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2019년 6월1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서 열린 ‘서울 퀴어퍼레이드’를 한 시민이 막아서고 있다.

군대에 있을 때 일이다. 다들 작업하러 나간 사이 병장인 나와 신병인 이등병만 남았다. 우리는 어쩌다가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등병:저는 그래도 동성애는 좀….
나:그래? 그럼 우리 부대에 동성애자가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이등병:아, 그게….
나:네 생각이 어떻건 내가 뭐라고 안 할게. 그런데 우리는 함께 고생하며 군 생활하는 동료잖아. 만약 그런 동료가 있다면 어떻게든 함께 잘 지내야 하지 않을까?
이등병:네, 그렇습니다!

그 이후에도 몇 차례 이야기를 나눴지만 말년 병장의 권위로도 이등병의 ‘신념’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었다. 무엇을 물어봐도 큰 목소리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답하는, 군기가 바짝 든 신병이었지만 동성애에 대해서만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는 최소한 ‘차별하면 안 된다’는 데에는 합의했다. 종교가 어떻고 신앙이 어떻건, 군대에서 우리 동료가 성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을 받지 않고 군 생활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의견이 같았다. 동성애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았던 그도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는 마음을 열었다.

그 후에도 나는 강의를 하면서 종종 비슷한 상황을 마주했다. 짧은 시간에 평생 간직해온 생각을 바꾸기란 쉽지 않다. 어차피 ‘생각 바꾸기’는 당장의 목표가 아니다. 다만 ‘회사에서 일하고 학교에서 공부하며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만은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이 문장에 대한 동의를 이끌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차별금지법이 규율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차별금지법은 종교의 자유와 충돌하거나 신념을 바꿀 것을 강제한다’라는 오해는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세계 각국에서 제정된 차별금지법을 보면, 적용 범위를 엄격하게 한정해놓고 있다. 한국의 차별금지법안도 고용, 재화와 용역의 이용·공급, 교육, 행정서비스 등 네 가지 영역에만 적용된다. 교육과 노동, 거래를 하지 않고 온전한 삶을 영위하기란 불가능하며 이는 매우 기본적인 조건이다. 차별금지법은 최소한 네 가지 영역에서만은 차별받지 않도록 보장하고자 한다.

한국 사회에서는 차별금지법이 아니더라도 차별금지의 이념이 어느 정도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예컨대 연세대나 이화여대, 동국대 등은 종교단체에서 설립했지만, 특정 종교를 가진 학생의 입학을 불허하지 않는다. 가톨릭 의료기관인 성모병원에서 환자를 받을 때 종교나 성적 지향을 묻지 않는다. 학교나 병원의 설립 취지는 종교적이지만 세속에서 해당 종교의 이념을 ‘구현’하는 것이지 수혜자들의 신앙을 따지진 않는 것이다. ‘주일은 쉽니다’라고 써 붙인 음식점에서도 종교에 따라 손님을 가려 받지는 않고, 난민 반대 시위에 나간 카페 주인도 자기의 가게에 ‘난민 출입 금지’라고 써 붙이지는 않는다.

여성 또는 이주자의 자녀, 특정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회사나 학교에서 불이익을 당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념이나 생각에는 편견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를 회사나 학교에서 ‘실천’에 옮기면 안 된다고 여긴다. 누군가가 항의하거나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서가 아니다.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건 간에 교육받고 고용하며 물건을 사고팔 때만은 성별·종교·장애·나이·출신 지역·성적 지향에 따라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이것이 우리의 상식으로 자리 잡혔기 때문이다.

차별금지법은 상상할 수 없었던 획기적인 발상으로 세상을 갈아엎자는 게 아니다. 우리가 이미 갖고 있는 상식을 법제화하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곳곳에 남아 있는 차별적 현실을 바꾸고자 하는 일이다.

6월30일 국가인권위원회가 제21대 국회에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마련한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시안) 일부.

해외의 사례를 가져와서 엉뚱한 얘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동성애자의 결혼 축하 케이크 판매를 거절한 제과점 사례다. 2012년 미국 콜로라도주에서 한 동성 커플이 결혼 축하 파티용으로 웨딩 케이크를 주문했지만, 복음주의 기독교 신자인 제과점 주인은 주문을 받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동성애를 반대하는 종교적 신념에 따른 행위이므로 제과점 주인의 선택이 보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차별금지법이 이러한 주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사건과 관련해서 여러 낭설이 있지만, 케이크 판매 거부가 ‘차별금지법에 의해 금지되는 행위’인 것만은 사실이다. 시민을 대상으로 케이크를 팔기로 했다면 성별·종교·연령·장애·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손님을 가려 받지는 말아야 한다. 이것은 모든 시민이 삶의 영역에서 차별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공존의 조건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차별금지법은 제과점 주인에게 동성애에 대한 생각을 바꾸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도 제과점 주인의 ‘자유’가 우선한다는 사람이 있다면 이렇게 되묻고 싶다. 불교도가 설립한 회사에 불교도 사원만 뽑고 다른 종교로 개종한 사원은 해고한다면? 음식점에서 ‘첫 손님이 여자라면 장사가 안 된다’는 이유로 여성 손님을 돌려보낸다면? 택시회사가 가톨릭 신자인 손님만 골라 태운다면? 집을 세놓을 때 ‘외국인 노동자에게는 세를 주지 않는다’고 광고한다면? 대학에서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추기 어렵다며 장애인 학생의 입학을 거절한다면?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도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자유의 가치는 소중하지만 ‘차별해도 되는 자유’가 만드는 세상은 끔찍하다.

특정한 음식점에 들어갈 수 없거나, 어떤 회사에 취업할 수 없는 건 진짜 문제가 아니다. 케이크는 다른 제과점에 가서 구입해도 되고, 취업할 데가 그곳만 있는 건 아니지 않겠는가. 그런데 차별이 허용되고 일상화되면 심각한 문제가 초래된다. 만약 ‘케이크 가게 주인의 자유’가 허용된다면 동성애자는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동성애자에게도 허용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나아가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면 동성애자들은 ‘언제 어디서든 환영받지 못할 수 있음’을 의식하고 살아야 한다. 사회 전체에도 부정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동성애 문제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일반 시민에게 ‘개인의 선택에 따라 동성애자를 거부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알려주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억울하면 다른 회사에 지원하라’거나 ‘다른 제과점에 가서 케이크를 사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른바 ‘노키즈존’에 드는 거부감은 해당 공간에 들어갈 수 없어서가 아니다. 아이를 환영하지 않는 분위기가 확산되면 어디를 가더라도 아이가 마음 편히 놀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아이를 데리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환영받지 못할 수 있다는 두려움에 직면하게 해서는 안 된다. 동성 커플이라는 이유로 케이크 판매를 거절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미국 정치철학자 제러미 월드론은 혐오와 차별의 문제를 인간의 존엄성 차원에서 다룬다. 그 어떤 정체성을 지향하더라도 편견, 차별, 배제, 적대를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지위가 보장될 때 존엄한 존재로서 존중받는 것이며 사회 구성원으로 온전한 ‘자격’을 가진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는 그런 지위와 자격에 대한 모든 이들의 확신을 보장해야 한다.

차별금지법은 바로 그러한 공존의 조건을 만드는 법이다. ‘내부’의 감정이나 신념은 어쩔 수 없더라도 사회에서 서로 교류하며 살아갈 때 표출되는 차별 행위만은 제한되어야 모든 사람들이 안심하며 살아갈 수 있다.

ⓒReuter동성 커플에게 웨딩케이크 판매를 거부한 잭 필립스. 이 사건은 수년간 법정 공방이 이어졌다.

차별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

물론 차별을 낳는 내심의 편견까지 사라지게 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다.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을 엄격히 규제하더라도 차별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 한, 차별이나 증오범죄로 번질 불씨가 살아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과 미국의 경우, 겉으로 드러나는 노골적인 차별에 대한 규제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내심의 편견까지 말끔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최근 사회경제적 위기가 도래하고 코로나19라는 감염병이 유행하면서 혐오 표현과 차별이 다시 스멀스멀 되살아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편견까지 사라져야 진짜 차별 없는 세상이 올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어차피 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차별금지법 역시 개인의 마음속을 규제하는 법이 아니다.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고 해서 각자의 신념을 강제로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무슨 신념을 가지고 있건, 노동자를 고용해서 회사를 운영하기로 했으면 차별 행위를 하면 안 되고,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을 하기로 했으면 학생을 차별하진 말아야 한다는 것뿐이다. 실제로 차별금지법은 혐오와 차별에 관한 모든 문제를 일소하겠다는 거대한 포부를 가진 법이 아니다. 어차피 단시간에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차별을 규제함으로써 차별하지 않는 최소한의 ‘조건’ 또는 ‘환경’을 만들겠다는 취지의 법이다. 일상에서 내가 가진 정체성 때문에 차별을 받아야 하다면, 또는 차별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늘 자기검열을 해야 하는 사회라면 그것은 공존하는 사회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이러한 공존을 위한 조건을 마련하는 법일 뿐이다. 거꾸로 차별금지법에 반대한다면, 누군가는 차별받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며 살아가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래도 여전히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면 종교의 자유니, 양심의 자유니 하는 거창한 얘기보다 차라리 ‘회사와 학교에서 성별이나 인종을 이유로 해고할 자유를 달라’고 하거나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성적 지향을 이유로, 출신 국가를 이유로 손님을 거부할 자유를 달라’고 주장하시라. 하지만 대한민국 절대다수의 시민들은 이런 자유가 허용되는 세상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공동체’ 대한민국이 지향하는 사회란 누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곳 아닐까? 그 누구도 ‘차별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떨지 않아도 되는 그런 공동체 말이다. 그것이 바로 차별금지법이 그리는 세상이다.

기자명 홍성수 (숙명여자대학교 법학부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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