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중앙통신6월16일 오후 2시50분경 북한이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지난해 북한 지도부가 외무성의 구상을 따랐다면 오늘날과 같은 남북관계 파탄은 없었을지 모른다. 북한 외무성은 지난해 10월5일 스톡홀름 북·미 회담이 결렬된 뒤 11월 중에 미국과 실무회담을 재개하고 연말까지는 제3차 북·미 정상회담을 밀어붙이려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외무성의 계획대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났다면 북한의 2020년이 지금처럼 절망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트럼프가 김정은과의 3차 정상회담에 적극적이기도 했다. 북한이 한·미 공군의 연합 군사훈련에 계속 불만을 토로하자, 트럼프는 지난해 11월17일 한·미 국방장관으로 하여금 타이에서 만나 전격적으로 ‘공군훈련을 유예한다’고 발표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트윗으로 김 위원장에게 ‘이제 됐으니 빨리 만나자’고 했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의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올해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예측 불허의 상황에서도 북·미 대화의 끈은 이어졌을 터이다. 더불어 남북 당국들의 운신 폭도 지금보다는 훨씬 넓었을 것이다.

북한이 6월16일 개성공단에 있는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라는 폭거를 저지른 원인 중 하나는 코로나 방역물자 지원에 대한 불만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코로나 환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큰소리쳐온 북한 처지에서는 남측으로부터 방역물자를 지원받는다는 사실의 공개 자체를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정부로서는 북·미 관계가 잔뜩 얼어붙은 상황에서 방역물자를 북측에 은밀하게 건네주긴 어렵다. 당국 간 공식적 대화를 통해 전달하는 방법뿐이다. 이런 남측 입장과 ‘민간 채널을 통한 조용한 지원’을 희망한 북측 입장이 충돌했다. 북한 당국은 지금까지 코로나19 감염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주민들에게도 ‘이제 핵 강대국이 됐으니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게 하겠다’고 해왔다. 김정은 위원장의 체면 때문에라도 당국 간 지원방식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때마침 ‘최고 존엄’을 모욕한 탈북자 단체의 전단이 북으로 날아들었다. 결국 ‘최고 존엄’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고 외면한 남북연락사무소가 유탄을 맞았다. 지난해 연말 북측은 ‘외무성의 길’을 내치고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 제의마저 거절했다. 이 부메랑이 돌고 돌아 오늘날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 ‘개성공단과 금강산, 최전선 GOP 등에 인민군대의 재진출’이라는 남북관계의 파탄으로 나타났다.

외무성의 길과 주체파의 길

그렇다면 북측은 왜 외무성이 제시한 북·미 대화 노선을 선택하지 않은 것인가. 그 대신 무엇을 선택했는가. 이 선택은 오늘날의 남북관계 파탄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김정은 위원장이 외무성의 구상을 따르지 못한 이유는 하노이 회담 실패 후 당과 군내에서 부상한 강경 세력의 견제 때문이었다. 이른바 주체파라 불리는 이 세력은 과거 통전부가 주도한 북·미 비핵화 회담에 불만이 많았다. ‘미국을 어떻게 믿고 비핵화를 서두르느냐’는 것이다. 주체파 역시 ‘완전 핵보유’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비핵화로 가더라도, 이른바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완전히 종식된 이후에, 단행하자는 것이다. 핵무기는 북한의 체제 수호 수단이기 때문에 더 이상 체제 위협이 없다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갖고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여기서 체제 위협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라고 한다. 주체파의 주장에는 늘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종식’이 비핵화의 조건으로 등장한다.

지난해 2월의 하노이 회담이 성공했다면 주체파의 주장도 물밑의 외침으로 끝났을 것이다. 하노이 회담 실패로부터 모든 불행이 시작됐다. 회담에 관여했던 북한 당국 내의 모든 세력이 발언권을 잃었다. 통전부가 직접 타격을 받았다. 김 위원장의 체면도 크게 상했다. 당과 군에 있는 주체파들의 주장을 제어하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남북관계에도 크게 금이 갔다. 김 위원장의 실수를 인정할 수 없는 북한 체제에서 하노이 회담 실패는 다른 이유를 찾아야 했다. 거기에 남한 책임론이 등장한다. ‘미국과 만나면 문제가 잘 해결될 거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조언을 믿고 하노이에 갔다가 낭패를 당했다’는 논리다. 즉, 영변 핵시설만 폐기하면 미국이 제재를 완화해줄 것으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국 정부가 ‘영변까지만 해도 큰 진전’이라고 생각하며 미국을 설득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러나 북한 김정은 위원장 역시 통전부를 통해 미국과 사전 교섭을 하고 하노이로 갔다. 회담 실패를 전적으로 남측 책임으로 몰아가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후 북한 내부에서는 통전부가 물러나고 외무성이 대미 교섭 창구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남북관계는 후순위로 밀리기 시작했다. 하노이 회담 실패 후에도 북측은 남측이 9·19 공동성명에서 조건부로 약속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재개’에 성의 있는 자세를 보이는지 지켜봐왔다.

ⓒAP Photo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은 “쓸모없는 북남 공동련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

9·19 공동성명에는 분명히 “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사업을 우선 정상화하고”로 되어 있다. 한국 측은 하노이 회담의 실패로 ‘조건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봤다. 그러나 북측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사업을 우선 정상화한다’는 문구에 방점을 찍었다. 그러나 지난해 8·15 대통령 연설에서도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재개에 대해 한국 측의 명확한 방침이 나오지 않았다. 이 무렵부터 남북관계의 후퇴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북한 외무성은 북·미 관계에서 돌파구를 열면서 북·일 관계 개선 작업까지 병행할 작정이었다. 외무성의 구상 역시 비핵화를 전제로 한 것이다. 어떤 측면에서는 하노이 회담에 들고 갔던 통전부의 방안보다 진일보했다. 통전부는 영변 핵시설 폐쇄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래서 회담이 결렬됐다. 외무성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영변+α’ 즉 영변 바깥의 핵물질 생산시설의 존재를 시인하고 미국과 함께 해체 로드맵을 마련하는 데까지 나아갔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신 미국으로부터 불가침 협정과 제재 완화를 받아내려 했다. 외무성은 이런 구상을 발판으로 2018년 말에는 북·미 정상회담, 나아가 올해(2020년) 9월 김 위원장의 유엔총회 연설까지 추진할 계획이었다.

미국의 적대시 정책 종식을 비핵화의 조건으로 내세운 북한의 주체파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구상이었다. 통전부를 제쳐놓았더니 그보다 더한 상대(외무성)가 등장한 셈이다. 그러나 지난해 10월5일 스톡홀름 회담에서 11월 말 사이, 주체파가 다시 주도권을 쥐게 된다. 북측은 지난해 10월까지만 해도 북·미 정상회담에 적극적이었다. 그랬던 북측이 그해 11월17일 트럼프의 만나자는 제안에 대해서는 태도를 바꾼다. 그 배경에 주체파의 부상이 있다. 이때 북측은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되려면, 그 전에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폐기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처음으로 공식화했다. 이어서 지난해 연말에 노동당 전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외무성 구상을 주도했던 리수용 노동당 국제부장과 리용호 외무상이 한꺼번에 경질된 것에서도 주체파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올해 1월1일의 전원회의 결정서(이하 결정서)가 등장한다.

결정서의 행간에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 등 북측의 행보가 담겨 있다. 결정서는 주안점을 경제 분야에 두었다. 2019년 4월의 4차 전원회의 결의대로 ‘자력갱생 정신으로 경제난에 대해 정면 돌파전을 감행하자’는 내용이다. 이와 함께 북핵 문제에 대한 주체파의 주장이 등장한다.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해소될 때까지 핵 포기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조건부 핵보유 노선’으로 부를 수 있는데, 과거의 ‘핵·경제 병진노선’과는 다르다. 병진노선은 핵무기의 수를 계속 늘려가겠다는 것이었다. 반면 조건부 핵보유 노선은 ‘핵무기를 더 이상 늘리지 않겠지만, 기존 핵무기는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폐기될 때까지 체제의 안전판으로 보유하고 있겠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한편으로는 새로운 전략무기 개발을 계속할 것이며 조만간 충격적인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위협했다.

ⓒ시사IN 포토2008년 12월 임진각 자유의 다리 위에서 자유북한운동연합 등 보수 단체 회원들이 대북 전단이 든 풍선을 북쪽으로 날리고 있다.

주체파의 중심은 군부다. 그중에서도 2017년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시험을 통해 미국과 아슬아슬한 대치 상황을 끌고 갔던 경험과 노하우를 가진 ‘전략군’이 중심이다. 주체파가 물리친 외무성의 기존 노선은, ‘북·미 간 유화적 분위기 조성으로 제재를 완화시키며 주변국의 지원을 이끌어내 북한의 살길을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주체파가 외무성 노선을 침몰시켰다면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그들은 노하우를 갖고 있다. 2017년에 연이은 핵 관련 시험으로 동북아 전체를 뒤흔들어보지 않았던가. 물론 이는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겠다는 ‘위험한 도박’ 같은 것이었다.

마침 2020년 동북아에는 연초부터 국제정치적으로 중요한 이벤트가 잇따를 예정이었다. 1월11일의 타이완 총선, 2~3월의 한·미 연합 군사훈련, 7~8월의 도쿄 올림픽 등이다. 북한이 2017년과 비슷한 사고를 치면 누구는 뒤에서 응원하며 암묵적으로 지원을 늘리고, 다른 누구는 그것을 막기 위해 또 다른 형태의 지원에 나설지도 몰랐다. 예를 들어 타이완 총선을 둘러싸고 중국과 타이완, 중국과 미국 간에 긴장 상황이 빚어진다고 하자. 미·중 무역전쟁과 타이완 문제라는 두 개의 전선에서 고립돼 있는 중국 처지에서는 자신들에게 유리한 다른 전선을 만들고 싶을 터이다. 그런데 이 전선을 만드는 것은, 동북아에서 북한만이 할 수 있다. 2017년과 2018년, 중국이 북한으로 인해 ‘세컨더리 보이콧’이라는 미국의 덫에 걸리면서도 북한을 놓지 못하고 암묵적인 지원을 계속해온 이유다. 일본 아베 총리도 잠재적인 고객이었다. 7~8월로 예정된 도쿄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려면 동북아의 평화가 유지돼야 한다. 아베가 선물 보따리를 들고 평양을 방문해야 할 매우 다급한 이유가 존재했다.

코로나가 모든 것을 앗아갔다

결국 주체파가 외무성 노선의 대안으로 제시한 전략은 동북아 정세를 격동시켜 이해 당사국의 암묵적 지원을 끌어내는 일종의 ‘약탈경제’ 행위였다. 위력을 앞세워 주변국의 지원을 끌어내는 것은 북한에겐 매우 익숙한 일이다. 모처럼 정상 외교를 통해 정상 국가의 길을 걷고자 했던 김정은 위원장의 시도로 볼 때는 뒷걸음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주체파의 새로운 전략마저 실행하기 어려운 상황이 와버렸다. 예기치 않은 사건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먼저, 미국의 선제타격이다. 미국은 지난해 12월 북한이 “크리스마스 선물” 운운하며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시험장에서 일련의 보여주기 쇼를 벌일 때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탄핵 위기 속에서도 정찰기와 폭격기를 수시로 한반도 상공에 띄웠다. 급기야 올해로 접어들자마자(1월3일),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혁명수비대 사령관을 드론 폭탄으로 제거하면서 북한에 대한 간접 경고장을 날렸다. 솔레이마니는 이란-중국-북한 3국 커넥션의 이란 측 핵심 인물이었다. 이란의 사실상 2인자. 그런 거물을 백주 대낮에 드론으로 제거한 트럼프 정부의 과감성은 북한에게, 트럼프 행정부가 2018년 초에 거론하던 ‘코피 전략(제한적 대북 예방 타격)’의 악몽을 떠올리도록 하기에 충분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역시 주체파의 약탈경제 구상에 대한 직격탄으로 작용했다. ‘잠재적 고객’들이 시장에서 전부 사라져버린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의 진원지인 중국은 1월11일 타이완 선거운동 기간에 우한에서 코로나와 사투를 벌이느라 숨 돌릴 겨를이 없었다. 또 하나의 유력한 잠재 고객인 일본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아예 7~8월 올림픽을 내년으로 연기해버렸다.

북한 내부 사정도 심각해졌다. 코로나 차단을 위해 1월 말부터 국경을 봉쇄했지만 암암리에 번져가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고 알려졌다. 4월10일 개최하기로 했던 최고인민회의가 이틀 뒤인 4월12일로 연기된 것은, 지방에서 올라온 대의원 중 확진자들이 발견되어 급히 격리조치를 시행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국경 봉쇄로 중국과의 밀무역까지 차단되는 바람에 식용유를 비롯한 생필품 가격이 급등하고 있다. 해외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해 개발 중인 원산 갈마지구의 경우 당초 개장일이 지난해 10월10일이었으나 올해 4월15일로 미뤄졌다. 이에 더해 개발용 자재 수입까지 차질을 빚으면서 개장일이 올해 10월10일로 연기되었다. 김정은 위원장이 야심차게 추진해온 평양종합병원의 경우, 진단 시설 등 의료장비를 전부 수입해야 할 판인데 비용만 해도 한화로 1200억~1500억원 정도가 든다고 한다.

북한 당국은 궁여지책으로 ‘돈주(북한 내부에서 비공식적으로 활동하는 사실상의 자본가들)’들에게 대외무역 권한증서인 ‘와크’를 갱신해주며 자금을 조달했다고 한다. 북한에서 무역을 하려면 정부에서 발급한 증서(와크)가 필요하다. 지난 4월부터는 공채(채권)까지 발행해 판매했다. 그러나 한 달 뒤인 5월까지도 공채 물량 중 8%밖에 소화하지 못했다(북한 정부가 100억원을 빌리려고 공채를 발행했는데 결국 8억원밖에 빌리지 못했다는 의미). 또한 북한은 올해도 어김없이 식량 약 90만t을 외부로부터 지원받아야 한다. 이미 평양에도 ‘절량 세대(하루 세끼 공급이 안 되는 세대)’가 등장했으며, 식량을 구하기 위한 주민들의 이동이 시작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난해는 외무성이 나서서 필요한 물량 중 일부를 확보했고, 무엇보다 시진핑 주석이 김 위원장과 정상회담하며 80만t을 지원해서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올해는 이 방법으로 풀기가 쉽지 않다.

ⓒAP Photo2019년 2월2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하노이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2012년 권력의 전면에 등장한 김 위원장은 올해가 집권 8년 차다. 북한은 10년 단위로 업적을 총화한다. 앞으로 2년 남았다. 그런데 이뤄놓은 게 없다. 하노이 회담 실패로 북·미 관계 개선이 불발로 그쳤다. 남북관계도 평양 시민 15만명이 남측 대통령의 연설까지 듣고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를 ‘최고 존엄’이 담보했지만 아직 감감무소식이다.

합의서에 개성공단 및 금강산 관광 재개의 전제(“조건이 마련되는 데 따라”)가 붙어 있다는 사실이 북한에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중요한 것은 ‘최고 존엄’의 위기다. 돌파구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첫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지금의 위기가 ‘최고 존엄’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을 인민들에게 각인시켜야 한다. 희생양이 필요하다. 두 번째, 인민들에게 약속한 평양종합병원과 원산 갈마지구관광단지의 완공(10월10일) 약속을 어떻게든 지켜야 한다. 이를 위한 자금 및 시설 자재 확보가 필요하다. 식량난과 경제난 타개도 시급하다.

대북 전단 살포가 부여한 황금의 기회

6월5일자 북한 통일전선부 대변인 담화에 따르면, 이번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는 갑자기 결정된 일이 아니다. 그 사연을 담화문이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남쪽으로부터의 온갖 도발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고 남측과의 일체 접촉 공간을 완전 격폐하고 없애버리기 위한 결정적 조치들을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숨기지 않는다.” 연락사무소 파괴 등 일련의 조치들이 강행된 직접적 계기는 지난 5월31일 탈북자 단체들이 김정은 위원장을 모욕하는 전단을 살포한 사건이다. 담화문은 그러나 “남측과 접촉 공간을 격폐하기 위한 결정적 조치”를 “오래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라고 솔직하게 고백한다.

현 시점에서 유념할 것은 6월4일 ‘김여정 담화’로부터 시작된 북한의 대남 조치들은 더 큰 구상의 예비단계일 뿐이라는 점이다. 더 큰 구상은 무엇인가. 북한 군부의 주체파들이 올해 초부터 시도하려 했던 ‘동북아 격동 시나리오’의 재가동이다.

그 단초를 지난 5월6일 서훈 국정원장의 국회 정보위 보고에서 찾을 수 있다. 그 직전 발생한 김정은 위원장 건강 이상설을 설명하기 위해 마련된 이 자리에서 서훈 원장은  “함경남도 신포 조선소에서 잠수함 발사 탄도미사일(SLBM)의 수중 사출 장비가 계속 식별되고 있다. (북측의) SLBM 개발 가속화 및 시험발사 가능성이 열려 있다”라고 밝혔다. SLBM 발사는 3000t급 신형 잠수함 건조와 맞닿아 있다. 북한은 세 발의 북극성 3형 SLBM 탑재가 가능한 고래급 잠수함 건조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다탄두를 장착한 신형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 1월1일 전원회의 결정서에서 밝힌 새 전략무기 개발의 실체다. 그렇다면 당시의 결정서에서 제기한 “억제된 발전 대가를 받아낼 충격적 실제 행동으로 넘어갈 것”이라는 내용은 어떻게 되었을까.

공교롭게도 탈북자들의 전단 풍선 도발이 있기 1주일 전인 5월24일, 노동당 중앙군사위 제7기 제4차 확대회의가 열렸다. 김정은 위원장의 지도로 열린 이 회의에서는 “국가무력 발전의 총적 요구에 따라 나라의 핵전쟁 억제력을 더한층 강화하고 전략무력을 고도의 격동 상태에서 운영하기 위한 새로운 방침들이 제시되었고 조선인민군 포병의 화력 타격능력을 결정적으로 높이는 중대한 조치들이 취해졌다”고 한다.

여기서 ‘전략무력을 고도의 격동 상태에서 운영하기 위한 방침’이란, 북한 전략군이 운영하는 핵미사일이나 SLBM을 어느 때나 쏠 수 있도록 대기 상태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비슷한 언급이 리선권 외무상의 6월12일자 담화에도 등장한다. 리선권은 원래 군대 내부의 김영철 인맥으로 분류되어온 인물이다. 김영철이 통일전선부장으로 임명된 무렵 리선권은 조국평화통일위원장 자격으로 남북 고위급회담에서 북측 대표를 맡았다. 즉, 인민군 출신으로 주체파와 선이 닿은 인물이 외무성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리선권의 6·12 담화는 미국을 향한 주체파의 목소리를 그대로 드러냈다. 담화문은 트럼프 정부 들어 북·미 관계의 허상을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비판한다. “제반 사실은 70여 년을 이어오는 미국의 대조선 적대시 정책이 근원적으로 종식되지 않는 한 미국은 앞으로도 우리 국가, 우리 제도, 우리 인민에 대한 장기적 위협으로 남아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을 실증했다.”

‘대북 적대시 정책 종식’이라는 주체파의 핵심 용어가 등장했다. 이와 함께 담화문은 “아무 대가 없이 미국 집권자에게 치적선전감 보따리를 던져주지 않겠다”라는 결의를 과시했다. 5월24일의 당 중앙군사위 제7기 제4차 확대회의를 언급하며 “미국의 위협에 맞서 핵전쟁 억제력을 더욱 강화하며 보다 확실한 힘을 키우겠다”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연합뉴스6월18일 임진강에서 바라본 북한군 초소에 인공기와 최고사령관기가 걸려 있다.

즉, 최근 사태의 배경에는 올해 상반기 가동하려다 중단된 주체파의 동북아 격동 시나리오가 존재한다. 그 주요 수단은 3000t급 신형 잠수함에서 쏘아 올리는 SLBM이나 다탄두 신형 ICBM 등 미국을 겨냥한 전략군의 도발이 될 것이다. 상반기에 시도하려다 그만둔 ‘괌 주변을 둘러싼 포위사격’이 거론될 수도 있다. 김정은 위원장이 5월24일의 당 중앙군사위 회의를 직접 지도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SLBM 등을 활용한 도발 역시 김 위원장이 직접 주도하는 형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도발의 구체적 계기는 어떤 사건이 될까? 타이완 선거, 한·미 연합훈련, 도쿄 올림픽 따위 흘러간 이슈들에 견줄 만한 동북아 차원의 큰 이슈가 필요하다. ‘고객’이 확실한 이슈여야 한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바로 홍콩 사태다. 홍콩의 장래를 결정짓게 될 오는 9월의 입법회의 선거를 앞두고 미국과 중국, 홍콩 주민들, 여기에 영국 정부까지 끼어든 혼전이 예상되고 있다. 중국 전인대는 지난 5월28일 홍콩 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전인대 상무위원회는 8월 말까지 홍콩 보안법의 구체적 법안을 작성한 다음 시행할 것으로 보인다. 이 기간 홍콩은 아시아의 화약고나 다름없다. 국제적으로 수세에 몰려 있는 중국으로서는 우군이 필요하다. 북한의 전략적 도발은 미국의 힘을 분산시킬 제2전선을 만들어낼 수 있다. 미국이 북한을 억제하기 위해 중국의 힘을 빌리는 상황이 되기라도 하면 중국은 지금까지의 수세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북한으로서는 식량난과 경제위기, 10월10일까지의 대형공사 자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큰 도박판이 될 수 있다.

한국은 메인 게임을 위한 인질?

이렇게 큰 그림을 대략 그려놓고 보면, 지금 펼쳐지고 있는 북측 파상적 공세의 의도와 목표를 구체화할 수 있다. 북한 처지에서는 5월31일 탈북자 단체가 ‘최고 존엄’을 모욕하는 전단을 살포한 것은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 된다. 너무나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북한 통전부 대변인이 솔직하게 토로한 것처럼 그전에 마련해둔 “남측과 접촉 공간을 격폐하기 위한 결정적 조치”를 취할 더할 나위 없는 명분이 확보됐다. 이 ‘대남 격폐 조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인물은 두 명이다. 노동당 중앙위 제1부부장인 김여정과 김영철 부위원장.

6월5일자 통전부 대변인 담화는 김여정 부부장에 대해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제1부부장”이라고 친절하게 설명했다. 김여정 부부장이 김정은 위원장과 역할 분담 차원에서 움직인다는 의미다. 즉, 김 위원장은 동북아 차원의 전략군 게임을 주도하고, 김 부부장은 통전부와 총참모부의 지원을 받으며 대남 관계를 담당하는 식이다. 지난 6월4일자 김여정 부부장 담화는 다음과 같다.

“남조선 당국이 이번에 자기 동네에서 동족을 향한 악의에 찬 잡음이 나온 데 대하여 응분의 조처를 따라 세우지 못한다면 그것이 금강산 관광 폐지에 이어 쓸모없이 버림받고 있는 개성공업지구의 완전 철거가 될지, 있어야 시끄럽기밖에 더하지 않은 북남 공동련락사무소 폐쇄가 될지, 있으나마나한 북남 군사합의 파기가 될지 단단히 각오는 해두어야 할 것이다.”

그는 6월13일 담화에서는 네 가지(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연락사무소, 군사합의) 중 “멀지 않아 쓸모없는 북남 공동련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게 될 것”이라며 “대적행동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라고 밝혔다. 그의 담화대로 6월16일에 연락사무소가 폭파됐다. 이어서 그동안 남북 합의로 비무장화했던 지대들에 인민군이 다시 진출하여 요새화하겠다는 내용이 발표됐다. 그 대상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지구, 남북 군사합의로 병력이 철거된 최전방 GOP 등일 터이다. 이들 지역에 대한 군대 재배치엔, 앞으로 계획한 전략적 도발에 앞서 한국을 인질화해서 미국의 군사공격을 차단하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남북관계에 대한 북한의 파괴 행위는 어느 선까지 진행될까? 연락사무소는 북한 지역 내에 있는 건물로 북측에서 볼 땐 남측의 창구 단일화 요구의 상징으로 “있어야 시끄럽기밖에 더하지 않은” 존재가 되어버렸을 수 있다. 비교적 용이하고 북측이 큰 비용 없이 충격을 줄 수 있는 대상이었다. 북한은 서해 해상에서 방사포를 발사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최소한 7월까지는 긴장 상황을 유지하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드 라인’은 존재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금강산의 시설물이나 개성공단의 공장 등은, ‘폐지’나 ‘철거’를 위협할 수 있어도 실제로 손을 대서 훼손하기는 북측에 껄끄러운 대상일 수 있다. 남한 정부의 소유물이 아니라 민간 소유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지금 아무리 폐쇄된 상태라 해도 김정은 위원장이 바라는 북한의 미래는 세계 각국의 민간자본 투자를 유치해 경제개발을 이루는 것이다. 투자 명목으로 들어온 개인의 사유재산을 무단으로 훼손한다면 앞으로 누가 그런 나라에 투자할까? 김정은 위원장이 꿈을 포기해야 하는 사태가 올지도 모른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지난해 1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김영철 부위원장으로부터 워싱턴 방문 결과를 보고받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북측도 대남 조처의 완급을 조절해줄 인물이 필요했다. 그 인물이 바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으로 보인다. 6월9일자 〈조선중앙통신〉은 북한의 ‘단계별 대적사업 계획’을 주도한 인물들을 밝히고 있다. “조선로동당 부위원장 김영철 동지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김여정 동지”다.

조선중앙통신이 김여정에 앞서 김영철을 거명한 의도는 무엇일까? 김영철의 이름이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제1부부장’ 앞에 놓인 것은 지위나 연배 등을 고려해서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굳이 김영철을 거명한 이유가 있다. ‘단계별 대적사업’의 완급 조절을, 북한식 호칭으로 ‘영철 아바이’가 맡고 있다는 점을 친절하게 가르쳐주고 있는 셈이다.

김영철이 누구인가. 바로 2018년 통일전선부장으로 한국의 국정원, 미국 CIA와 더불어 남·북·미 관계를 주도한 주역이다. 싱가포르와 하노이 북·미 회담, 지난해 9·19 남북 공동성명 등이 그의 손을 거쳤다. 그는 하노이 회담 실패로 통전부장 자리를 장금철에게 넘겨줬으나 당 부위원장 직위는 유지했다. 그러던 중 그의 라이벌 격인 리수용 당 국제부장이 지난해 연말 당 전원회의에서 밀려났다. 김영철은 올해 초 직무에 다시 복귀한다.

김영철에겐 두 가지 숙제가 떨어졌을 터이다. 그는 지난해 9·19 공동성명에서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관련 합의를 주도했으나 이행까지 이르진 못했다. 이로 인해 결과적으로 김정은 위원장에게 누를 끼친 것을 김영철은 속죄해야 한다. 그는 앞으로의 대남 협상에서 어떻게든 남쪽의 양보를 끌어내 과거의 ‘실수’를 만회하려 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온갖 냉탕과 온탕이 교차하겠지만 교각살우의 우를 피하면서 어떻게 최대 이익을 뽑아낼지 고민하고 있을 터이다. 그것은 북한 당국을 상대해야 하는 한국의 고민이기도 하다. 큰 그림과 작은 그림을 동시에 보며 대처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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