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서울시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 위원이 되어 활동한 지 2년 남짓이다. 질판위는 노동자에게 질병이 발생했을 때 이것이 업무상 질병(이하 산재)에 합당한지를 심의하는 기관이다. 6개 지역 질판위는 뇌혈관계·근골격계·내과계·정신건강을, 서울 판정위는 직업성 암·자살·산부인과·안과·이비인후과·피부과·비뇨기과 등을 심의한다. 직업환경의학과 의사와 관련 분야 전문의 등 위원 7명의 다수결로 결정되는 구조이다.

산부인과 관련 산재는 전국에서 서울 질판위로만 모이는데, 2년 동안 심의를 한 건수가 10건도 되지 않는다. 한 해 산재 판정이 1만5000건인 점을 생각하면, 산부인과 사례가 얼마나 적은지 알 수 있다. 심의에 올라온 경우도 자궁 내 태아사망, 유산, 자궁근종, 자궁내막증 등으로 그중 절반 가까운 건수가 ‘다요인 질환이라 불승인’ 판정을 받았다. 이 질환들은 유전, 환경, 가족력 등 여러 요인이 관여할 수 있기 때문에 업무하고만 연관된다고 볼 수 없다는 판단이다.

최근 참석한 회의에서는 자궁하수 두 건이 한꺼번에 올라왔다. 자궁하수는 골반 바닥을 지탱해주는 골반저 근육이 약해진 가운데 질 밖으로 자궁이 튀어나오는 질환이다. 출산을 많이 할수록, 복압이 높아지는 상황(비만이나 무리한 노동)일수록 걸리기 쉽다. 노화와 폐경 등도 위험 요인으로 꼽힌다. 신청인들은 모두 요양보호사, 급식노동, 간병노동 등에 종사해왔지만 장기적으로 일한 곳은 없었다. 노동강도가 세고, 고용 불안정성이 높은 비정규 노동의 특징이다.

그 사실이 발목을 잡았다. 간병인으로 일한 지, 급식노동을 시작한 지 각각 2주나 한 달밖에 안 된 시점에 진단을 받아 업무 연관성이 낮다고 판단됐다. 환자를 돌보거나 밥을 하는 것이 집안일에 비해 노동강도가 그렇게 높지 않다는 의견도 있었다. 게다가 남성 위원들은 자궁하수가 뭔지 아예 몰랐다. 고단했던 삶의 총체적 결과이지만, 작업장의 책임을 세밀하게 쪼개자니 근거가 부족하다고 했다.

다수결로 결국 두 건 다 불인정되어 씩씩거리며 일어나는데, 다른 위원들이 위로인지 격려인지 한마디씩 해준다. 만성폐쇄성질환은 2013년에야 포함이 되었는데, 그 전에는 1년에 4~5건밖에 인정이 안 되었던 것이 지금은 연간 6000건씩 인정받고 있다고.

건강권은 시혜가 아니라 싸워서 얻어내는 인권

여성의 노동이 평가절하되어온 현실, 여성 질환에 대한 무지, 산재 보장을 요구하기 어려운 비정규직에 더 많이 분포하는 여성 노동자 비율 등 문제가 켜켜이 쌓여 있다. 한편 모성보호를 빌미로 구인과 채용에서 여성에게 보이지 않는 차별이 가해지기도 한다. 임신부든 비임신자든 충분히 보호장구와 휴식시간이 보장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아니, 애초에 질병을 사회가 다 같이 책임질 수는 없을까. 현대의 많은 질병에는 유전과 환경 요인이 섞여 있다. 기업과 사회의 책임을 면해주려고 질병 원인을 개인의 노력 부족이나 팔자에서 찾는 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최근 삼성반도체 노동자의 유방암이 13년 공방 끝에 산재 인정을 받았다. 근로복지공단은 이 환자의 여동생도 유방암이 발병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질병이라고 기각했다가, 유전자검사까지 받아내고 나서야 산재 승인을 내주었다. 제주의료원 간호사들의 선천성 심질환 출산 건도 10년 넘게 끌다가 대법원까지 가서야 산재 인정을 받았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건강권은 요구하면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싸워서 얻어진 인권”이라고 말했다. 한 명이라도 더 이 글을 보고 산재 신청을 마음먹었으면 한다.

기자명 윤정원 (산부인과 전문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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