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씨가 5월25일 대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내가 1990년대 후반 대구의 ‘정신대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시민모임)’ 초기부터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만난 이용수씨, 그 후 일본에서 그의 증언을 통역하면서 다시 만난 이용수씨, 그리고 2020년 5월 기자회견장의 이용수씨를 헤아려본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30년 세월은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와 연대해온 아시아 및 세계의 여성인권과 평화운동의 역사이다. 현재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정부에 제시된 요구안은 8개국의 피해자와 운동단체, 지원자와 전문가들이 만든 방침이다. 1992년 8월 서울에서 정대협의 제안에 동의한 필리핀·타이완·타이·홍콩·일본의 여성단체 활동가들과 한국의 피해자들이 만났다.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아시아연대회의)’의 출발이었다. 1995년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여성대회에 각국에서 4만명 이상의 대표단들이 참석해 전 세계에 ‘위안부’ 문제를 제기했다. 베이징 대회는 전쟁 중 성폭력을 전쟁범죄로 규정했다. 이때부터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좀 더 강력하게 법적 해결 방안을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이후 아시아연대회의는 2018년 3월 제15차까지 이어졌다.

또한 1998년 아시아연대회의 5차 회의에서 일본의 여성운동가 고 마쓰이 야요리 씨가 ‘가해국의 여성으로서 가해국의 책임을 지고 싶다’며 제안한 ‘2000년 일본군성노예전범 국제여성법정(여성국제법정)’이 2000년 12월8일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이 법정에서는 일본에서 여전히 ‘신성화되어 있는 천황’을 전범으로 심판했다. 여성국제법정 이후 ‘위안부’ 문제 해결 운동은 유엔과 국제 인권조약기구의 각종 권고를 이끌어냈다. 2007년 미국 하원 등 세계 각국 의회에서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공식 사죄할 것과 이 문제를 현세대와 미래세대에게 교육할 것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이렇게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연대 운동은 김학순으로부터 시작해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드러낸 각국의 피해자와 그들과 연대해온 시민들 모두가 ‘당사자’로서 함께 일궈온 운동이다. 이용수씨도 그분들 중 한 명이다.

ⓒ노부카와 마쓰코 제공1996년 일본 나고야의 한 고교에서 증언을 듣고 울먹이는 학생을 이용수씨가 안아주고 있다.

‘토착 왜구’ ‘반일’ 난무하는 수요집회

30년 역사와 함께 각국의 ‘위안부’ 운동은 ‘일본 남성’이 ‘우리 민족의 딸’을 ‘유린’했다는 차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의 일각에서는 ‘위안부’ 문제를 그저 한·일 간의 문제로만 인식하고 있다. 1991년 12월6일 김학순 등 ‘위안부’ 생존자 9명이 제기한 소송을 시작으로 2001년 중국 해남도(하이난) 재판까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소송 10건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2010년 3월 해남도 마지막 판결까지 18년에 걸친 ‘위안부’ 관련 재판은 모두 패소로 끝났다. 비록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총 9개 지역 93명의 원고가 벌인 재판 투쟁은 일본 사법부가 인정한 피해 사실(일본군에 의한 납치, 강제연행, 감금, 장기간에 걸친 강간 등의 성폭력)과 관련 자료, 그리고 생존자들의 진술이라는 소중한 자산을 남겼다. 이 자산을 공유해온 국제연대 운동 속에 지금까지 어느 누가 감히 ‘자기 민족의 희생’만을 말했던가.

정대협은 2013년부터 매년 베트남으로 나비평화기행을 떠난다. 참가자들은 한국군 범죄가 자행된 마을을 찾아 증오비와 추모비 앞에서 사죄, 헌화하고 성폭력 피해자들을 만난다. 정대협이 세운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은 베트남전쟁 때 한국군에게 성폭력을 당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전시했다. 그리고 시민모임이 2015년에 문을 연 ‘희움 일본군 ‘위안부’ 역사관(역사관)’의 개관 기획전은 대구 지역 피해자들과 일본 시민들 사이의 인연을 그린 〈해방 70년, 한·일 시민들이 함께 만들어온 평화 이야기〉였다. 또한 시민모임은 2016년 동티모르 생존 피해자 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이어 2017년에는 〈아시아의 일본군 성노예 생존자들, 동티모르〉 기획 전시를 열면서 현지를 방문해, 인권단체 HAK Association (학 어소시에이션)과 함께 ‘동티모르 생존자 지원사업을 위한 업무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피해자들의 상처를 기록하고 교육하는 두 단체가 후원금과 수익금 중 일부를, 우리의 가해 역사를 돌아보고 아시아 일본군 피해 생존자 지원사업 및 전시에 사용하는 것은 한국 ‘위안부’ 운동의 성장인 동시에 ‘당사자’ 운동의 확장이다.

이런 성장과 확장의 길 위에서 정대협의 주도로 수요집회가 열렸다. 이용수씨는 열정적으로 수요집회에 참석했다. 그러나 2015년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 이후 평화의 비 ‘소녀상’ 앞에서 열리는 수요집회는 ‘반일’ ‘토착 왜구’ ‘극일’ 같은 말들이 난무하는 ‘주전장’이 되어버렸다. 그런 상황이 이용수씨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그는 수요집회에 나와 구호를 외치는 아이들과 ‘소녀상’ 옆에 천막을 치고 밤을 새우는 청년들에게, 지난 30년 동안 수십 차례 일본에서 증언을 하며 만난 일본 학생들을 겹쳐보면서, 한·일 간 연대의 교육만이 이 상황을 풀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노파심을 공허하다고 비판할 수는 없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돈이 피해자에게 쓰였느냐 아니냐로 ‘돈’ 문제를 재단하는 것은 시민단체를 문제 해결의 당사자가 아니라 단순한 복지단체로만 간주하는 것이다. 동시에 피해자들을 ‘도와드려야 하는 불쌍한 할머니’라는 전형적인 피해자 모습의 틀에 가두는 생각이다. 정의연을 단순한 복지단체로 오해하는 것도 어처구니가 없지만 피해자들을 수동적인 수혜자로만 취급해서도 안 된다. 이용수씨는 정의연뿐 아니라 그와 오래 함께한 시민모임도 비난했다. 왜 그랬을까.

이용수씨가 염원했던 운동은, ‘현 생존자 군대 ‘위안부’ 피해자 대책협의회(피해자회)’ 같은 피해 당사자 단체가 주도하고 지원단체들은 옆에서 지원만 하는 방식이었을 터이다. 이 피해자회는 정대협과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에 가입해 활동하던 ‘위안부’ 피해자들이 1993년 11월 독립해 만든 단체로, 이용수씨가 부회장이었다. 이 모임의 생존자 15명과 가족들은 일본 정부와 직접 교섭하기 위해 1994년 5월24일 일본을 방문해 6월3일까지 11일간 머물렀다. 이들은 일본 정부와 ‘천황’에게 직접 나와 사죄하고 협상에 응하라고 요구했다. 피해자회는 한국 정부가 피해자 생활을 지원하게 되고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국민기금)’의 등장과 함께 여러 사정으로 단체 유지가 어려워져 3년여의 활동 끝에 해산했다. 이용수씨는 1994년부터 국민기금(일본 정부가 모금을 통해 마련한 ‘보상금’)을 거부하고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와 배상, 재발 방지라는 목표를 향해 거의 매년 여러 차례 일본에서 증언 집회를 했다. 1997년 말 시민모임이 정식 발족되기 전에는 물론이고, 그 이후도 일본에서 맺은 인연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시사IN〉 제581호 ‘이용수씨의 동지들에 감사를 전하며’ 참조). 이 피해자회 운동의 좌절이 이용수씨 마음에 아쉬움으로 남았을 것이다.

ⓒ연합뉴스2015년 12월29일 정대협 쉼터를 임성남 외교부 1차관(오른쪽)이 이용수씨에게 호통을 듣고 있다.

1997년 만들어진 시민모임은 이용수씨를 비롯한 대구·경북 지역 피해자와 함께 활동을 펼쳐왔다. 2015년에는 꽃누름 활동으로 작품을 남긴 두 피해자의 작품을 브랜드화한 ‘희움’의 수익이 큰 자산이 되어 역사관도 세웠다. 그렇지만 결국 피해자 이용수씨와는 서로 함께 운동의 주체가 되는 관계를 이루지 못한 셈이다. 시민모임은 이용수씨를 다른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돌보아드릴 ‘대상’으로 ‘모셨’을 뿐이다. 이번 기자회견 전까지 그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가 ‘함께하는’ 시민모임에 ‘피해자 이용수’가 없다는 불만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아듣고 귀 기울인 사람이 없었다. 나 또한 귀 기울이지 못했다. 이 누적된 불만과 2015년 한·일 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합의에 이르자 이 합의에서 배제된 ‘피해자’ 이용수씨의 소외감이 더해져, 이용수씨는 정의연을 비롯한 ‘위안부’ 운동 전체에 대해 실망했을 것이다. 이 맥락에서 나는 이용수씨가 기자회견에서 말한 ‘팔았다, 속았다’를 이해했다. 인권운동가 이용수씨는 ‘팔리고, 속을’ 사람이 아니다. (그의 뒤에서 누군가 조종했다며 논란 중인) 배후설도 헛된 이야기다.

30주년 기념사업의 안이한 발상

2017년 희움과 시민모임에서 동티모르의 피해자를 방문할 때 이용수씨는 그곳 생존자들에게 연대의 영상 메시지를 전했다. 그랬던 그가 이번 기자회견에서 그 사업을 비난했다. ‘위안부’ 운동은 이 문제를 여성과 인권이라는 보편적 문제로 확장하려는 지향을 가진다. 그러나 피해 당사자인 이용수씨에겐 그런 지평의 확대가 부자연스럽게 보였을 수 있다. 자신들의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도 보이지 않는데, 기지촌의 미군 ‘위안부’처럼 용어의 범위가 확장되는 것이 납득하기 어려웠을 수 있다.

정의연은 정대협 운동 3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특정 피해자를 상징으로 한 국제연대 운동을 시작했다. 나는 이 기념사업이 안이한 발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정의연은 인권활동가로 거듭난, 이름이 알려진 피해자를 앞세워 쉽게 사업을 벌이려 해서는 안 되었다.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못한 수많은 피해자들의 정의와 기억을 앞세워야 했다.

사랑하는 이용수 선생님. 선생님의 불만이나 불안, 주변인들이 던지는 성급한 위로나 기대를 모두 뿌리치고 오직 명징한 눈으로만 이 뒤틀린 세상을 보십시오.

기자명 도쿄∙이령경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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