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구패션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가 대행사 입구에서 커다란 옷 가방들을 옮기고 있다.

첫 월급은 40만원이었다. 신수지씨(23·가명)는 놀라지 않았다. 패션 스타일리스트 업계에 처음 들어온 어시스턴트(보조)가 받는 평범한 액수였다. 그래도 막상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니 당혹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최저 시급이라도 받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씨가 일을 시작한 2018년 당시 최저임금은 월 157만원이었다.

패션 스타일리스트 어시스턴트에게 서울 강남구 청담동은 무법도시다. 이곳에서 일하는 어시스턴트들은 최저임금법이나 근로기준법으로도 보호받지 못한다. 법보다는 관행이 앞선다. 한때 신씨처럼 어시스턴트로 경력을 시작해 패션 스타일리스트로 이름이 유명해진 사람들도 최저시급에 못 미치는 임금을 지불하는 게 관행이다. 대중에게는 ‘유명 패션 스타일리스트’이지만 어시스턴트에게는 ‘악덕 실장님’이다. 물론 어시스턴트가 일을 하며 현장을 배우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실장이 지시하는 일을 하는 도중에 각자 요령껏, 어깨너머로 익혀야 한다. 실상은 ‘교육’보다 ‘중노동’에 가깝다. 하지만 오히려 어시스턴트에게 “너희들이 나에게 돈 내고 배워야 하는데 내가 돈 주고 가르치고 있다”라며 큰소리치는 스타일리스트도 있다.

어시스턴트가 어떤 ‘중노동’을 하는지 들여다보려면 연예계 패션산업 구조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먼저 가수나 배우가 자신과 함께 일할 패션 스타일리스트를 고른다. 소속사는 해당 스타일리스트와 외주계약을 맺는다. 스타일리스트는 혼자서 모든 업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어시스턴트를 고용한다. 사장인 패션 스타일리스트는 ‘실장’으로 불리고 직원인 어시스턴트는 ‘팀원’으로 불린다. 사업자등록을 한 경우 업체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주로 현장에서는 ‘○○○ 실장님 팀’이라고 불린다. 팀마다 가수면 가수, 배우면 배우만 맡아 스타일링하는 경우가 많다.

어시스턴트는 대행사를 돌아다니며 촬영에 필요한 의상을 받아온다. 대행사는 각종 의류 브랜드로부터 홍보 대행 비용을 받고 협찬 의상을 관리하는 곳이다. 대행사 사무실에는 홍보가 필요한 신상품들이 진열돼 있다. 실장은 대행사를 통해 연예인에게 어울리는 다양한 옷을 빌릴 수 있고 대행사는 실장을 통해 ‘스타 마케팅’을 할 수 있다. 기자나 팬이 사진을 찍어 올리는 공항 패션, 결혼식 패션, ‘꾸안꾸(꾸민 듯 안 꾸민 듯)’ 사복 패션은 알고 보면 모두 스타일링 팀의 작품이다.

실장 사무실과 대행사 사무실을 오가며 옷을 픽업(빌림)하고 반납하는 건 어시스턴트의 주 업무다. 얼핏 보면 단순한 일 같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한 번에 날라야 하는 옷 무게가 만만치 않다. 5~10명 규모 아이돌 그룹을 담당하는 팀원은 한 번에 수십 벌을 양 어깨에 짊어져야 하고, 드라마 촬영하는 배우를 담당하는 팀원은 여러 장면마다 어울리는 옷 수십 벌을 준비해야 한다. 커다란 투명 봉지에 다 들어가지 않으면 대형 캐리어까지 끌고 가야 한다. 손목, 어깨 등 관절 통증 때문에 일을 그만두는 팀원도 많다.

‘가수팀’에서 일했던 신수지씨는 양 어깨에 자주 보라색 멍이 들었다. 무거운 무게에 피부가 자주 쓸리다 보니 피부병 진단을 받아 아직까지 고생하고 있다. “한번은 건물 계단을 내려오다가 엉엉 운 적도 있어요. 남자 아이돌 그룹 무대의상이었는데, 정말 너무 무거운 거예요. 옷을 담은 봉지는 양 어깨에다 걸치고 가죽 구두 열 켤레가 든 봉지는 양손에 나눠 들었는데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지 모르겠더라고요.”

오토바이로 배달하는 퀵서비스도 있지만 신씨가 일했던 팀에서는 절대 퀵을 쓰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퀵보다 싸니까요.” 퀵은 한 번 부를 때마다 몇 만원씩 나오지만 어시스턴트에게는 24시간, 한 달 내내 얼마든지 픽업과 반납을 시킬 수 있다. 어시스턴트들이 스스로를 ‘걸어 다니는 퀵’ 혹은 ‘청담동 지게꾼’ ‘청담동 염전노예’라고 자조적으로 부르는 이유다.

ⓒ김흥구패션 소품을 들고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로데오거리를 이동하고 있는 어시스턴트.

“6개월 동안 제 옷은 한 벌도 못 샀어요”

픽업이나 반납할 때 타야 하는 버스·지하철 요금은 모두 어시스턴트가 부담해야 한다. 대행사를 거치지 않고 직접 연락해 협찬을 받은 의상도 픽업하려면 매장에 가야 한다. 하루에 들러야 할 곳이 10곳 넘기도 해서 어시스턴트들은 자연스럽게 ‘대중교통 환승하기 달인’이 된다. 신씨가 보여준 휴대전화 지도앱에는 그가 9개월 동안 일하면서 들렀던 매장 133곳이 서울 전역에 표시돼 있었다.

어시스턴트가 옷을 픽업해오면 실장은 그중에서 몇 개를 골라 ‘착장(스타일링)’을 한다. 실장이 바쁘면 어시스턴트가 착장을 하기도 한다. 대행사에서 후보 의상을 추리는 것부터 착장까지 모든 실무는 어시스턴트가 하고 이름만 올리는 유명 패션 스타일리스트도 많다. 신씨 역시 착장을 해본 경험이 있다. “실장이나 저희나 사실 똑같은 패션 스타일리스트예요. 다만 저희는 청담동에 사무실 낼 돈이 없을 뿐이죠.” 경력이 많고 실력이 있어도 자본과 인맥이 없으면 독립할 수 없다.

방송 촬영 현장에서도 어시스턴트가 할 일은 산더미다. 의상을 옮기고, 연예인이 옷 입는 걸 도와주고, 옷매무시를 다듬어준다. 격한 안무 때문에 옷이 뜯어지거나 액세서리가 떨어지는 돌발 상황이 잦은 ‘가수팀’ 어시스턴트는 빠른 바느질 솜씨가 필수다. 가수나 배우가 자신을 언제 호출할지 모르기 때문에 늘 대기해야 하는 건 기본이다. “가글 달라” “담배 달라” 등 스타일링 이외의 심부름도 잦다. 어시스턴트들이 촬영 현장에서 메고 다니는 ‘현장 가방’에는 옷핀, 얼룩제거제를 비롯해 연예인이 찾을 가능성이 있는 물건이 다 들어 있다.

촬영 준비를 마치는 시간은 정해져 있지만 몇 시에 퇴근할지는 알 수 없다. 촬영이 끝나도 어시스턴트의 업무는 계속된다. 협찬 의상을 정리한 뒤 세탁까지 하고 반납을 마쳐야 한다. 반드시 세탁소에 맡겨야 할 옷이 아닌 경우 웬만한 얼룩은 어시스턴트가 직접 두 손으로 세탁한다. 해외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한 어시스턴트는 “외국은 단계별로 나뉘어 있거든요. 픽업·반납팀, 착장팀, 현장팀이 다 따로 있어요. 스타일리스트는 스타일링에만 집중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온갖 잡무를 다 떠안잖아요.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거죠”라고 말했다.

국내 패션 스타일리스트 산업은 1990년대 말부터 시작됐다. 학력이나 경력을 따지지 않는 낮은 진입장벽 때문에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패션 스타일리스트를 지망하며 청담동으로 몰려들었지만 그만큼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 “연예인이 한번 뜨면 돈이 되니까 기획사가 너도나도 경쟁에 뛰어들잖아요. 자본은 없는데 어떻게든 스타를 만들어야 하니까 적은 금액을 주면서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하기도 해요. 근데 스타일리스트 처지에서는 그거라도 해야 하는 거죠. 그렇다고 직원에게 월급 40만원 주는 게 말이 되나요. 법을 지킬 수 없을 정도면 일을 그만둬야죠.” 신수지씨가 말했다. 지난 6월 청년유니온에서 어시스턴트 25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월 50만~99만원을 받고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43.25%로 가장 많았다.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9~11시간(36.44%)’이 가장 많았고 ‘12~14시간(34.75%)’이 그다음이었다. 근로계약서를 작성한 사람은 3.57%에 불과했다. 응답자의 94.05%가 여성이었고, 연령대는 ‘21~25세’가 60.4%로 가장 많았다.

애초 기획사에서 적은 금액으로 외주 주는 경우도 있지만 실장이 ‘관행’을 이유로 중간에 배를 불리기도 한다. ‘배우팀’ 어시스턴트 차민경씨(25·가명)는 “실장님 손목에 몇백만, 몇천만원짜리 명품 팔찌가 감겨 있거든요. ‘저거 하나만 팔아도 우리 월급 10만원씩 올려줄 수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절로 들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한 달에 100만원씩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월 179만원인 올해 최저임금을 고려할 때 착취당하는 것 같다는 그의 말은 ‘기분’이 아니라 ‘사실’에 가깝다.

차씨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오히려 부모로부터 지원을 받는 형편이다. 첫 월급 80만원은 전셋집 관리비 20만원, 밥값 25만원, 교통비 20만원, 통신비 10만원으로 나갔다. 협찬을 섭외하고 옷 사진을 찍어서 실장에게 보고하느라 통신비도 많이 들었다. “6개월 동안 제 옷은 한 벌도 못 샀어요. 돈도 없을뿐더러 옷을 살 시간도 없거든요.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못 꾸미는 패션 스타일리스트인 거죠.” 그나마 경제적 지원을 해줄 가족이 없으면 버티기가 더 힘들다.

청년유니온과 함께 어시스턴트 노조 출범

티셔츠 한 장 사지 못하는 어시스턴트가 갑자기 고가의 명품 브랜드 옷을 사야만 할 때도 있다. 자기가 픽업했던 협찬 의상이 분실되거나 훼손됐을 경우다. 신수지씨는 분실된 드레스 값 200만원을 물어낸 어시스턴트를 만난 적 있다고 말했다. 만약 돈이 없어서 혹은 억울해서 옷값을 물어내지 않으면 패션 스타일리스트가 되겠다는 꿈은 접어야 한다. 실장이 업계에 소문을 내면 다시는 그를 받아줄 팀이 없기 때문이다. 상습적으로 임금체불을 당해도 쉬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신씨 역시 단 한 번도 월급을 제때 받아본 적이 없다. “제가 아는 분은 팀 규모도 굉장히 크고 유명한 실장 밑에 있었어요. 근데 그 실장이 계속 돈을 안 줬대요. 그래서 참고 참다가 결국 ‘내가 이 바닥 뜬다’ 각오하고 고용노동청에 신고하러 갔어요. 가서 보니까 이미 그 실장이 신고돼 있는 사람이었던 거예요. 기막혀하니까 ‘이 업계는 돈 받기 어려울 거다’는 말을 들었대요.”

사정이 이런데도 어시스턴트들이 업계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자신이 스타일링한 옷을 입은 연예인이 대중과 팬들의 환호를 받는 그 순간이 짜릿할 만큼 좋아서다. “저는 옷을 보고, 만지고, 고르는 일 자체가 너무 좋아요. 그 사람이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제 스타일링을 좋아해주면 누구라도 함께 일하고 싶어요.” 차민경씨는 언젠가는 독립해서 자신만의 스타일링을 하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했다. 신수지씨도 “저는 이 일을 찾은 것만으로도 인생 목표를 이뤘어요. 근데 막상 뛰어들고 보니까 이렇게는 못 살겠더라고요. 현실적으로요. 그래도 제가 이 일을 계속하고 싶으니까 잘못된 관행을 바꾸고 싶어요”라고 말했다.

실장에게 밉보이는 것이 두려워 항의조차 하지 못했던 어시스턴트들이 최근 모여서 목소리를 낼 준비를 하고 있다. 2019년 말부터 알음알음 모인 어시스턴트 10여 명은 청년유니온과 함께 오는 8월 어시스턴트 노조를 출범할 계획이다. 이들의 목표는 단순하다. ‘적어도 생활고를 겪지 말자.’ 신수지씨는 최저임금이라도 받고 싶다고 말했다. 최소한의 목표다. “업계가 안 바뀌면 제가 사랑하는 일을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꼭 바꿀 거예요. 우리가 하루만 파업해도 여기 청담동 안 돌아가거든요. 그만큼 우리가 필수 인력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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