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FP PHOTO6월20일 오클라호마주 털사에서 열린 트럼프 유세. 케이팝 팬덤의 노쇼 시위로 빈자리가 많았다.

지난 6월20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은 오클라호마주 털사에서 화려하게 부활할 예정이었다. 코로나19 유행 확산에 대한 보건 당국의 우려에도, 조지 플로이드의 추모 시위가 연일 일어나는 상황에서도, 트럼프는 기어코 유세를 밀어붙였다. 무엇보다 11월 대선에서 자신을 위해 표를 던져줄 골수 백인 보수 지지층의 존재를 트럼프는 직접 확인해야 했다.

하지만 그를 기다린 건 지지자 6200여 명뿐이었다. 대신 트럼프는 그날 케이팝 팬덤이라는 세련되며, 진보적이고, 숙련된 시민참여 운동과 맞닥뜨렸다. 인파가 몰릴 것으로 예상됐던 것과 달리 텅 빈 유세장 모습을 두고 현지 언론들은 10대 케이팝 팬들을 지목했다. 이들이 입장권 수만 장을 신청해놓고 의도적으로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 ‘노쇼(No show)’ 시위를 벌였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재선 캠프의 파스케일 선거대책본부장은 유세장 밖에서 과격한 시위대가 지지자들을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빈자리가 많았다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뉴욕타임스〉는 현장에 시위는 거의 없었다고 전했다.

왜, 어떻게, 이른바 ‘아이돌 빠’들이 정치적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일까? 우선, 중요한 사실을 몇 가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최근 트럼프 유세장 노쇼 사건은 케이팝 팬덤이 독립적으로 정치적 이익을 위해 일으킨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상 기반 소셜미디어 ‘틱톡(Tiktok)’ 사용자 등 케이팝 팬이 아닌 일반 SNS 사용자들도 이 노쇼 사건에 전반적으로 참여했다. 케이팝 팬덤을 단순한 반(反)트럼프 정치집단으로 보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이들의 독자적인 사회참여 역사의 맥락을 무시하는 일반화의 오류이다.

“우리를 단순히 아이돌이나 쫓아다니는 사춘기 ‘빠순이’들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엄청난 편견입니다.” 크리스틴 정은 말한다. 그녀는 방탄소년단(BTS)의 공식 팬클럽 ‘아미(ARMY)’의 일원이다. “우리는 계속적으로 국내외 사회문제에 관여해왔습니다. 마케팅용이 아닌 실질적 참여가 동반된 캠페인에 참여해왔어요.” 트럼프 털사 유세장 노쇼 운동도 케이팝 팬덤의 사회참여 운동 중 일부라는 것이다.

“이번 털사 유세장 노쇼 사건에 충격을 먹은 사람들은 케이팝 팬들이 트위터에서 차지한 위상을 모르는 거예요.” 아미 일원인 켈리 킴이 말했다. 실제로 케이팝 팬층이 트위터에서 갖는 사회적 영향력은 상당하다. 유세 일주일 전인 6월11일, 트럼프 대통령의 공식 트위터 계정이 대대적으로 유세 홍보를 시작했을 때 가장 빨리 이 트윗을 퍼나른 이가 바로 케이팝 팬들이었다. 이들이 가진 높은 결집력과 온라인 인적자원 동원 능력 덕분이었다.

“케이팝 팬덤이 온라인 세계에서 가지고 있는 역할은 사회정의 구현을 위한 사이버 자경단(cybervigilantism)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수많은 멤버들을 거느린 이들은 사회정의 관련 이슈에 대해 높은 이해도 및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효율적으로 자신들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온·오프라인 참여를 높이는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어요.” 오스트레일리아 커틴 대학에서 디지털 인류학을 연구하는 크리스털 아비딘 박사의 말이다.

이런 특징들을 바탕으로, 최근 케이팝 팬덤은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흑인 인권운동인 ‘Black Lives Matter(BLM)’에도 지속적으로 힘을 보태왔다. 미국 댈러스시 경찰이 만든 불법시위 동영상 제보용 앱에 자신들의 ‘팬캠(Fancam:팬이 찍은 동영상)’을 올려 서버를 하루 만에 다운시키거나, 백인우월주의를 표방하는 해시태그에 자신들의 아이돌이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는 동영상을 업로드한 사례들이 좋은 예다. 이들의 활동이 너무나 효과적인 나머지 역풍을 맞아 케이팝 관련 계정 퇴출을 요구하는 트위터 해시태그(#bankpopaccounts)가 따로 생기기도 했을 정도이니 말이다.

왜 케이팝 팬들은 인종차별과 같은 사회정의 이슈에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미디어 학자들은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케이팝 팬덤 내부의 포용적인 문화 및 자기 성찰을 중요시하는 분위기를 강조한다. “(한국 밖의) 케이팝 팬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소비하는 한류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봐왔어요.” ‘참여문화’ 개념의 고안자 헨리 젠킨스 교수(서던캘리포니아 대학(USC) 아넨버그 커뮤니케이션 스쿨)의 말이다.

특히 한류가 점차 미국처럼 인종·문화적으로 다양한 나라에 진출할수록, 케이팝 및 한국 문화에 존재하는 인종차별적 표현 및 관습(그리고 이들에 대한 한국인들의 무감각 내지는 관대함)은 지속적으로 비판을 받아왔다. 2017년에 그룹 마마무가 흑인을 비하하는 분장(Blackface)을 해 해당 소속사가 사과한 경우나, 그룹 레드벨벳의 웬디가 인종 편견에 기반한 흑인 여자 성대모사를 해 해외 팬층에게 비판받은 경우가 그런 사례이다. “이렇듯 팬덤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문제 제기와 자기 성찰을 계속해왔기 때문에 오늘날 (인종차별 같은) 사회적 문제에 좀 더 성숙하고 일관되게 대처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런 비판적 담론을 이끌었던 사람들이 유색인종 여성(Women Of Color:WOC) 크리에이터들이라는 점도 큰 기여를 했죠(헨리 젠킨스 교수).”

젊은 세대의 행동은 전 세계적 현상

메릴랜드에 거주하는 케이팝 팬인 트루디 헨더슨은 말했다. “한국 아티스트와 소속사들은 유행하는 흑인 문화를 도용(cultural appropriation)하는 데에는 거리낌이 없지만, 흑인 문화의 역사적 유래를 이해하는 일에는 주저해요.” 그녀는 한국 발라드와 R&B의 팬이면서 동시에 한국 문화에 이해도가 높은 흑인 여성으로서, 인종차별에 대해 조금 더 알려야 할 책임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트루디 헨더슨은 “한국에 있는 팬들도 스스로 이걸 깨우칠 때가 됐다”라고 말했다. ‘아미’의 일원인 켈리 킴은 말했다. “BTS의 ‘Love Yourself’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긍정하는 메시지에 끌린 사람들이 많아요. 구성원 자체가 점차 다양해지다 보니 인종·문화·성적 정체성의 다양성을 포용하고 차별을 성토하는 문화가 팬덤 내부에서 조성됐어요.”

이 때문에 케이팝 팬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렇잖아도 코로나19 때문에 BTS 콘서트가 취소된 상태에서, 트럼프 같은 성소수자 혐오자 및 인종차별주의자가 맘 편히 유세하는 걸 가만둘 순 없었죠.” 켈리 킴이 말했다. 케이팝 팬들의 결집된 반(反)트럼프 행보는 특정 정치세력이나 정치인의 이익을 도모하지도 않는다. 그저 트럼프가 상징하는 국수주의와 백인우월주의 같은 사상을 반대할 뿐이다. 실제로 그들은 트럼프를 반대하는 다른 정치집단이나 정당 및 대선 후보들과 공식적 연대를 거부하고 있다.

비단 케이팝 팬층 사이에서만 보이는 특징이 아니다. 케이팝 팬덤을 연구해온 이혜진 교수(서던캘리포니아 대학 아넨버그 커뮤니케이션 스쿨)에 따르면 BTS 팬덤을 비롯한 케이팝 팬들의 활동이 미국 매스컴의 대대적인 보도 덕분에 두드러졌지만, 사실 젊은 세대들과 사회적 소외계층의 탈중심적인 시민운동 참여 및 시위는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혜진 교수는 설명한다. “2018년 총기 규제를 요구하는 전국 규모의 학생 시위인 ‘우리의 생명을 위한 행진(March For Our Lives)’에서도 보였듯, 젊은 세대는 자신들의 요구를 직접 행동을 해 관철하는 데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이 교수는 덧붙였다. “케이팝을 주로 소비하는 밀레니얼, Z 세대는 인종·문화·성정체성이 가장 다양한 세대인 동시에 정치·경제·사회적으로 불평등을 가장 많이 겪는 세대입니다. 이들이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이유는 케이팝의 소비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데에 있어요. 이들 세대의 투쟁 사유는 구조적이면서 억압적인 부조리와 불평등을 타파하는 데에 있습니다.”

기자명 장재하 (서던캘리포니아 대학 아넨버그 커뮤니케이션·저널리즘 스쿨 학사생)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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