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공동취재단7월22일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폭력 사건 2차 기자회견’에서 피해자 변호인인 김재련 변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2018년 3월8일 서울시는 세계여성의날을 맞아 ‘성희롱·성폭력 없는 성평등 도시 서울’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서지현 검사의 검찰 내 성추행 폭로 이후 성폭력을 근절해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높아진 때였다. 발표 당시 서울시는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줌으로써 좀 더 쉽게 신고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겠다”라고 선언했다. 이 내용은 석 달 뒤 박원순 시장의 선거공약에도 포함됐다.

당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성희롱·성폭력 피해자가 ‘쉽고 빠르고 안전하게 구제받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게 서울시의 목표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실현되지 않았다. 지난 7월8일 박원순 시장의 비서로 근무했던 여성이 박 시장을 성추행 혐의로 경찰에 고소했다. 피고소인이었던 박 시장은 7월10일 새벽 사망한 채 발견됐다. ‘쉽고 빠르고 안전하게’ 구제하겠다던 시스템은 왜 4년 동안 피해자의 호소에 응답하지 않았을까.

우선 서울시의 ‘외부 정책(민간)’과 ‘내부 정책(지자체 및 공공기관)’을 분리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대표를 맡고 있는 최미진 노무사는 박원순 시장 재임 기간 서울시의 여성정책을 이렇게 평가한다.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정책은 다른 지자체에 비해 뛰어났다. 하지만 정작 서울시청 여성 직원과 관련된 성희롱·성폭력 해결 지침을 살펴보면 다른 조직과 별로 차이가 없다.”

다양한 조직에서 발생하는 성희롱·성폭력 피해도 다수 상담한 최 노무사가 보기에, 서울시의 내부 지침은 다른 단체·기관의 수준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울시의 여성정책은 주로 외부 조직에 대응하거나 민간을 지원하는 방식에 초점을 맞추었다.

2018년 12월3일 서울시가 추진한 ‘서울 #WithU’ 프로젝트가 대표 사례다. 서울시가 한국프랜차이즈산업협회, 전국가맹점주협의회 등과 협약을 맺고 ‘성희롱 없는 안심일터’를 만들기 위해 지원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당시 서울시는 소규모 작업장이나 조직화되지 않은 단체·단위에 주목했다. 성희롱·성폭력 피해자 구제 정책이 효과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사각지대가 존재하는데, 이곳에서 피해를 호소하는 이들을 지원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들겠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그러나 막상 서울시청은 자기 조직을 ‘사각지대’에 포함시키지 못했다.

내부 처리 지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서울시는 성희롱·성폭력 사건 발생 시 기준이 되는 ‘예방지침’ ‘사건처리 매뉴얼’ ‘재발방지 종합대책’을 단계별로 마련해두었다. 그러나 이런 단계별 지침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피해 구제 과정에서 상급기관(서울시 본청)과 하급기관(산하 공공·위탁기관이나 시설)이 나뉘어 있다는 점이다.

상급기관인 서울시는 하급기관의 성희롱·성폭력 문제를 지도하고 감독하기 위해 각종 장치를 마련했다. 하급기관에 소속된 직원이 피해를 호소하면 해당 기관에서 처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필요할 경우 상급기관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방식이다. 하급기관의 피해자가 상급기관에서 처리하기를 원하거나 가해자가 임원급 이상인 경우, 또는 피해자의 조직(하급기관)이 사건처리 능력을 갖추지 못한 경우 상급기관으로 사건을 넘길 수 있다. 상급기관의 조사 담당 역시 독립성을 보장받는 ‘시민인권보호관’으로 지정했다.

ⓒ연합뉴스2018년 12월3일 서울 중구 시민청에서 성희롱 근절을 위한 ‘서울 위드유(#WithU) 공동 프로젝트’ 출범식이 열렸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홍보용 손팻말을 들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 본청 직원이 피해자일 경우는 다르다. 더 이상 상급기관이 없어 피해를 호소할 만한 외부 단체가 마땅찮다. 조직 내(서울시청 내) 성희롱고충상담원이나 시민인권보호관에게 기댈 수는 있다. 그러나 이번 사건처럼 상급기관의 최고 기관장으로부터 피해를 입는다면, 조직 내 구제 기구의 공정성과 독립성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더욱이 박원순 시장에게 고소 사실을 가장 먼저 알린 인물이 임순영 서울시 젠더특보라고 알려지면서, 이러한 불신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매뉴얼은 매뉴얼일 뿐이다

국내 여러 기관의 인권보호제도 설계에 관여해온 홍성수 숙명여대 교수는 “기관장이 인권침해에 연루됐을 때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는 보통 따로 고려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도 마찬가지다. ‘서울시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에 등장하는 주체는 기관장, 관리자, 행위자, 피해자로 각각 뚜렷이 나뉘어 있다. 여기서 기관장은 해당 기관에 소속된 사람들이 성희롱을 하지 못하도록 관리 감독하는 주체로서만 언급될 뿐이다. 즉 기관장이면서 동시에 ‘행위자’인 경우는 미처 예측하지 못한 것이다.

조직 내 최고 권력자가 가해자(서울시 매뉴얼 상 행위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여성가족부는 2018년 6월 ‘공공기관의 장 등에 의한 성희롱·성폭력 사건처리 매뉴얼’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매뉴얼마저 주요 대상은 하급기관 기관장이다. 피해자가 사건을 상급기관으로 넘기고 해당(하급기관) 기관장의 외압 없이 공정한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데 그친다.

당시 이 매뉴얼을 만드는 데 참여한 최미진 노무사는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는 가능성을 간과한 측면이 있다. 제도적 공백이다. 상급기관이 없는 선출직 공무원인 경우 스스로 물러나거나, 형사소송으로 처분을 받거나 주민소환 제도를 통하는 방법 말고는 없다”라고 말했다. 제어받지 않는 권력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아진다. 안희정 충남도지사, 오거돈 부산시장 역시 ‘더 이상 상급기관이 없는 조직 내 최고 권력’이었다.

상급기관의 최고 권력자를 견제하고 제어할 수 있는 독립적인 기구나 조직을 만든다면 문제가 해결될까? 여성학자 권수현씨는 “매뉴얼은 매뉴얼일 뿐이다. 매뉴얼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라고 말한다. 그는 무엇보다 피해자가 피해를 호소할 1차 창구의 접근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번에도 피해자가 가만히 있었던 게 아니다. 여러 사람에게 말했지만 침묵만 되돌아오니까 피해자 입장에서는 구제될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밝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지점 중 하나는 ‘피해자의 호소를 왜 조직 차원에서 해결하지 못했는가’이다. 이미 존재하는 피해 구제 시스템이 실제로 작동했는지, 피해자가 의지하고 상담받을 수 있는 조직 내 기구가 제대로 작동됐는지 등이 주된 점검 사항이다. 홍성수 교수는 “문제는 점점 커진다. 처음에 행위자는 ‘괜찮네?’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피해자는 괜찮은 게 아니다. 곧바로 ‘이러시면 안 된다’고 딱 잘라 선을 긋거나 신고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이때 상담이나 신고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창구가 곳곳에 깔려 있지 않거나 깔려 있더라도 제 기능을 못한다면 피해자는 혼자 혼란스럽고 두려운 채로 더욱 저항을 못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신고할 시기를 놓치면 피해자가 신고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여태까지 신고를 하지 않고 참았던 게 자신의 잘못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가해자 역시 ‘그때는 아무 말 없더니 이제 와서 싫다고 하느냐’며 반발할 가능성도 커진다. 이번 사건에서 2차 가해자들이 “4년 동안 뭘 하다 이제 와서…”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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