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4월30일. 제33회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준결승전. 덕수정보고등학교 3학년 안향미가 마운드에 올랐다. 세 번째 던진 공이 타자 몸에 닿아 출루를 허용했다. 한 타자만 상대하고 곧바로 투수 교체. 다음 날 신문 헤드라인은 이랬다. “앗! 마운드에 여자가 나왔잖아.”

‘1905년 국내에 야구가 도입된 이래 전국 공식 경기에 여고생이 마운드에 오른 것은 처음 있는 사건(?)’이라고 기사는 말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불펜에서 몸을 풀었지만 막상 마운드에 오르니 담담했다’는 안은 3구로 끝낸 첫 등판을 못내 아쉬워했다(〈중앙일보〉 1999년 5월1일).”

영화 〈야구소녀〉의 주인공 주수인 (이주영)도 야구를 한다. 어릴 때 야구를 좋아했고 크면서 더 좋아했으며 고등학교 3학년인 지금은 야구 말고 좋아하는 게 없다. 포지션은 투수. 꿈은 프로선수. 고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집에는 스크랩해 둔 신문기사가 펼쳐져 있다. “20년 만에 여자 고교야구 선수 탄생.”

주수인보다 먼저 야구를 좋아한 ‘20년 전 여자 고교야구 선수’가 바로 안향미다. ‘야구하는 소녀’ 이야기로 장편 데뷔작을 준비하던 감독은 자연스럽게 안향미 선수를 모티브로 시나리오를 썼다. 여자 야구선수가 공식 경기 마운드에 오른 ‘처음 있는 사건’이, ‘처음이자 마지막 사건’으로 남아버린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계속 썼다. “관객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주수인’을 응원해주길” 기원하며 영화를 완성했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소리치는 천상의 스포츠 영화가 아니다. ‘꿈은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이루어야 하는 것’임을 깨닫는 지상의 성장영화다. ‘하면 된다’는 자기 확신에 찬 주인공이 아니다. ‘안 해도 된다’는 주변의 속삭임에 종종 흔들리는 주인공이다. 그래도 꿋꿋하게, 끝까지 당돌하게, 세상이 정해놓은 삶의 스트라이크존을 악착같이 제 힘으로 넓혀가는 주수인이다. 그리하여 “주수인 파이팅!” 영화의 어떤 장면에서 울려 퍼진 이 단순한 외침에, 결국 코끝이 찡해지고야 마는 이야기다.

세상이 정한 스트라이크존을 넓혀가다

안향미를 받아주는 대학 팀은 없었다. 프로구단도 외면했다. 우리가 내친 ‘야구소녀’를 해외 구단이 탐냈다. 2012년 그의 근황을 전하는 신문기사의 헤드라인은 이랬다. “한국 여자 야구선수 1호 ‘호주서도 펄펄’. 팀 내 타격 1위. 지역대표 뽑혀 전국대회 출전(〈한겨레〉 2012년 2월23일).”

자, 그럼 영화 속 주수인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계속 야구를 할 수 있을까? 여자가? 한국에서? 커다란 물음표를 들고 타석에 선 관객을 향해 수인은 이 한마디를 힘껏 던진다.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 이렇게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여성 서사가 경쾌한 궤적으로 내 마음의 스트라이크존에 꽂혔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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