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얼마 전 작고한 영화음악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시네마 파라디소’가 흘러나왔다. 곡이 끝나기 전 김하나 작가가 서울 망원동 스몰커피에 들어섰다. 그의 단골 가게다. 동거인 황선우 작가가 차로 데려다주었다. 근황을 묻자 한국 여성으로 살기 너무 ‘빡세다’는 답이 돌아왔다.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 모친상 빈소의 조화 논란에 이어 아동 성착취물 사이트(웰컴투비디오) 운영자의 미국 송환이 무산됐다. 박원순 서울시장의 부고 소식까지 겹쳐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같이 살던 고양이 고로가 떠난 지는 한 달이 좀 넘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2020년이 너무 힘들다는 그에게도 명랑한 근황은 있었다. 얼마 전 지하철을 탔는데 맞은편에 앉은 사람이 그의 책을 읽고 있었다. 갓 출간된 〈말하기를 말하기〉였다.

김하나 작가는 3년째 온라인 서점 ‘예스24’가 만드는 책 팟캐스트 〈책읽아웃- 김하나의 측면돌파〉를 진행 중이다. SK텔레콤 ‘현대생활백서’, 네이버 ‘세상의 모든 지식’ 등 다수의 히트 광고를 만든 카피라이터이기도 하다. 그의 진행은 군더더기가 없다. 정갈한 음성이 신뢰를 준다. 팬카페도 있다. 얼마 전 출연한 김이나 작사가는 ‘책읽아웃’이 “공중파로 치면 〈놀면 뭐하니?〉 같은 곳 아닌가”라고 말했다.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싶다는 그는 출연하는 작가들의 책을 전부 읽는 편이다.

그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황선우 작가와 함께 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비혼 여성 둘의 동거 에세이다. 다른 삶의 방식이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하면 된다’가 아니라 ‘하면 는다’고 믿는 그에게 ‘인생은 레벨 업이 아니라 스펙트럼을 넓히는’ 거다. 저술, 강연, 방송 등 스펙트럼을 넓혀가고 있는 김하나 작가를 만났다.

저자 소개가 ‘읽고 쓰고 듣고 말하는 사람’이다. 이번엔 말하기에 관한 책인데.

카피라이터로 브랜딩 쪽 일을 했는데 브랜드가 사람들에게 어떤 이미지를 줄지, 어떻게 기억될지 계속해서 고려해야 하는 작업이다. 브랜드의 좋은 점을 부각하는 게 일이다. 그게 배어 있는지 내 커리어를 만들어나갈 때도 그 점에 신경 쓴다. 우연히 좋은 기회에 팟캐스트 제안이 들어와서 3년 가까이 하고 있다. 진심으로 열심히 하는 걸(말하기) 쓰는 작업과 결합해 한번 정리하고 싶었다. 잘 해두면 강점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왜 우리가 ‘말하기라는 거대한 세계’를 탐색해야 할까?

글은 안 읽고 안 쓰는 사람도 많지만, 말을 안 듣고 안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글재주나 독서력은 추앙하는 데 비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대해선 아무런 교육을 받지 않고, 그에 관해 생각도 잘 안 한다. 내 말하기가 특별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팟캐스트를 진행하면서 칭찬을 많이 받았다. 텔레비전을 볼 때 눈살 찌푸릴 때가 많은데 그걸 안 해야지 노력했더니 청취자들이 반가워하더라. 그 말은 반대로, 정성을 기울이지 않는 말하기가 넘쳐난다는 의미다. 이 세계에 대해 좀 더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보통의 화술 책 저자처럼 전문가는 아니다. 다만 말하기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본 사람으로서 이 정도 화두를 던지면 ‘말하기 문화’가 더 근사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지독히도 내성적이었던 어린 시절에 대해 썼다. 저음이 콤플렉스였다고 했는데.

(그런 내가) 말하기 책을 쓴다고 하니 참 신기했다. 왜 이런 기분이 드는지 알려주고 싶었다. 중2 때 담임선생님이 “기억해, 너는 말하는 사람이 될 거야”라고 했는데, 내가 교사라면 중2가 아무리 또박또박 말을 잘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참 다양한데 그렇게 말하기 어려울 것 같다. 30년이 지나 라디오를 하려는데 그 말이 생각나 신기했다.

성우 수업을 받았다고 들었다.

광고회사에 다닐 때 이름난 다큐멘터리 성우를 만났는데 몇 마디만 해도 지성과 내공이 느껴졌다. 그가 녹음실에서 나와 사적인 대화 나누는 걸 들었는데 ‘깼다’. 다르더라. 평소 말을 정연하게 잘하는 것과 또 다른 영역이라는 걸 느꼈다. 수업을 받으며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게 아니라 발성·음정·속도·포즈 등 말하기의 여러 요소를 알게 되었다. 보통 말이 내용뿐이라고 생각하는데 운용하는 방식에 따라 다양한 층위가 있다. 말에 담기는 내용도 삶의 태도와 그간 어떻게 살아왔는지가 반영된다. 수업 이후로 다른 사람들의 말하기를 살펴보고 생각하게 됐다. 28세에 교육을 받았으니 10년 넘게 쌓인 거다.

카피라이터로 일할 때 광고의 윤리적 문제에 대해 고민했다고 했는데.

치약 광고를 만든다고 하면 좋은 점이 뭔지 찾아서 정직하고 재밌게 할 수 있다. 기업에 대한 광고는 좀 다르다. 가치 지향적으로 카피를 썼는데 채용 비리, 횡령 같은 게 발생하기도 하는 거다. 허울 좋게 빚고 있구나 하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었다. 일본 광고를 베끼는 것도 보았다. 1년10개월 백수로 지내면서 사람은 왜 돈을 벌어야 할까, 어떤 직업은 윤리적이기만 할 것인가에 대해 궁리했다. 두 번째 회사에선 윤리적으로 틀렸다고 생각한 게 그렇지만은 않다는 걸 알았다. 다 그르거나 옳은 일은 없고, 되도록 거짓말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거다. 고민은 많이 정리되었다.

ⓒ김하나 제공김하나 작가는 저술, 강연 등을 통해 ‘말하기’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다. 위는 〈힘빼기의 기술〉 북토크 현장.

〈책읽아웃〉 전후로 직업 인생이 바뀌었다고?

목소리가 좋다는 얘기를 듣는 편은 아니었다. 스피커를 통해 들었을 때 집중력이 생기는 목소리인 것 같다. 엄마조차 ‘몰랐는데 듣다 보니 목소리가 참 좋더라’고 하더라. 전달력이 좋고 편안하다는 얘기 들으니 일단 아주 즐겁다(웃음). 술집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잘 듣고 있다고 말해준다. 이전에 잘 몰랐던 소질이 계발된 것 같은 느낌이다. 또 다종다양한 분야의 이야깃거리를 가진 작가들에게 궁금한 부분을 질문하면 내게 특화된 답변을 해준다. 음성 교과서가 쌓이는 기분이다. 순기능이 너무 많다.

가장 인상적인 게스트는?

김원영 변호사와의 만남은 너무 신기한 경험이었다. 처음 만나 인사하고 대화하고 물꼬를 터가는 두 시간 동안 화학변화가 일어나 나중엔 정확히 말을 안 해도 통하는 느낌이 왔다.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경험이고, 너무 찡했다(김원영 작가는 방송 말미 ‘저 지금 작가님이랑 춤춘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긴장을 많이 했는데 그 속에서도 그런 순간이 찾아왔다. 술을 마시며 진행한 김혼비 작가의 회차는 분위기가 정반대였다. 긴장과 이완의 양극이었다. (〈책읽아웃〉은) 심리 쪽에 강점이 있다. 진행하면서도 도움이 되겠다고 느낄 때가 있다. 허지원, 하지현, 이남옥 교수가 출연한 편이 그렇다.

‘칭찬 폭격기’라는 별명이 있다.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보면 맺힘 없이 환한 내면을 지향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세상에 대한 환멸로 다 망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사람은 결국 살아가야 한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낫게 만들어야 할지, 내면을 환하게 하려는 노력에 대해 생각한다. 할 수 있는 걸 찾자는 주의다. 주변 사람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다 좋을 순 없고 빛나는 강점을 보려 한다. 작가 인터뷰를 할 때 장점이 뭔지 끄집어내 쉬운 말로 표현해주면 그것이 강화된다. 그렇다면 멋진 저자 한 명을 확보하게 되는 것 아닌가.

‘무해하게 재밌다’는 칭찬에 대해선?

유해하게 재밌으려고 하는 분위기에 너무 익숙해져 있다. 남을 비하하거나 놀리면서 웃는 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유쾌하게 보낼 수 있다는 선례를 보면 달라지는 것 같다. 몸에 안 좋아야만 맛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청정하기 때문에 방송을 듣는 건 싫고, 무해한 와중에 웃겨서 들었으면 좋겠다.

여성작가 모임을 기획했던 걸로 안다.

2006년부터 3년 동안 60~70명 모임을 주재했다. 너무 만나는 사람만 만나는 것 같아 모임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좋은 영향을 받았다. (내성적인 성격인데) 낯선 사람과 만나는 게 안 불편해지면서 해방감을 느꼈다. 모여서 놀 때 신경 써야 할 점에 대해서도 노하우가 생겼다. 각 필드의 여성이 규모 있게 모이면 즐겁고 힘이 날 것 같았다. 31명이 모여 4차까지 갔다. 단군 이래 가장 큰 여성작가 모임이라고 해서 ‘단군큰모임’이다. 6개월에 한 번씩 모이는 게 목표인데 코로나19로 어려워졌다.

마이크 앞에 선 여자가 더 많아야 한다는 맥락과도 연결되나?

각자의 미디어를 하나씩 가지고 있는 시대다. 예전엔 권력을 가진 사람이 마이크를 독점했다면 지금은 자기 미디어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 중심이 와해된 거다. 자기만의 중심을 가질 수 있다. 약자에게 더 유리하다고 생각한다. 강자를 위한 마이크는 차고 넘치니까. 소수자, 약자, 장애인, 질병 앓는 사람들이 자기 이야기를 꺼내놓을 수 있다. 말하기 기술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습득해서 전달하겠다는 게 아니고 나도 당신도 말하는 사람이라는 걸 전하고 싶었다. 사인할 때도 ‘목소리를 냅시다’라고 쓴다.

이번이 여섯 번째 책이다. 지난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는 공동 저작이었는데.

나는 페미니즘 서적이라고 생각하는데 ‘페미 안 묻어서 좋아요’라는 반응을 봤다. 페미니즘을 뭐라고 생각하는 건지. 가부장제에 귀속되지 않은 가족도 잘 살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신변잡기를 책으로 내도 되나 고심했지만, 대출금도 갚아야 하고 기왕이면 재밌는 에세이를 써보자고 했다. 나와 선우씨의 글 쓰는 리듬과 호흡이 달랐다. 카피 쓸 때 첫 문장을 읽으면 끝 문장까지 비탈길 굴러가듯 읽게 만드는 훈련을 해서인지 읽히는 속도에 신경을 많이 쓴다. 빨리 읽혀서 ‘KTX책’이라는 반응도 있더라.

새로 도모하는 일이 있는지, 일을 선택할 때 기준은?

에세이 봇을 준비 중이다. 길지 않은 에세이를 한 편씩 낭독해 일주일에 두 편씩 업로드하는 거다. 유튜브에 계정만 만들었다. 선우씨랑 같이 만든 브랜드인데 ‘펜유니온’이다. 여성작가 모임과도 닿아 있고 글 쓰는 걸 기반으로 느슨한 연대를 생각한다. 요즘 너무 힘든 뉴스가 많은데 편안하게 들을 수 있다. 일을 택할 때는 새로운가, 그것이 내게 무얼 가져다줄 것인가 생각한다. 힘을 잘 주려면 힘낼 시간이 충분히 필요하다. 내게 충분히 유리한 게 올 때까지 기다리는 일에 조바심이 나지 않는다. 덜 벌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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