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은 “균형이란 아무래도 진보적인 개념”이라고 말했다.

“균형이란 아무래도 진보적 개념입니다.”

2007년 3월22일 과학기술인 오찬간담회. 노무현 당시 대통령은 참여정부의 균형발전 정책을 설명하다 이런 말을 한다. “보호하거나 역량을 확충해주는 작업을 통해 낙오한 사람들의 삶을 국가가 책임진다는 것이 사회투자의 개념이라 하면, 균형발전도 마찬가집니다. 낙오한 지역을 균형 있게 발전시킵니다.”

“균형은 노무현 대통령의 통치철학 근저에 깔린 핵심 원리입니다.”

2010년 5월, 김경수 봉하재단 사무국장(현 경남도지사)은 노무현 대통령 1주기를 맞아 봉하마을을 찾은 기자에게 이런 말을 한다. “대통령님은 아이들이 시골에 자주 와야 한다고 항상 말했습니다. 자연의 순환을 보고 자란 아이는 콘크리트 숲에서 자란 아이와 세계관이 다를 수밖에 없다고 늘 강조했습니다.” 전임 대통령의 한가한 취미 정도로 보였던 시골 마을의 삶은 이렇게 해서 균형이라는 통치철학과 이어진다.

“균형은 저절로 오지 않습니다.”

2020년 7월2일, 봉하마을의 젊은 비서관 김경수는 이제 유력 정치인으로 성장해서 “노무현 대통령 통치철학의 핵심 원리”라던 균형을 자기 정치의 핵심 의제로 내건다. 그가 〈시사IN〉 ‘진짜 뉴딜’ 시리즈에 들고 나온 답안지는 ‘격차 해소’였다. 불균형 상태를 바로잡는 균형 회복 프로젝트다.

균형은 왜 “아무래도 진보적 개념”인가. 이 말을 이해하려면 먼저 보수가 생각하는 균형의 의미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보수의 관점에서 ‘균형’이란 애써 도달해야 할 목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연법칙에 가까운 것이다.

시장은 누가 건드리거나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스스로 균형에 도달한다. 수요가 늘면 가격이 올라가고, 가격이 올라가면 공급은 늘고 수요는 줄어든다. 그러면 가격은 다시 내려간다. 그러면 다시….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수렴하는 점이 있다. 그게 균형이다. 이런 걸 자기조정체제라고 부른다. 시장이란 스스로 조직하는 시스템인 동시에, 스스로 안정화하는 시스템이다. 자생적으로 작동하는 힘들이 서로 작용해 어떤 균형점으로 수렴한다. ‘보이지 않는 손’은 이 자기조정체제를 설명하는 아이디어 중에서 가장 친숙하고 유명하다.

나아가, 시장은 누가 건드리거나 애써 노력하면 오히려 균형으로부터 멀어진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자기조정체제의 원리를 국가 운영 철학으로 격상시킨 20세기 경제사상가다. 그는 이 자생적인 질서를 인간의 제한된 이성보다 깊고 탁월한 질서라고 봤다. 인간이 섣불리 건드리다가는 질서가 흐트러진다. “일단 정치인에게 자생적 시장질서에 개입할 수 있는 면허를 주면, 그들은 이것을 계속 확대하려 할 것이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데, 정치가는 민주주의 원리에 따라 무지한 보통 사람들의 요구에 따르는 사람들이라서 그렇다. 이 무지한 보통 사람들은 “시장경제가 기초하고 있는 규칙들을 결코 이행해본 적이 없으며, 그들에게는 그 결과가 비합리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처럼 보인다.” 훗날 영국의 총리 마거릿 대처는 의회에서 하이에크의 책을 흔들며 “이것이 우리가 믿는 것이다”라고 외쳤다.

ⓒ뉴시스서울 롯데월드타워. 보수가 믿는 ‘자생적 균형’의 이미지는 경제학 곳곳에서 되풀이해 등장한다.

몰려드는 힘이 몰려드는 힘을 낳는다

이런 ‘자생적 균형’의 이미지는 경제학 곳곳에서 거듭 등장한다. 쿠즈네츠 곡선은 소득과 불평등의 관계를 나타내는 곡선으로 유명하다. 경제가 성장하면 처음에는 불평등이 따라 증가한다.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도시와 농촌의 소득 격차가 벌어진다. 하지만 경제성장이 계속되면 노동자의 임금수준이 전반적으로 올라가면서 불평등이 줄어든다. 균형점으로 수렴하는 자생적 질서다. 낙수효과도 비슷하다. 소득이 상류층으로 일단 쏠린다고 해도, 그것이 결국 중산층과 서민층으로까지 흘러내리면서, 자연스럽게 균형에 도달한다. 낙수효과를 믿는다면 부자들이 먼저 돈을 버는 걸 문제 삼을 필요가 없다. 그 돈은 결국 아래로 흘러넘치게 되어 있다.

이 보수 버전 ‘균형’이 정치적으로 갖는 함의는 간명하고 강력하다. 인위적으로 개입하지 말라. 질서는 알아서 제자리를 찾아간다. 개입은 결과를 더 나쁘게 만든다. 작은 정부, 자유방임주의, 시장에 대한 불개입, 자기책임의 원리 등 보수의 공리들이 이 자생적 균형이라는 이미지 위에 터를 잡고 있다. 노동시장부터 부동산 시장까지, 자생적인 균형의 원리는 보수의 핵심 무기다. 노동조합은 나쁘다. 왜? 노동시장의 자생적 질서에 인위적으로 개입하기 때문이다. 부동산을 세금과 규제로 잡으려 해봤자 안 된다. 왜? 부동산 시장의 자생적 질서를 해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수렴하는 균형점 이미지로 설명하기 어려운 힘도 있다. 상호작용을 거듭할수록 균형점으로 수렴되는 피드백 고리와 반대로, 상호작용을 거듭할수록 차이가 증폭되는 피드백 고리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21세기 디지털 경제를 재편하고 있는 플랫폼이다. 구글이나 네이버는 이용자가 몰릴수록 그것으로 정보 생산자를 끌어들이고, 정보 생산자가 몰릴수록 그것으로 이용자를 끌어들인다. 이것을 ‘네트워크 효과’라고 부른다. 플랫폼이 갖는 힘이 여기서 나온다. 네트워크 효과가 일단 작동하면, 몰려드는 힘이 몰려드는 힘을 낳는다. 여기서는 수렴보다 증폭이 우세하다.

수렴보다 증폭을 만드는 힘으로 ‘마태 효과’도 있다. 성경의 마태복음에 나오는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라는 구절에서 착안해, 부자는 더 부자가 되고 가난한 사람이 더 가난해지는 힘을 부르는 말로 자리 잡았다. 이 역시 수렴보다는 증폭시키는 힘이다. 결과는 우리에게 익숙한 부익부 빈익빈이다.

ⓒ시사IN 이명익서울 강남 일대 아파트 단지. 서울에 대항하는 플랫폼이 지방에 생 겨야만 균형발전이 가능하다.

균형에 대한 진보의 접근 방식

토마 피케티는 불평등 연구로 21세기 경제학계를 뒤집어놓은 슈퍼스타다. 그의 책 〈21세기 자본〉에서 가장 유명한 공식은 ‘r〉g’인데,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보다 높다는 뜻이다. 근대 경제사에서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의 예외를 제외하고 이 부등식은 성립했다. 그리고 이 부등식이 성립할 때, 불평등은 커진다. 돈이 돈을 버는 힘(자본수익률)이, 소득증가율(성장률)을 앞질러버리기 때문이다. 이 등식이 성립한다는 것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아파트 상속자가 재능과 노력으로 고소득을 올리는 전문직 종사자보다 더 빨리 부자가 된다는 뜻이다. 불평등이 수렴하는 힘에 통제될 것이라는 쿠즈네츠 곡선과는 반대 결론이다. 피케티는 “불평등을 제어하는 자기조정 원리는 없다”라고 쓴다. 다시 말해, 불평등을 ‘알아서’ 균형으로 수렴시켜주는 질서 같은 것은 없다.

그러므로 가만히 내버려두면 균형이 붕괴하는 질서가 분명히 있다. 어떤 진보주의자들은 여기에서 보수와 차별화되는 진보의 원칙을 발견한다. 균형이 자생적 질서에 달려 있지 않다면, 어떤 경우에는 수렴하는 힘보다 증폭하는 힘이 세서 불균형이 무한정 확장될 수 있다면, 정치가 할 일은 그런 불균형을 바로잡고 수렴하는 힘이 다시 우세해질 수 있도록 게임의 규칙을 바꿔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경수 지사는 수도권 집중에 맞서는 힘으로 동남권 메가시티를 주창한다. 이 논리를 따라가 보면 균형에 대한 진보주의자들의 접근방식을 알 수 있다.

지식 기반 경제에서는 도시도 일종의 플랫폼이다. 집중될수록 더 많은 자원을 끌어들인다. 일자리를 찾아 인재가 몰려가고, 그 인재를 찾아 기업이 몰려간다. 이 네트워크 효과가 한번 작동하면, 그때는 선두 플랫폼이 모든 자원을 빨아들이듯 전국의 노동력과 기업을 빨아들인다. 그게 지금 서울이 가진 근본적인 힘이다. 이 증폭의 힘은 거의 물리법칙에 가까워서, 정부 정책으로 공공기관 몇 개를 지방에 내려보낸다고 뒤집을 수 없다. 오직 이 빨아들이는 힘에 버틸 수 있는 ‘대항 플랫폼’이 지방에 생길 때에만 수도권 집중 완화와 균형발전이 가능하다. 이게 메가시티를 통한 균형발전 전략의 논리다. 여기서는 균형점으로의 수렴이 아니라 증폭이 기본적인 힘이고, 그걸 제어하여 균형을 복원하는 시도를 정치가 한다. 정치가 균형과 질서를 훼손하는 주범인 하이에크의 세계를 뒤집었다.

이것은 20세기에 익숙한 진보주의의 아이디어들과 꽤 거리가 멀다. 20세기에는 시장 자율보다는 경제계획, 성장보다 분배 등이 진보의 이미지를 구성했다. 이것은 마치 자율 대 통제의 대결처럼 보였는데, 이 구도에서 통제가 자율을 이길 방법은 많지 않다.

‘균형’은 다르다. 이 아이디어는 자율과 시장과 자기조정의 힘을 긍정한다. 다만 그런 힘들이 균형을 잃지 않고 작동할 수 있으려면 때로 정치가 개입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는 영남 지역주의, 수도권 집중, 양극화, 친미 편향 외교라는 불균형 상태와의 싸움으로 점철되었다. 노 전 대통령은 각각의 영역에서 선거제도 개혁, 지역 균형발전, 격차 해소, 동북아균형자론을 내세워 균형의 복원을 시도했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에릭 리우는 정치의 이런 역할을 ‘정원사’에 비유했다. 정원사는 생태계 자체의 작동에 맡기고 물러나 있을 줄 안다는 점에서 20세기 진보주의와 다르다. 하지만 그는 생태계가 잘 굴러가도록 웃자란 개체를 쳐내고 다듬는다는 점에서 보수주의와 다르다. 균형이란 아무래도 진보적 개념인 이유가 이제 확인됐다. 진보주의자에게 균형이란 가만히 기다리면 도달하는 물리법칙이 아니라, 힘써 추구하고 가지치기를 해줘야 도달할 수 있는 어떤 프로젝트다. 그래서 이것은 정치의 기획이 된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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