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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의 화제 드라마 〈지금도 마로니에는〉을 뒤늦게 봤다. 1940년대 초반 출생 시인 김지하, 재야 사학자 김중태 같은 굵직한 인물들이 푸릇한 대학생으로 나온다. 두 사람이 5·16 쿠데타로 굳게 닫혀버린 서울대 문리대 교문을 하염없이 응시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급속한 경제발전과 야만적 군사독재가 함께 진행될 그 이후 20여 년의 세월을 압축한 듯한 명장면이다. 그들은 1964년 한·일 국교정상화 반대운동(6·3 운동)과 긴급조치 등을 경과하며 투옥, 고문, 나아가 사형선고까지 모진 수난을 겪게 된다. 젊은 그들이 당대의 대의(민주주의와 민족주의)에 헌신하는 모습은 한없이 아름답다. 곧이어 깊은 슬픔을 느끼게 된다. 70대의 노년이 된 그들에 대한 세상의 관심이 감사와 애틋함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변절자’로 욕하기도 한다.

6·3 세대의 대표 주자로 불리는 그분들을 비판하려고 쓰는 글이 아니다. 사실 586은 6·3을 ‘변절’로 몰아칠 자격이 없다. 1980년대 당시의 급진성을 감안하면, 시장경제에 완전히 적응해버린 586 역시 변절자다. 공감을 느끼는 다른 이유는 ‘자기 시대에 대한 무지’다. 6·3은 한·일 국교정상화나 경제개발 계획, 재벌 대기업의 성립 등 역사적 사건들의 성격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 586 역시 남북한의 발전 경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글로벌 차원의 세력 관계 등을 과학적으로 인식할 수 없었다.

6·3이 586에게 당혹감을 느꼈다면, 586 역시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놀란다. 일단 어느 정도의 틀을 갖추게 된 사고체계는 오래 지속되지만, 세상은(특히 한국은) 맹렬하게 변화한다. 새로운 산업이 과거의 산업을 밀어내고, 낯선 계급·계층이 나타나더니 다수가 되어버린다. 이런 물질적 변화에 따라 사람들 간의 관계(동료, 상하급자, 고부, 남녀 등) 또한 급속히 바뀐다.

개인에겐 매우 잔인한 변화일 수 있다. 세계를 해석하는 도구로 삼아온 사고체계가 무너지고, 과거의 윤리는 현재의 ‘비윤리’로 변한다. 그 새로운 흐름은 옳거나 틀릴 것이다. 오래가거나 잠시 유행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과거의 사고체계로는 새로운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다. 과거를 붙잡고 늘어지다 보면 원념만 쌓다가 결국 세상을 원망하게 된다.

한때의 아름다운 청년들이 욕먹는 장년과 노년으로 전락하는 것은 어쩌면 매우 당연한 일이다. 생각은 오래 지속되지만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니까. 가냘픈 개인이 새로운 것 앞에서 취해야 할 태도는 일단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하며, 지금 새로운 것 역시 언젠가는 낡은 것이 될 터. 괴테가 썼듯이,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푸르른 생명의 나무다”.

기자명 이종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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