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6월3일 오전 경기도 이천 서희청소년센터에 차려진 분향소에서 발주사인 한익스프레스 직원들이 헌화하고 있다. 사고가 난 지 36일 만의 첫 조문이다.

홀로 맞는 첫 번째 결혼기념일이었다. 남편과 함께 3박4일 동안 시가와 친정을 돌며 감사 인사를 드리려던 계획은 무용지물이 됐다. 4월29일 이천시 모가면 한익스프레스 냉동 물류창고에서 화재로 남편을 잃은 박 아무개씨(42·〈시사IN〉 제662호 ‘살았어야 할 사람들의 목소리만 남았다’ 기사 참조)는 세상을 떠난 남편의 영정을 품고 절을 찾았다. 결혼기념일인 5월19일 첫 제사를 지냈다.

사고가 난 지 3주째였다. 진상규명도, 책임자 처벌도, 재발 방지 약속도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아직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지만 박씨는 남편에게 따뜻한 밥이라도 한번 먹이고 싶었다. 차려진 상 앞에서 박씨는 통곡했다. “처음 절을 올릴 때 진짜 많이 울었어요. 신랑에게 이렇게 절을 올릴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으니까.”

열흘 뒤인 5월29일은 사고가 난 지 꼭 한 달 되는 날이었다. 박씨를 포함한 유족들은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기 위해 상경했다. 버스 한 대로는 부족했다. 분향소에서 출발한 유족만 70명이 넘었다. 청와대 앞은 처음 가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청와대 분수대 앞에서 내린 유족들은 목에 영정을 걸었다. 사진 속 38명의 시선이 청와대를 향했다.

유족 대표 박종필씨가 기자회견문을 읽었다. 유족들이 며칠 동안 고심해서 쓰고 다듬은 글이었다. 기자회견문을 써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였습니다. 노동자는 산재로 유명을 달리하면 무엇이 남나요? (…) 많은 분들이 찾아오셨습니다만, 돌아가신 후 약속하신 것들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씀해주신 분은 한 분도 없습니다. 고용노동부 장관을 비롯한 행정 책임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책임의 한계를 말하고, 정치인들은 무엇을 하겠다는 분명한 답이 없이 두루뭉술한 화법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책임지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고가 난 뒤 분향소에는 정세균 국무총리, 노영민 대통령비서실장,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을 비롯해 도지사, 여야 대표, 국회의원들이 앞다투어 찾아왔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유족이 느끼는 막막함은 한 달 전보다 오히려 더 커졌다. 여러 부처가 4차례나 합동 감식에 들어갔지만 아직까지 화재 원인에 대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수사 내용은 둘째 치고 수사가 얼마나 진행됐는지만이라도 알려달라는 유족들의 요청에 대해 경찰은 번번이 ‘알려줄 수 없다’고 답했다. 경기남부경찰청은 기자의 연락에도 수사 상황이라 말해줄 수 없다고 답했다.

시공을 주문했던 발주사 한익스프레스는 ‘도의적 책임은 지겠지만 수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법적책임은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사고 전 매주 수요일 오후 2시마다 한익스프레스 관계자가 공정회의에 참석해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 지시하는 등 공정에 관여했지만 안전관리는 감리사 ‘전인CM’에, 건설은 시공사 ‘건우’에 맡겼으니 본사는 공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몰랐다는 주장이다.

유족들은 서울 서초구에 있는 한익스프레스 본사 사무실에도 다녀왔다. “경영실로 가려는데 저희는 거기가 어딘 줄 모르잖아요. 4층이라고 해서 그 앞에 국화를 놓고 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까 거기는 직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이고, 경영실은 3층이더라고요. 속은 거죠.” 박씨가 말했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

청와대에서 한익스프레스 본사로, 화재 현장으로 이어지는 일정이 끝난 뒤 박씨는 한 달 만에 논산 집에 들렀다. 신혼집에서 처음 맞는 여름이었다. 혼자 마주하는 마당 풍경이 낯설었다.

방에 들어선 박씨는 남편의 잠옷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이게 왜 개어져 있지? 신랑이 왔다 갔나? 순간 나도 모르게 그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러고는 또 혼자 아니야, 아니지.” 사고 당일 집을 나서기 전 박씨가 차려놓은 저녁상을 정리하기 위해 잠깐 집에 들렀던 박씨의 어머니가 개어놓은 잠옷이었다. 그는 남편의 잠옷 옆에 누워서 한 달 만에 처음으로 3시간 동안 내리 잠을 잤다. 집에 들른 박씨는 곧장 분향소로 돌아올 계획이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남편은 세상을 떠났어도 공사 현장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 남편에게 들어왔던 다른 하청 일감들을 정리해야 했다. 평소 품앗이를 주고받던 친한 동료들을 서로 소개하고 연결해주었다. 고인이 된 남편의 일을 정리하고 나니 어떻게 생계를 유지해야 할지 막막해졌다.

앞으로의 생계는 박씨만의 고민이 아니다. 다른 유족도 마찬가지다. 사고가 난 직후는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이어지는 ‘황금연휴’였기 때문에 친지들도 곁을 지킬 수 있었지만 한 달이 지난 지금까지 분향소에 머무르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부양해야 할 자녀가 있거나 거동이 불편한 부모가 있어서 직장이나 집, 분향소를 오가며 ‘출퇴근’하는 유족도 있다. 대부분 이천이 연고지가 아니기 때문에 이마저도 힘든 경우가 많다.

한 유족은 6월2일 분향소를 찾은 미래통합당 정책위원회 의원들을 향해 “하루도 제대로 울어본 적이 없다. 애도해야 할 시간에 이리 뛰어다니고 저리 뛰어다니고 있다. 생계도 포기했다”라고 호소했다. 다른 유족은 “남편이 없어도 자식은 키워야 하지 않느냐. 우리에게 이거(서류) 준비해라 저거 준비해라 하지만 말고 정치하시는 분들은 정치로 빨리 풀어주시고, 근로복지공단은 공단대로, 시는 시대로 적극 도와달라”고 말했다. 송석준 정책위 부의장이 “빨리 일상생활로 돌아가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대답하자 박씨가 말했다. “저희는 일상생활로 돌아갈 수 없어요. 다시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런 사람들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발주사 한익스프레스는 사고 36일 만에 처음으로 공식 조문을 했다. 6월3일 오전 10시 분향소를 찾은 한익스프레스 관계자는 빠르게 조문을 마치고 빠져나갔다.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감정이 격해질 것을 우려한 유족들은 분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한익스프레스 관계자와 유족 대표단이 배·보상과 관련된 면담을 진행하는 것으로 의견을 모았다.

한익스프레스 관계자가 떠난 뒤에도 유족들은 끊임없이 한두 명씩 제단 앞을 찾아와 흰 국화를 올리고 향을 피웠다. 재단에는 어버이날에 아이들이 색종이로 접어 올린 붉은 카네이션이 군데군데 놓여 있었다. 한 달 전 분향소를 마련할 때 장식했던 꽃들은 잿빛이었다. 대통령이 보낸 조화도, 국무총리와 여야 대표가 보낸 조화도 모두 시들어 있었다. 유족들은 시든 국화꽃 무덤 앞에서 영정과 눈을 마주치며 한참 동안 서 있었다. 사고에 책임 있는 자들 대신 유족만 남아 오랫동안 헌화했다.

기자명 이천·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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