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미래통합당의 중진 중 중진인 김무성 전 의원이 최근 “나는 이제 보수도 우파도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같은 당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보수, 자유우파 타령 말라”고 했다. 미래통합당 일각과 보수 유튜버(라고 쓰지만 ‘가짜뉴스 메이커’라고 읽는다) 사이에선 ‘보수가 뿌리째 무너진다’라며 아우성이 터진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무너질 보수주의(conservatism)라는 것이 있긴 했나? 상당수의 중요한 용어들이 그러하듯 보수주의 역시 명확하게 정의하기 힘든 개념이다. ‘전통적으로 확립된 관습과 제도에 대한 존중’ ‘급진주의가 아니라 점진적 변화 선호’ ‘개인주의’ ‘경제적 자유주의’ 같은 요소들을 느슨하게 묶은 덩어리쯤으로 보인다. 각 요소들끼리 서로 격렬하게 충돌(예컨대 ‘전통 존중’과 ‘개인주의’)하기도 한다. 보수주의는 일관된 체계의 이념이 아니다.

이처럼 보수주의를 모호하고 넓게 규정하더라도 한국에 그런 흐름이 실제로 있(었)는지에 대해 나는 극히 회의적이다. 지금의 한국은 정치·경제·문화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지만 미국, 유럽, 심지어 일본과도 크게 다른 점이 있다. 한국은 근대의 승리자로 출발한 나라가 아니다. 식민지 출신 국가다. 해방 이후, 과거에 대한 자기부정을 거듭했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시가지 풍경은, 근대 초기와 심지어 수세기 전의 건축물까지 자랑스럽게 보존·활용하는 서방 선진국들과 달리 새로 건설한 아파트와 고층빌딩으로 빽빽하다. 이전의 풍경뿐 아니라 전통적 관습과 제도, 인간관계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던 급진적 변화의 결과가 바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다. 존중할 전통을 갖지 못한 나라에서 보수주의가 꽃필 수 있었을까. 한국에서 전통의 파괴와 급진적 변혁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 중 하나는, 자칭 보수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지금 젊은 보수를 자처하는 ‘일베’나 ‘가짜뉴스 유튜버’들은 오히려 전통적 관습과 사회적 금기들을 비웃는다. 학살된 광주 시민들, 천안함과 세월호 유족, n번방 피해자들을 조롱하며 즐거워한다. 보수보다는 무정부주의적 반항아에 가깝다. 나이 지긋한 ‘태극기 부대’의 이승만·박정희 숭배는 그들의 업적보다는 민간인 학살과 인권탄압 옹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한국에서 ‘보수주의로 불리는 흐름’은 ‘전통’ ‘점진적 변화’ ‘자유시장과 개인’ 따위의 긍정적 가치들과는 사실상 무관해 보인다. 북한과 호남, 자유주의 세력에 대한 무한대의 악의와 혐오에 보수주의란 이름을 붙인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종인 위원장은 한국엔 존재하지 않는 보수주의에 대해 ‘존재하지 않는다’고 솔직히 말했을 뿐이다. 보수(保守)를 보수(補修)하겠다고? 보수(補修)할 보수(保守)가 당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기자명 이종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