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uter4월30일 무장한 시위대가 코로나19로 인한 자택 대피령을 풀어달라고 요구하며 미국 미시간주 의회 의사당에 진입했다.

Scene 1. 자유

2020년 4월30일, 미국 미시간주의 수도 랜싱. 1878년 완공된 유서 깊은 주 의회 건물을 총으로 무장한 시민 700여 명이 점거했다. 미시간주는 총기 면허가 있으면 공개 장소에서 총을 휴대해도 합법이어서 이들은 체포되지 않았다. 무장 시위대는 코로나19 감염을 확인하는 발열 검사를 받고 주 의회로 들어갔다. 이들은 주 정부가 코로나19 대응으로 선포한 비상사태와 자택 대피령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레천 휘트머 주지사(민주당)는 “시위대가 마스크를 쓰지 않아 실망스럽다. 많은 사람을 감염 위험에 빠트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미국의 코로나19 방역전은 코로나19 말고도 힘겨운 적과 동시에 싸워야 한다. ‘자유’다. 봉쇄 등 방역정책에 저항하는 미국 시민들은 국가가 사람들의 자유를 제약할 권리가 없다고 믿는다. “My body my choice(내 몸이고, 내 선택이다)”라는 구호가 있다. 원래는 여성들이 자신의 몸과 관련된 문제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는 구호(특히 임신중절 문제에서)인데, 요즘은 의미가 좀 달라졌다. ‘코로나19에 걸릴 위험을 감수할 자유’ ‘방역지침을 따르지 않을 자유’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라는 뜻으로 시위대가 쓴다. 통행금지 도로표지판에 마스크를 합성한 이미지도 단골로 등장한다. 전기차 회사 테슬라 창립자로 유명한 기업인 일론 머스크는 4월29일 자신의 트위터에 대문자로 이렇게 썼다. “FREE AMERICA NOW(이제 자유로운 미국을).” 그리고 물론, 자유를 외치는 시위대의 수호성인 도널드 트럼프가 있다.

태평양 건너 한국인의 눈으로 보면 당황스러운 이야기다. 방역은 나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의 안전이 달린 문제인데, 그걸 훼손할 자유라는 게 말이 될까. ‘내 몸이니까 내 선택’이라고 해버려도 되는 걸까. 꽤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미국의 풍경은 코로나19 재난을 맞이한 한국 사회에도 생각보다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누 파르타넨은 핀란드에서 태어나 미국에 사는 기자이자 작가다. 미국인 남편을 따라 이주한 그녀는 ‘미국식 자유’에 지금 우리가 느끼는 당혹을 한발 먼저 느끼고 미국과 북유럽을 비교하는 책을 썼다. 〈우리는 미래에 조금 먼저 도착했습니다〉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있다. 미국과 북유럽을 비교한다면 자유와 평등 가운데 평등을 예찬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파르타넨은 일관되게 미국식 자유와 북유럽식 자유를 비교해나간다. “미국에서 살수록 나는 점점 더 당황스러웠다. 외부자인 내가 보기에 오늘날 미국인의 삶 전반에 송두리째 빠져 있는 것이 바로 자유와 개인의 독립과 기회다.”

미국은 직업선택의 자유가 흘러넘쳐 보이지만, 사실은 직장에 종속된다. 의료보험과 연금 등 각종 사회보장을 회사가 제공한다. 가족 중에 아픈 사람이라도 있으면 직장을 그만두는 순간 파산할 운명이다. 거주이전의 자유가 광대해 보여도 사실은 발이 묶인다. 육아휴직과 보육 서비스가 취약해서, 아이를 키우려는 사람들은 부모나 친척이 사는 도시를 떠나기 어렵다. 파르타넨이 보는 미국식 자유의 모순은 계속 이어진다. 자유로운 선택이 무한정 가능하지만, 위험에 노출된 개인을 보호하는 장치는 아주 취약하다. 그 결과 개인은 선택의 자유를 앙상하게 손에 쥔 채 회사와 가족에 의존하는 상태로 내몰린다. 북유럽식 자유의 접근법은 정반대다. “북유럽 사회의 목표는 개인을 가족이든 시민사회든 모든 형태의 의존에서 자유롭게 하자는 것이다.” 북유럽 사람들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지독한 개인주의자여서 누구에게든 의존하는 상태를 못 참는다고 그녀는 쓴다. 설사 그게 부모라도 마찬가지다.

ⓒReuter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4월19일 자택 대피령에 반대하는 차량 시위를 의료진이 막고 있다.

개인이 누구에게든 의존적이 되는 이유는 그가 지독히 무능하거나 게을러서만은 아니다. 그보다 훨씬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위험을 감당할 수 없어서 의존적이 된다. 개인이 자기에게 닥칠 위험을 계산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데 삶이 가는 길은 위험투성이다. 사람들은 언제 아플지 모르고, 얼마나 오래 살지 모르고(돈이 충분하지 않으면 장수도 큰 위험이다), 일하다가 언제 다칠지 모르고, 경기변동이나 기술혁신이 언제 내 일자리를 날려버릴지 모르고 살아간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생각하는 자유란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다. 자기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면 그는 자유롭지 않은 것이다. 마스크를 쓰기 싫어도 써야 할 때 자유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방역정책은 자유의 적이다. 북유럽이 생각하는 자유는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다. 자유란 의존이 최소화된 상태다. 위험은 의존을 낳는다. 그러므로 위험이 자유의 적이다. 자유롭고 싶다면 위험을 다루기 위해 뭔가를 해야 한다.

Scene 2. 보험

그런데 어떤 국가도 개인에게 닥치는 위험을 없앨 능력은 없다. 그렇다면 위험을 다룬다는 게 정확히 무슨 말인가. 미히르 데사이는 하버드 경영대학원 금융학 교수다. 그는 책 〈금융의 모험〉에서 찰스 샌더스 퍼스라는 19세기 미국 수학자이자 철학자를 소개한다. 데사이가 보기에 금융의 본질을 가장 정확히 꿰뚫은 사상가인 퍼스는 1869년에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모두 보험회사다.”

퍼스는 확률을 연구했다. 우연과 무작위성을 근본적으로 통제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숙명적으로 위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그는 봤다. 하지만 퍼스는 숙명론과 결별할 돌파구를 연다. 우연과 무작위성은 운명이지만, 전체를 보면 패턴이 드러난다. 내가 몇 살에 죽을지는 근본적으로 알 수 없지만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꽤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이런 걸 ‘큰 수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데사이는 이렇게 쓴다. “무작위성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총체적으로는 예측 가능하다는 퍼스의 인식은 보험과 현대 금융의 토대다.”

고대 지중해는 해상무역이 활발했다. 짐을 잔뜩 실은 배는 무겁다. 수심이 얕은 곳에서는 자주 배가 바닥에 걸려 빠져나오지 못했다. 이럴 때는 일부 화물을 버려서 배를 띄워야 하는데, 누구의 화물이 버려질지는 알 수 없다. ‘당첨’된 화물주는 손해가 너무 크다. 그래서 로도스섬에서는 모든 화물주가 각자 돈을 모아 손해를 메워주는 규칙을 만들었다. 고대에 로도스법으로 불린 이 원리는 현대에도 ‘공동해손’ 원칙으로 살아남아 있다. 이제 위험은 ‘당첨’된 사람을 파멸시키지 않는다. 위험은 계산 가능하고 관리 가능한 무엇이 된다. 위험을 한데 묶어서 골고루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보험의 본질이다.

보험의 원리는 금융을 넘어 사상가들을 열광시켰다. 로널드 드워킨은 20세기를 대표하는 법철학자이자 정치철학자다. 그는 ‘가상적 보험시장’이라는 사고실험을 제안했다. 그는 이것으로 정의로운 조세 수준을 결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원리는 이렇다. 사람들이 위험의 패턴은 알고 있으나 자기가 ‘당첨’될 확률은 모른다. 데사이가 보험의 토대라고 부른 그 상황이다. 내가 가난한 집에 태어날지, 지능이 낮아서 좋은 대학에 가기 어려울지, 유전적으로 암에 취약할지 등 숱한 위험을 개인은 알 수 없다. 여러 위험에 대해 보험을 만든다면 보험료를 어느 수준으로 책정해야 사람들이 가입할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드워킨은 이렇게 쓴다. “나는 이것이 어느 정치공동체에서나 최적 세율을 정하는 데 결정적인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가상적 보험료 총액으로 총세수를 결정한다면, 그것으로 불평등을 시정하는 조세제도를 만들 수 있다.” 이 보험료 수준은 위험에 ‘당첨’된 사람들을 도울 만큼은 충분할 것이다. 위험의 총체적 확률은 미리 알려져 있으므로 그에 맞는 보험료를 책정할 수 있다. 보험료는 누진적일 것이다. 부자들에게는 돈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더 낮으므로, 부자들은 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더 많이 지불할 것이다. 드워킨에 이르면 국가란 일종의 보험기구가 되고, 세금이란 곧 보험료가 된다.

드워킨은 물론 일종의 은유로 가상적 보험시장을 끌어왔다. 하지만 여러 연구자들은 실제로도 현대 자유주의 국가의 핵심 속성이 보험기구라고 본다. 과거에는 위험에 대처하는 보험체제가 기껏해야 친족공동체나 마을공동체였다. 아프면 농사일을 대신 해주고, 일찍 죽은 부모의 아이를 맡아 키워줬다. 물론 친족이나 마을 밖 낯선 사람은 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다. 그는 애초에 위험을 나눠 든 적이 없다. 그래서 전통적인 공동체는 이방인에게 극히 배타적이다. 하지만 현대 자유주의 국가는 위험을 더 넓게 분산시킨다. 저명한 경제학자인 새뮤얼 볼스는 책 〈도덕경제학〉에서 이렇게 썼다. “자유주의 사회는 위험을 줄여준다는 측면에서, 전통적인 가족이나 교구 단위 유대를 대체한다. 그 결과 혈족뿐 아니라 낯선 사람에게도 적용되는 보편적 규범이 진화할 수 있었다.” 그래서 현대국가에 사는 우리는 낯선 사람과도 그럭저럭 계약도 맺고 신용거래도 튼다.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 모두에게 이득이 돌아온다.

보험이 현대국가의 기본 원리라면, 북유럽 복지국가는 그 기본 원리를 극대화한 모델이다. ‘당첨’된 개인이 감당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위험들이 있다. 생계가 곤란할 때까지 장수할 위험, 나나 가족이 병에 걸릴 위험, 경기변동이나 기술변화로 일자리가 사라질 위험, 그리고 일을 하다가 다칠 위험이 그것이다. 선진적인 현대국가들은 이런 위험을 한데 모아 분산시킨다. 그게 사회보험이다. 장수의 위험은 연금이, 질병의 위험은 건강보험이, 실직의 위험은 고용보험이, 산재의 위험은 산재보험이 감당한다. 흔히 4대보험이라고 불린다. 북유럽 복지국가들은 보편적이고 탄탄한 사회보험을 제공함으로써 ‘위험으로부터의 자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다.

ⓒ연합뉴스5월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신도들이 간격을 두고 줄을 서 있다.

사회보험은 전 국민 강제가입이 원칙이다. 아무래도 자유의 원리와 좀 동떨어져 보인다. 왜 그럴까. 보험이 가진 본질적 약점 때문이다. 건강보험 가입을 자율에 맡기면 건강에 자신 있는 젊은 사람은 대부분 가입을 피할 것이고, 병원에 자주 가는 노인들만 대거 가입할 것이다. 이런 걸 ‘역선택’이라고 부른다. 그 결과 건강보험 재정은 파탄이 난다. 보험은 개인차가 있는 위험을 한데 모아서 분산하는 시스템인데, 역선택이 작동하면 고위험군만 쏠리고 저위험군은 빠져나가므로 보험의 원리는 무너진다.

그렇다면 선택은 둘이다. 한쪽에는 강제가입을 자유의 침해라고 보고 개인 선택의 자유와 자기책임 원리를 강조하는 길이 있다. 미국식이다. 위험은 개인이 직접 감수하거나 민간 보험시장에서 알아서 대비할 문제가 된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건강보험 개혁정책 ‘오바마케어’도 이런 논리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또 한쪽에는 ‘위험으로부터의 자유’가 중요하다고 보고, 강제가입을 통해 역선택 문제를 제거하는 길이 있다. 북유럽을 비롯한 주요 복지국가들이 이 길을 갔다. 강제가입의 장점은 또 있다. ‘큰 수의 법칙’ 덕분에 위험의 크기를 더 잘 예측할 수 있다. 자연히 위험을 관리하는 비용도 낮아진다. 강제가입은 선택의 자유를 제약하는 대신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증진한다.

하지만 이 강제가입은 자유의 침해라는 논란을 불러오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곤란한 문제를 일으킨다. 한국의 국민연금을 둘러싼 흥미로운 사례가 있다.

Scene 3. 공정

2018년 12월 보건복지부는 제4차 국민연금 종합운영 계획안을 냈다. 국민연금을 받는 수급자가 일찍 사망했는데 국민연금법이 정하는 유족이 없을 경우, 장례비 명목으로 4촌 이내 친척에게 사망일시금을 준다. 종전에도 조기사망자 유족에게 유족연금을 주었는데, 지원 범위를 더 확대한 셈이다.

당시 〈연합뉴스〉 보도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낸 보험료보다 받은 액수가 훨씬 적기 때문에 괜히 손해 봤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국민연금은 의무가입이어서 내키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이 가입했는데 일찍 죽으면 아무런 혜택도 없다는 불신으로 번질 수 있다.” 이 해설은 국민연금을 보는 가입자들의 마음을 꽤 잘 설명한다. 일찍 죽으면 넣은 돈만큼도 못 받아 손해이니, 강제가입까지 시킨 마당에 국가가 돈을 돌려줘야 공정하다는 감각이다. 복지부의 정책 방향도 그에 호응했다.

“보험의 원리상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연세대 양재진 교수(행정학)는 책 〈복지의 원리〉에서 유족연금과 사망일시금을 놓고 이렇게 잘라 말한다. 사회보장은 ‘원금 보장’이 아니라 ‘위험으로부터의 보장’이다. 보험 가입자는 자기 수명을 놓고 도박을 한 사람이 아니라,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산 사람이다. 연금의 경우 ‘경제력 없이 장수할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사는 셈이다. 따라서 그는 언제 사망하든 보험의 가치를 돌려받았다. 이 가치를 빼놓고 돌려받은 돈만 계산하는 것은 보험의 기본 원리를 무시하는 셈법이다.

하지만 보험의 원리야 어쨌거나 여전히 우리는 ‘기여한 만큼은 받아가야 한다’라는 원리에 더 끌린다. 이편이 명백히 더 공정해 보여서다. 심지어 강제가입을 당했으니 더 그렇다. 앞서 본 〈연합뉴스〉 기사의 제목은 ‘국민연금 받다 일찍 숨져도 손해 안 본다’였다. ‘손해’라는 단어가 의미심장하다. ‘기여한 만큼 받아간다’ 원리는 우리 마음이 무언가를 공정하다고 판단할 때 대단히 강력한 기준이다(〈시사IN〉 제546호 ‘문재인 정부를 흔든 공정의 역습’ 기사). 공정의 직관을 끝까지 밀어붙이면 미국식 자기책임의 원리와 만난다. 자기책임의 원리는 ‘기여한 만큼 받아간다’의 가장 순수한 형태에 가깝다. 공정의 직관은 사회보험의 원리에 맞서는 꽤 까다로운 도전이다. 선진 복지국가들은 이를 어떻게 뛰어넘었을까.

ⓒ연합뉴스1998년 1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외환위기 타개를 위한 금모으기 행사가 벌어졌다.

Scene 4. 연대

재난은 사람들이 연대하게도 만들고 각자도생으로 빠지게도 만든다. 이 갈림길 자체가 재난 국면의 정치적 본질인 것 같다. 1997년 외환위기는 연대의 시대를 남길 수도 있었다. ‘금 모으기 운동’은 극적인 사례다. 그러나 외환위기 재난에서 한국 사회는 실직과 탈락의 위험에 ‘당첨’된 사람들을 내버려뒀다.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짐을 버렸는데, 버린 짐 값을 십시일반 모아주는 로도스법은 작동하지 않았다. 이 경험은 결국 각자도생의 시대를 남겼다. 한국은 사반세기동안 이때 잘못 들어선 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 재난 국면에서 이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합의는 폭넓다. 연대가 답이라는 데는 대부분 동의한다. 그러나 연대는 보기보다 복잡한 키워드다.

유럽에서 연대는 원래 ‘연대보증’ 등을 뜻하는 법률 용어였다. 그러던 것이 프랑스혁명의 ‘형제애’, 이어진 노동운동 전성기의 ‘노동자 연대’ 등으로 거듭 개념이 확장됐다. 레옹 부르주아는 1851년에 태어나 1925년에 사망한 프랑스 사상가이자, 수상까지 지낸 정치가다. 국제연합의 전신인 국제연맹을 제안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연대라는 개념을 독자적인 사상으로 끌어올렸다. 개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결이 치열하던 시절에, 부르주아는 연대를 둘의 절충이 아니라 종합으로 제시했다. 둘 사이의 어딘가에 점을 찍는 게 아니라, 제3의 꼭짓점을 찍으려 했다.  

부르주아는 인간이 혼자서는 스스로의 안녕을 보살필 수 없고, 모든 인간은 다른 사람들과의 결합에 기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폐결핵이 유행하는 상황을 예로 든다. 다른 사람과 만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지만 누가 보균자인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각자가 다른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다. 코로나19 유행기를 사는 우리는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접촉을 늘리면 감염병이 돌고 접촉을 끊으면 경제가 죽는 진퇴양난에서, 유일한 활로는 외출을 자제하고 손을 씻고 마스크를 쓰고 2m 간격을 지키는 일련의 행동이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남을 보호하는 행동이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나를 보호해줄 거라고 믿는 행동이다. 부르주아는 이렇게 썼다. “우리는 사회적 도덕의 기초를 발견했다. 나의 고유한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지킬 의무를 지는 것이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을 향한 의무를 다할 때에만 나의 자유를 지킬 수 있다. 이제 연대는 자유로 가는 길이 된다.

연대는 동료 시민들을 서로 돕는 일이지만, 자선과는 거의 정반대일 만큼 다르다. 자선이 시혜적이라면, 연대는 상호 의무로 묶인 관계다. 자선이 누군가의 불행을 안타깝게 여기는 접근이라면, 연대는 위험을 분산시키는 공동의 노력이다. 그래서 보험은 연대의 한 종류다.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대응하는 연대를 제도화하면, 그게 보험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역사가 프랑수아 에월드는 “연대의 이념은 구호사업이 아니라 보험의 경제학에 속한다”라고 했다. 부르주아가 주창한 ‘상호 의무의 거미줄’은 이 장면에서 보험이라는 제도적 실체를 얻는다. 강제가입은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인가? 연대의 문화가 자리 잡은 공동체에서는, 그렇지 않다. 연대는 상호 의무의 거미줄로 서로를 묶어서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를 확보하려는 공동의 노력이다. 여기에서 국가는 보험 가입을 강제하는 권력이 아니라, 그저 연대의 원리를 집행하는 행정 서비스 제공자에 더 가까워진다.

ⓒ연합뉴스5월10일 코로나19 방역체계가 ‘생활 속 거리두기’로 바뀐 후 한강공원에서 시민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코로나19 유행 이후 정치권에서는 전 국민 고용보험 논의가 한창이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등 노동단체들도 전향적으로 논의에 참여한다. 대기업 정규직 처지에서는 전 국민 고용보험 도입이 유리하지만은 않다. 이들은 해고당할 위험이 매우 낮은데, 전 국민 고용보험이 도입되면 보험료를 더 많이 낼 가능성이 높다. 마치 병원 갈 일 없는 건강한 젊은이가 건강보험료를 더 내라고 요구받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이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대 노총의 주력이다. 따라서 ‘기여한 만큼 받아간다’라는 공정의 직관으로 보면 전 국민 고용보험은 이들에게 불공정한 변화다. 하지만 위험을 나눠 든다는 연대의 원리로 보면 이 변화에 동참하게 된다. 양대 노총이 전 국민 고용보험 논의에 전향적인 것은 연대의 원리가 작동하는 사례다.

사회보험은 연대의 특수한 형태다. 그리고 연대는 사회보험이 논리적·실천적 난점을 뛰어넘도록 해주는 힘이다. 공정의 직관이 내놓는 문제제기에 선진 복지국가들이 내놓는 대답도 연대의 원리였다. 옌뉘 안데르손은 스웨덴 사회민주당의 이데올로기를 연구하는 스웨덴 출신 연구자다. 책 〈경제성장과 사회보장 사이에서〉에서 그녀는 1950년대 스웨덴 사민당의 이념을 이렇게 요약한다. “경제가 급속히 변화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해방은 사회안전망에 전적으로 좌우된다. 사회안전망이 있을 때에만 모든 사람의, 특히 변화에 취약한 사람의 선택의 자유, 인생의 기회, 잠재적 역량이 비로소 보장된다. 한 사람의 자유는 모든 이들의 연대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북유럽의 이 지독한 개인주의자들은 자유롭고 싶어서 연대를 택했다.

Scene 5. 모두를 위한 자유

5월18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최고 의결기관인 세계보건총회를 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초청 연설자로 선정돼 화상 연설을 했다. 연설 제목은 ‘모두를 위한 자유’였다.

“한국 국민은 담대한 선택을 했습니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유’를 ‘모두를 위한 자유’로 확장시켰습니다. 나의 안전을 위해 이웃의 안전을 먼저 지켰습니다.”

“정보를 공유하고 함께 협력하는 힘은 바이러스가 갖지 못한 인류만의 힘입니다. 코로나19는 인류 공동의 가치인 자유의 정신까지 위협하지만, 자유의 정신에 기반한 연대와 협력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모두가 코로나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도록 함께 협력해야 합니다.”

연설에서 대통령은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외치는 미국식 자유와 분명히 결별한다. 직접 표현하지는 않지만, 미국식 자유는 사실상 ‘나를 위한 자유’로 규정된다. 이제 자유는 고립된 개인들의 권리가 아니라, 상호 의무로 묶인 시민들이 만들어가는 일종의 공공재에 더 가까워진다.

‘위험으로부터의 자유’는 위험을 한데 모아 고루 나눠질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속성상 ‘모두를 위한 자유’일 수밖에 없다. “나의 안전을 위해 이웃의 안전을 먼저 지켰습니다.” 이 표현은 레옹 부르주아의 연대 이론에서 곧바로 건져 올린 문장처럼 읽힌다. 연설문의 주제를 한 줄로 요약하려면 옌뉘 안데르손이 스웨덴 사민당의 이념을 묘사한 이 문장이 어울린다. “한 사람의 자유는 모든 이들의 연대에 달려 있다.”

이 연설문이 어떻게 나왔는지 신동호 청와대 연설비서관에게 물었다. “대통령의 일관된 관심사가 상생과 연대다. 대통령은 ‘광주형 일자리’로 대표되는 상생형 일자리에, 밖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관심이 많다. 이게 일자리 정책이기도 하지만, 대통령은 노사 상생과 연대의 모델을 만들어내고 싶어 한다. 처음에는 관 주도로 하지만 이후로는 상생과 연대가 문화로 자리 잡아야 희망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대통령은 연대와 상생의 철학을 국제사회에 말하는 방식으로 ‘모두를 위한 자유’를 선택했다.”

ⓒ청와대제공문재인 대통령이 5월18일 세계보건총회 초청 연설을 하고 있다.

5월10일에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3주년 연설을 한다. 그런데 이 연설에 “전 국민 고용보험 시대의 기초를 놓겠습니다”라는 말이 들어간다. 이게 여권에서 조용한 파장을 일으켰다. 5월10일 이전 상황을 보면,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이 ‘전 국민 고용보험’ 의제를 던졌다가 기획재정부와 여당이 속도조절에 들어가면서 의제에서 탈락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걸 대통령이 연설에서 다시 살려낸 것이다. 코로나19 이후 정책의제가 경기부양 일변도(‘뉴딜’이라는 표현은 그런 착시를 주기 쉽다)로 흐르지 않도록 제동을 걸었다. 더 분명한 표현은 6월9일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나왔다.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습니다. 위기를 불평등을 줄이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상생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위기 극복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판 뉴딜의 궁극적인 목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한국판 뉴딜을 경기부양이나 성장동력 발굴을 넘어 사회 재계약 프로젝트로 분명히 규정한 중요한 장면이다.

재난은 속성상 매우 특별하고 압축적인 정치의 공간을 연다. 코로나19는 이 위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라는 비교적 단순한 질문으로 출발하지만, 놀랍도록 풍부하고 복잡한 정치의 질문들을 쏟아낸다. 이 위험의 속성이 무엇인가, 위험을 어떻게 다뤄야 할 것인가, 위험에 ‘당첨’된 사람들을 사회는 어떻게 대할 것인가. 하나하나가 정치의 본령에 닿아 있는 질문이다.

코로나19의 경험은 한국의 진보주의에 낯선 언어를 공급하고 있다. 한국의 진보파들에게 익숙한 단어는 주로 평등과 분배와 복지였다. 자유는 보수의 언어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재난을 겪으면서 일련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코로나19라는 보편적인 위험은, 위험관리가 자유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낯설던 접근법을 직관적으로 납득시켰다. 위험관리의 핵심 아이디어는 보험의 원리에 뿌리를 둔다. 보편적 위험의 시대에 보편적 사회보험의 원리도 보다 친숙해졌다. 정치권에서 전 국민 고용보험 논의가 활발해도 “사회주의 발상”이라는 반발은 별로 들리지 않는다. 이 역시 큰 변화다. 보험은 위험을 더 많이 한데 묶어낼수록 더 잘 작동한다. 연대는 동료 시민들을 상호 의무의 사슬로 묶어내는 원리다. 한국 정치에서 사실상 의미 있는 취급을 받지 못했던 이 단어는 코로나19 위기 이후 빠르게 시민권을 얻고 있다. 이제 복지국가는 자선이나 빈민 구제가 아니라, 연대와 보험의 원리를 바탕으로 하는 자유의 확장 프로젝트로, 본뜻에 더 가깝게 이해된다. 그리고 대통령은 일련의 과정에서 도출되는 결론을 ‘모두를 위한 자유’로 정식화해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진보주의자들의 가치 목록이 재구성되고 있다. 재난이 열어주는 정치의 공간에서, 도구상자에 새로 추가된 가치들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는 대단히 중요한 질문이다. 외환위기가 남긴 각자도생의 교훈이 이후 한 세대를 지배했듯, 코로나19 재난이 남긴 교훈도 이후 오랫동안 한국 사회를 규정할지 모른다. 돌이켜보면 외환위기도 재난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고양된 연대로 출발했지만, 결국 싸늘한 각자도생으로 귀결됐다. 코로나19 재난에서도 우리는 좋은 출발을 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고양된 감정이 식어가고 경제위기가 취약계층만 골라 때리는 상황이 오면, 다시 외환위기 때의 실패를 반복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지금까지 〈시사IN〉은 KBS와 공동기획으로 ‘코로나19 시대’를 3회에 걸쳐 탐구했다. 이제는 드물게 열린 정치의 공간에서 정치가들이 던지는 의제를 직접 만나볼 차례다. 〈시사IN〉은 다음 호부터, 코로나19 시대의 사회계약을 고민하는 정치가들에게 듣는 ‘진짜 뉴딜’ 시리즈를 연재한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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