할까 묻는 전화다. 그는 조언한다. 아, 그냥 입 닫고 있어. 기자는 그에게 ‘닥침력(하고 싶은 말을 참는 힘)’이라는 인터넷 은어를 알려줬다. 그는 다시 반성으로 돌아간다. “저도 조문 다녀와서는 ‘닥침력’을 발휘해야 했는데 잘못했죠. 글을 쓰지 않았다면 피해자가 상처를 덜 받지 않았을까.”

20대와 30대는 그의 복잡한 심경을 거의 공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정춘숙이 “박원순을 빼고 보면 보인다”라는 결론에 힘겹게 도달하는 동안, 젊은 세대는 이미 처음부터 박원순을 빼고 보고 있다. 젊은 세대의 냉소가 서운하지는 않을까. 거침없던 정춘숙은 이 대목에서 단어를 신중히 골라가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라는 게 역사가 있잖아요. 젊을 때는 역사 따위 쳐다보지 않는 게 패기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게 아니죠. 나이 들면서 저는 ‘다 이유가 있겠지’ 이 태도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해가 잘 안 가도 조금만 기다려주면 좋겠는데, 오래된 사람들의 얽힌 역사라는 게 있으니까 그걸 정리하는 시간이 필요하죠. 서로 차이가 있다는 걸 이해하는 게 중요해요.”

그러고는 한동안 말을 멈추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그러네요. 젊은 세대는 처음부터 박원순을 빼고 보니까 그랬다는 걸 지금 이해하게 됐어요. 오히려 우리가 더 들어야 할 수 있겠네요.” 그날 이후 이게 몇 번째 반성일지 세기도 어렵겠다 싶었다. 박원순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은 그에게 치열한 반성을 거의 습관으로 남긴 것 같다.

“이 죽음을 어떻게 마무리를 하겠어요”  

인터뷰를 마칠 때가 되었다. 의례적인 덕담을 건넸다. “이 죽음이 던진 모순에 짓눌려 있는 분들은, 나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다른 사람의 목소리로 들으면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탈상(脫喪:상을 끝내고 일상으로 돌아감)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여기서 쉽게 빠져나갈 생각은 하지 말라는 것처럼,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죽음을 어떻게 마무리를 하겠어요. 도저히 탈상이 안 되죠. 박원순이라는 사람이 엄청 크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치열하게 생각해야 해요. 박원순이 그럴 리 없어라는 생각을 벗어나면 바로 물어보게 되죠. 박원순조차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박원순조차 그랬다면 어떻게 이걸 뛰어넘을 수 있을까? 우리 모두가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피해자의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가 손을 잡고 피해자를 향한 공격을 멈췄으면 좋겠어요. 정치 지도자들도 거기서부터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그는 우선 여성의전화 동지들에게 연락을 해볼 생각이다. 사건이 한창이던 시절에는 거의 연락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들이 가장 힘든 처지에 있으니 손을 내밀 때라고 생각한다.

정춘숙처럼 모순에 눌린 이들에게, 이 죽음은 유난히 괴로운 죽음이다. 탈상을 해야 일상이 돌아오는데, 그게 좀처럼 안 된다. 남긴 숙제가 너무 크고 많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으면 이 죽음이 던진 모순은 언제까지고 사람들을 붙잡고 흔들지 모른다. 그래서 이것은 박원순의 이야기가 아니다. 혼란과 모순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견디는 사람들이 박원순을 떠나보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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