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코로나19 팬데믹은 세상의 많은 것을 바꿨지만, 동시에 사회의 원형질 같은 것을 오롯이 드러낸다. 가정이 임노동의 일터가 되고, 공장과 학교와 식당이 문을 닫고, 세계 여행이 올 스톱되는 팬데믹의 격변 속에서도 변치 않고 쉼 없이 작동한 것이 있다. 바로 돌봄이다.

코로나19 이후 우리 일상을 지탱해주는 근간이자 뼈대는 돌봄이었다. 강력한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내려놓았지만, 건강한 밥과 청결한 옷과 잠자리에 더욱 집중했다. 등교하지 못한 아이들을 건사하고, 노쇠하고 아픈 이를 돌보는 일까지, 돌봄은 물이나 공기처럼 일상이 완전히 멈추지 않도록 사회를 작동시키는 원동력이었다.

사람은 돌봄이 있어야만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멈추니 비로소 명징하게 보이는 사실이다. 하지만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해 쏟아지는 예측 속에서도 돌봄은 찾아보기 어렵다. 정부가 코로나 이후의 뉴노멀로 강력하게 추진 중인 디지털화나 그린뉴딜 정책 속에서도 돌봄에 대한 고려는 빠진 듯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로봇이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돌봄노동을 대신하기는 어렵고 한계가 분명하다. 돌봄은 여타 노동과 달리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10년간 치매 걸린 아내를 돌봤던 하버드 대학 정신의학 및 의료인류학 교수인 아서 클라인먼은 간병 경험을 기록한 〈케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돌봄을 주고받는 일은 관심, 애정, 실질적 도움, 감정적 지지, 도덕적 유대를 주고받는 일이다. (중략) 돌봄은 가족, 지역, 사회를 끈끈하게 연결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또 하나의 서사를 제공한다.”

클라인먼 교수의 경험에 근거한 통찰력에 동의하면서도 우리 현실을 돌아보면 선뜻 옳은 얘기라고만 말하기 어렵다. 양질의 돌봄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반면, 돌봄의 가치가 폄훼되고 저평가되고 있는 돌봄 현장이 떠올라서다. 한국에서 공적영역에 돌봄을 제공하는 사회서비스 노동자의 인건비는 최저임금 수준이며, 가정에서의 돌봄은 가치가 평가조차 되지 않는 무임금 노동이다.

‘누가 돌봄을 주로 하는가?’라는 돌봄 배분의 정의 또한 짚어야 할 문제다. 이제까지 돌봄은 여성의 일이었다. 맞벌이 취업 부부가 늘어나면서 여성이 이중 노동에 시달리거나, 아니면 그 부담을 취업 부부의 어머니 세대에 전가하는 ‘황혼 육아의 굴레’로 나타나고 있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내 주변에 나이 든 여성들은 힘겨운 일상을 얘기하면서 ‘삼시 세끼’와 ‘황혼 육아’의 고됨을 빠뜨리지 않고 토로했다. 여성학자 김한지영은 취업 부부들이 직업에서의 성공을 추구하면서 돌봄노동을 평가절하하고 최소화하며, 다른 한편 장시간 임노동을 하느라 돌봄을 할 시간도 여력도 없다고 분석한다.

돌봄노동은 저임금 혹은 무임금

돌봄이 저평가되면서 ‘독박 돌봄’의 양상을 띠면 어떻게 될까? “결국 돌보는 일을 그만두려고 할 것”이라는 페미니스트 경제학자 낸시 폴브레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짐작 가능하다. ‘돌봄 결핍증’과 ‘돌봄의 위기’는 오래전부터 페미니스트 학자들에 의해 누누이 제기돼왔다. 전 세계 최고치를 기록하는 한국의 저출산 위기 또한 돌봄 위기와 긴밀한 관련이 있다.

돌봄 사회로의 전환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핵심 의제가 되어야 한다. 임노동 중심의 사회가 돌봄 공동체로 바뀌려면 일과 삶에 대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노동자는 아내(또는 어머니)의 돌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임노동자가 아니라 돌봄노동도 하는 사람이란 점이 전제돼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노동시간은 대폭 줄어야 하며, 동시에 돌봄노동에 대한 사회적 인정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돌봄은 ‘관계’의 문제이며, 따라서 양질의 돌봄은 신뢰와 정서적 지지 및 유대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팬데믹은 한국 사회가 돌봄 사회로 전환하는 일이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임을 명징하게 알리고 있다.

기자명 문경란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조직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