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월급은 40만원이었다. 신수지씨(23·가명)는 놀라지 않았다. 패션 스타일리스트 업계에 처음 들어온 어시스턴트(보조)가 받는 평범한 액수였다. 그래도 막상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니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패션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에게 서울 강남구 청담동은 무법도시다. 이곳에서 일하는 어시스턴트들은 최저임금법이나 근로기준법으로도 보호받지 못한다. 법보다는 관행이 앞선다. 한때 신씨처럼 어시스턴트로 경력을 시작해 패션 스타일리스트로 이름이 유명해진 사람들도 최저시급에 못 미치는 임금을 지불하는 게 관행이다. 대중에게는 ‘유명 패션 스타일리스트’이지만 어시스턴트에게는 ‘악덕 실장님’이다.

어시스턴트가 어떤 일을 하는지 들여다보려면 연예계 패션산업 구조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먼저 가수나 배우가 자신과 함께 일할 패션 스타일리스트를 고른다. 소속사는 해당 스타일리스트와 외주계약을 맺는다. 스타일리스트는 혼자서 모든 업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시스턴트를 고용한다.

어시스턴트는 대행사를 돌아다니며 촬영에 필요한 의상을 받아온다. 대행사는 각종 의류 브랜드로부터 홍보 대행 비용을 받고 협찬 의상을 관리하는 곳이다. 대행사 사무실에는 홍보가 필요한 신상품들이 진열돼 있다. 실장은 대행사를 통해 연예인에게 어울리는 다양한 옷을 빌릴 수 있고 대행사는 실장을 통해 ‘스타 마케팅’을 할 수 있다.

ⓒ김흥구패션 소품을 들고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를 이동하고 있는 어시스턴트.

실장 사무실과 대행사 사무실을 오가며 옷을 픽업(빌림)하고 반납하는 건 어시스턴트의 주 업무다. 얼핏 보면 단순한 일 같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5~10명 규모 아이돌 그룹을 담당하는 팀원은 한 번에 수십 벌을 양 어깨에 짊어져야 하고, 드라마 촬영하는 배우를 담당하는 팀원은 여러 장면마다 어울리는 옷 수십 벌을 준비해야 한다.

오토바이로 배달하는 퀵서비스도 있지만 신수지씨가 일했던 팀에서는 절대 퀵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퀵보다 싸니까요.” 퀵은 한 번 부를 때마다 몇 만원씩 나오지만 어시스턴트에게는 24시간, 한 달 내내 얼마든지 픽업과 반납을 시킬 수 있다. 어시스턴트들이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퀵’ 혹은 ‘청담동 지게꾼’ ‘청담동 염전노예’라고 자조적으로 부르는 이유다. 픽업이나 반납할 때 타야 하는 버스·지하철 요금은 모두 어시스턴트가 부담해야 한다.

어시스턴트가 옷을 픽업해오면 실장은 그중에서 몇 개를 골라 ‘착장(스타일링)’을 한다. 실장이 바쁘면 어시스턴트가 착장을 하기도 한다. 대행사에서 후보 의상을 추리는 것부터 착장까지 모든 실무는 어시스턴트가 하고 이름만 올리는 유명 패션 스타일리스트도 많다. 신씨 역시 착장을 해본 경험이 있다. “실장이나 저희나 사실 똑같은 패션 스타일리스트예요. 다만 저희는 청담동에 사무실 낼 돈이 없을 뿐이죠.” 경력이 많고 실력이 있어도 자본과 인맥이 없으면 독립할 수 없다.

국내 패션 스타일리스트 산업은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됐다. 학력이나 경력을 따지지 않는 낮은 진입장벽 때문에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패션 스타일리스트를 지망하며 청담동으로 몰려들었지만 그만큼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연예인이 한번 뜨면 돈이 되니까 기획사가 너도나도 경쟁에 뛰어들잖아요. 자본은 없는데 어떻게든 스타를 만들어야 하니까 적은 금액을 주면서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하기도 해요. 근데 스타일리스트 처지에서는 그거라도 해야 하는 거죠. 그렇다고 직원에게 월급 40만원 주는 게 말이 되나요. 법을 지킬 수 없을 정도면 일을 그만둬야죠.” 신수지씨가 말했다. 지난 6월 청년유니온에서 어시스턴트 25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월 50만~99만원을 받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43.25%로 가장 많았다.

애초 기획사에서 적은 금액으로 외주 주는 경우도 있지만 실장이 ‘관행’을 이유로 중간에 배를 불리기도 한다. ‘배우팀’ 어시스턴트 차민경씨(25·가명)는 “실장님 손목에 몇백만, 몇천만원짜리 명품 팔찌가 감겨 있거든요. ‘저거 하나만 팔아도 우리 월급 10만원씩 올려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어시스턴트들이 업계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자신이 스타일링한 옷을 입은 연예인이 대중과 팬들의 환호를 받는 그 순간이 짜릿할 만큼 좋아서다.

실장에게 밉보이는 것이 두려워 항의조차 하지 못했던 어시스턴트들이 최근 모여서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 2019년 말부터 알음알음 모인 어시스턴트 10여 명은 청년유니온과 함께 오는 8월 어시스턴트 노조를 출범할 계획이다. 이들의 목표는 단순하다. ‘적어도 생활고를 겪지 말자.’ 신수지씨는 최저임금이라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최소한의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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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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