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1929년 10월24일 증권시장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뉴욕 월스트리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그 후 시작된 1920년대는 미국의 첫 번째 황금기라 일컫기에 충분했다. 미국의 생산력은 폭발적으로 늘어났어. 한 가구당 자동차 한 대라는 ‘마이카(my car) 시대’가 일찌감치 열렸고, ‘꿈의 공장’ 할리우드는 전 세계 사람들을 넉넉히 매혹시킬 영화를 쏟아냈다. “자유분방한 재즈와 더불어 찰스턴과 같은 광란의 춤이 유행하고 여성들은 빅토리아 시대의 속옷을 벗어던지고 짧은 스커트를 입기 시작했다(케네스 데이비스 〈미국에 대하여 알아야 할 모든 것, 미국사〉)”라는 말처럼 당시 미국 시민들은 세계 최고 수준의 풍요를 누리며 인생을 만끽했다. 미국 역사에서는 이 시대를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라고 불러.

이 ‘광란’을 실감하고 싶으면 리어나도 디캐프리오 주연의 〈위대한 개츠비〉를 보면 된다. 휘황찬란하다 못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화려한 파티와 돈을 흙 내버리듯 쓰는 신흥 부호의 ‘돈질’이 펼쳐지고, 파티의 취흥에 흔들리는 1920년대 미국인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지. 이 부의 주요한 원천 중 하나가 뉴욕의 증권거래소 월스트리트였단다. 1920~30년대 월스트리트를 소재로 쓴 〈골콘다〉(존 브룩스)라는 책이 있어. 제목 ‘골콘다’는 인도의 한 전설적인 도시의 이름이야. 지금은 폐허가 돼버렸으나 한때 지나가기만 하면 누구나 부자가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지. 1920년대의 월스트리트는 골콘다 같았다. 각종 이슈에 따른 등락은 있었지만 1929년 9월3일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381.17포인트라는 신기록을 세우며 9년 만에 대략 10배가 상승하는 기염을 토했어. 사람들은 희망의 풍선을 부풀렸지.

그런데 1929년 10월24일 ‘블랙 먼데이’에 시작된 주가 폭락 사태는 화사하게 미국 하늘을 수놓았던 오색풍선들을 처참히 터뜨려버렸어. 이른바 대공황이었지. “중개인들은 미친 사람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내질렀다. 서로 머리채를 휘어잡기도 했다. 거래소의 각종 설비들은 말썽을 일으켰다. 주가표시기도 작동을 멈췄다. 통화량 폭증으로 전화는 불통이었다. 장을 마치고 두 시간 만에 겨우 작동된 주가표시기에 나타난 다우존스 산업평균지수는 시장을 공황으로 내몰았다(에드워드 챈슬러 〈금융투기의 역사〉).”

절망에 빠진 미국 국민들은 대통령인 허버트 후버를 갈아치울 새로운 리더십을 갈망했다. 당시의 우스갯소리로 이런 게 있어. 한 히치하이커가 기록적으로 짧은 시간에 차를 얻어 타고서 미국 횡단에 성공했는데 그는 이런 팻말을 들었다고 해. “차를 태워주시오. 안 그러면 후버를 찍겠소.” 미국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하지.

후버의 뒤를 이어 미합중국 제32대 대통령이 된 사람이 프랭클린 루스벨트(1882~1945)야. 루스벨트는 유명한 ‘뉴딜(New Deal)’ 정책을 추진하며 대공황 속에서 침몰해가는 미국을 일으켜 세우고자 했지. 뉴딜 정책의 핵심은 일자리를 창출하여 실업자들을 구하고 그들의 구매력을 되살려 소비를 진작시키며 다시금 산업을 부흥시킨다는 것이었어. 루스벨트는 강력한 경기부양 정책을 폄으로써 미국 자본주의의 모토와도 같았던 ‘자유방임’, 즉 정부는 기업활동과 경제에 개입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다는 기조를 깨버린다. 테네시강 유역 개발사업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실업자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하고, 농산물과 상품의 과잉생산을 막기 위해 보조금을 주거나 산업별 최대 생산량을 정한 산업부흥법을 제정해 수급을 조절했다. 루스벨트 정부는 국가부흥위원회(NRA) 등 온갖 기구를 만들어 산업 전반에 개입했어. “미국 정부가 전쟁 중이 아닐 때 이 정도까지 경제를 통제하고 법제화한 일은 전무후무했다(스티브 코언 외 〈현실의 경제학, 경제는 실제로 어떻게 성장하는가〉)”라고 할 정도로.

그런데 뉴딜은 거창한 사업과 획기적인 경제정책으로만 구성된 게 아니었어. 뉴딜 정책의 바탕에는 노동자들의 권리를 지키고 가난한 이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겠다는 의지가 짙게 깔려 있었단다. 이렇듯 ‘노동 프렌들리’한 뉴딜을 밀어붙였던 루스벨트 정권의 상징적 존재는 이 정권에서 노동장관을 맡은 프랜시스 퍼킨스였어.

ⓒAP Photo1933년 ‘노동자 편’이었던 프랜시스 퍼킨스(뒷줄 가운데)는 미국에서 최초로 여성 각료에 임명되었다.

‘한국판 뉴딜’이 루스벨트에게 배워야 할 것

문이 잠긴 공장에서 화재가 발생해 노동자들 146명이 불에 타 죽거나 건물 밖으로 추락사한 사건인 트라이앵글 공장 화재를 현장에서 목격했던 그녀는 노동조건 개선과 산업안전에 매진하고 있었지. 빈민들을 도와달라고 호소하기 위해 도시 최악의 갱단 두목까지 찾아갔으며 ‘주 54시간 노동’을 목이 쉬어라 외치고 다녔던 이 강단 넘치는 여성을 루스벨트는 주목했다. 노동장관 물망에 올랐다는 소식을 들은 퍼킨스는 노동자 출신을 장관으로 임명하라며 사양의 뜻을 밝히지만 루스벨트는 이렇게 단호한 메모를 보낸다. “귀하의 충고에 대해 생각해봤지만 동의하지 않소(데이비드 브룩스 〈인간의 품격〉).”

퍼킨스는 1933년 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 각료에 임명된다. 노동자 편만 드는 장관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기업주들과 “여자는 조언을 하는 존재일 뿐 명령을 듣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반대를 무릅쓴 결론이었지. 퍼킨스는 장관으로 임명된다면 추진할 일거리들을 한아름 들고 가 쏟아놓으며 루스벨트에게 말한다. “저를 장관에 앉히시려면 이런 걸 한다고 약속해주세요.” 광범위한 실업구제, 최저임금법, 노령연금을 위한 사회보장 프로그램, 아동노동 철폐 등이었어. 루스벨트의 답은 매우 시원했지. “앞으로도 계속 이 문제들로 나를 성가시게 할 것 같군(〈인간의 품격〉 중).” 루스벨트는 무려 12년 동안이나 노동장관에 프랜시스 퍼킨스를 못 박아두었어. 퍼킨스 역시 12년간 대통령을 성가시게 하면서 아동노동 제한, 주당 40시간 노동제, 고용보험, 최저임금제를 도입했고 사회보장법을 제정하는 등 당시로서는 꿈같았던 성과를 이룩하게 돼. 그사이 미국이 노조 가입률은 30%까지 올라갔지.

뉴딜은 단순한 경제정책이 아니었고 국가 주도의 취로사업만도 아니었으며 기업 살리기 프로젝트나 경제 회생 플랜에 그치지 않았단다. 뉴딜의 빛과 그림자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지만 적어도 잔인할 만큼 ‘자유로운’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던 노동자들,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지 않았고,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제시해주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울 거야.

루스벨트 정부 아래 국가부흥위원회의 모토는 ‘We do our part’, 즉 ‘우리는 우리 할 일을 한다’였어. 뉴딜의 성과는 복기해야 하고 한계도 인식해야겠으나 ‘한국판 뉴딜’의 목소리가 높은 요즘, 우리가 무엇보다 기억해야 할 것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싸우는 여성 노동장관을 정권 내내 옆에 두고 ‘성가셔’ 하면서도 ‘할 일을 했던’ 루스벨트의 철학과 리더십이 아닐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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