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is is a pen.’

얼마 전 일본 TBS 방송국의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실험을 했다. 한 여성이 휴지 한 장을 얼굴 가까이 댄 뒤 ‘코레와 펜데스(これは ペンです:이것은 펜이다)’와 ‘디스 이즈 어 펜 (This is a pen)’을 각각 발음했다. 영어를 말할 때 더 크게 휴지가 흔들렸다. 일본어 발음 특성상 영어보다 침이 덜 튀어 코로나19의 감염 위험이 적다는 의미였다. 영상을 본 패널 일부는 ‘스고이(すごい·멋지다)’를 외쳤다. 전 세계인들이 패러디할 ‘밈’의 탄생 순간이었다.

배명훈 작가는 〈역사학과 격리실습실〉이 ‘This is a pen’ 소동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 아니라고 전해왔다. 청탁 시점부터 앞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코로나19의 종식을 예언했던 4월이 끝나갈 무렵이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하루 1만명 넘는 확진자가 나왔지만 국내에서는 10명대로 줄어들고 있었다. 등교가 미뤄지는 동안 사람들은 계속해서 ‘달고나 커피’를 휘저었다. 비대면 시대, 특수를 누리던 쿠팡 물류센터도 아직 활기를 띠고 있었다.

뉴노멀(New Normal)이라는 말이 어디서나 들렸다. BC와 AC(코로나19 전과 후)의 약자도 달라졌다. 전과 같지 않은, 새로운 일상은 어떤 모습일까. 문학적 상상력에 기대 가늠해보기로 했다. ‘코로나 시대’를 주제로 SF 작가 3인에게 소설을 부탁했다. 배명훈 작가는 먼 미래 시점에서 2020년을 돌아본다. 그 세계엔 된소리와 거센소리가 없다. ‘코레와 펜데스’가 ‘고레와 벤데스’가 되는 세상이다. 비말이 멀리 날아가는 걸 차단하기 위해서다. 그는 데뷔작 〈Smart D〉에서도 ‘ㄷ’ 없이 단편소설을 완성했는데 키보드 자판 ㄷ에 저작권이 있다는 설정 때문이었다. 데뷔작에 대한 글을 쓸 일이 있었고 그때 마침 〈시사IN〉의 청탁을 받았다.

정소연 작가는 올해 초 다녀온 해외 크루즈 여행에서 영감을 받아 〈지도 위의 지희에게〉를 완성했다. 역시 배명훈 작가의 추천으로 떠난 여행이었는데, 아무래도 마지막 크루즈가 될 것 같다. 인터넷이 거의 되지 않는 배 안에서 코로나19 소식을 처음 접했다. 당시에는 중국에서 신종 폐렴이 발생했다는 정도였다. 지난 2월 일본 정부가 본토 내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대형 크루즈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를 요코하마항 앞바다에 정박시키고 탑승 인원의 하선을 금지했다. 705명이 감염됐고 6명이 사망했다.

정 작가는 그 뉴스를 보며 자신의 크루즈 여행을 떠올렸다. 당시 선내의 엔지니어실, 주방 등을 돌아보는 투어에 참가했다. 창문 없는 방에 머물고 있는 선원도 만났다. 80여 나라의 사람들이었다. 밤에 정박하기 때문에 여행지를 둘러볼 기회도 거의 없다고 했다. 격리된 배를 보며 그들을 생각했다. 어떻게 되었을까. 다이아몬드 프린세스호 선원들은 승객들이 하선하고 나서 한참 뒤에야 내렸다. 〈지도 위의 지희에게〉는 코로나19로 격리된 배에 사랑하는 연인을 둔 이의 이야기다.

이산화 작가의 〈홈스틸〉은 사람들로 꽉 찬 야구장 장면으로 시작한다. 곧 야구장의 주인이 박쥐로 바뀐다. 인간이 아니라 박쥐의 처지에서 생각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시작이 야생동물과 인간의 접촉이었다. 왜 인간이 박쥐를 먹는지 사람들은 의아해했다. 이 작가는 박쥐가 다양한 감염병 바이러스를 보유했으면서도 병에 걸리지 않도록 진화해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인간의 생활반경이 박쥐의 생활반경을 침해해 접촉이 빈번해지고 인수공통전염병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었다. 인간의 활동이 줄어드는 게 지구 생태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는 진단도 들렸다. 환경과 생태 이슈를, 무관중 시대를 맞은 프로스포츠 시장과 연결했다.

세 편의 SF를 소개한다. 코로나19 이후 달라질 풍경과 끝내 달라지지 않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유행하는 밈의 표현을 빌리자면, ‘디스 이즈 어 픽션(This is a fiction:이것은 소설이다)’. 강세는 물론 ‘픽’에 있다.

 

 

ⓒ이지영 그림

야구장에 사람이 빼곡하게 들어차던 시절이 있었다.

시즌이 시작되면 어린아이와 젊은이와 중년과 노인이 삼삼오오 몰려와 관중석에 다닥다닥 붙어 앉았고, 각 팀의 선수들은 한 손으로 잡힐 만큼 작은 공 하나를 던지거나 때리기 위해 온몸과 마음을 내던질 준비를 했다. 누군가가 방망이로 공을 때리느냐 마느냐, 그래서 공이 담장을 넘느냐 마느냐에 따라 기쁨과 슬픔과 명예와 돈이 한꺼번에 요동쳤다. 여럿이서 공을 치고 받으며 달리는 일련의 동작이 누군가에게는 직업이었고 또 누군가에게는 취미였으며, 때론 철학이자 연구 주제이자 종교이자 꿈이자 사랑이었고 심지어는 인생 그 자체일 때도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주렁주렁 달고 날아가는 자그마한 공의 궤적을 더 잘 보기 위해 오랜 세월에 걸쳐 사람과 기술과 자원과 자본이 아낌없이 투입된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만큼이나 사랑받는 스포츠였다. 그만큼이나 중요한 사업이었다. 치열한 경기가 막바지에 접어들 즈음인 7회 초가 되면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이 다 함께 몸을 풀면서, 한때 ‘미국 국가와 생일 축하 노래 다음으로 가장 많이 불린 곡’이라 일컬어진 유명한 노래를 소리 높여 합창하던 시절이 있었다.

저를 야구장에 데려가 주세요
관중들과 함께할 수 있도록

합창은 멈춘 지 오래였다. 공이 대포알처럼 담장을 넘어가지 않게 된 것도, 그 공의 최종 도착 지점에 따라 환호성이나 욕설이 일제히 터져 나오지 않게 된 것도 벌써 한참 지난 일이었다. 전광판은 번쩍이지 않았고 캐스터와 해설자의 흥분한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지도 않았다. 발길은 끊겼고 문은 걸어 잠겼다. 잠긴 문이 언젠가는 열릴 것이라고 기대한 사람들도 있었다. 실제로 어떤 야구장은 다시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야구장에게 허락된 운명은 아니었다.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었던 공장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움직이기 시작할 수는 없는 것처럼, 오래도록 차갑게 굳어 가쁜 숨을 몰아쉬던 산업이 하루아침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 힘차게 원래 모습을 되찾을 수도 없는 법이었다. 언제까지나 관중이 구름처럼 몰려들고 막대한 돈이 끊임없이 흘러 들어올 것을 상정하고서 만들어진 체계는 갑작스러운 환경변화에 간단히 적응하지 못했다. 금이 가고 흔들리다가 이내 산산이 부서졌다. 부서진 조각 중 몇몇은 재빨리 모습을 바꿔 새로운 시대의 일부분이 되었지만, 어떤 조각은 그저 세상이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그대로 먼지가 되어 바스라지고 말았다. 여전히 사람들은 공과 방망이를 들고 바깥으로 나갔지만,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직업이거나 인생이었지만, 때로는 옛 시절을 연상케 하는 축제가 열리기도 했지만 결코 이전과 똑같을 수는 없었다. 어떤 야구장은 결코 다시 열리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뼈아픈 사실을 이젠 모두들 어느 정도 받아들인 지 오래였다.

생전 처음 맞이하는 고요 속에서 야구장은 조금씩 조금씩 먼지를 뒤집어썼다.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슬었다. 약삭빠른 벌레들이 찾아와 고인 물과 틈새 여기저기에 둥지를 틀자, 새들도 뒤이어 날아와서는 소박하게나마 연회를 벌였다. 하지만 해마다 바뀌는 팀 순위처럼 사람 없는 야구장의 주인도 언젠가는 바뀌게 마련이었다. 동틀 녘의 푸르스름한 빛이 땅의 어둠 위로 슬금슬금 손을 뻗으며 기어올 무렵, 지평선 너머에서 일제히 푸드덕거리며 모습을 드러내는 수만 개의 작고 검은 그림자가 있었다. 야구장 정문에 자물쇠가 채워질 무렵, 바로 그 자물쇠의 원인이 된 일 때문에 본의 아니게 언론의 요란한 주목을 받아야 했던 야행성 털북숭이 날짐승이었다. 깊은 밤 내내 먹이를 잡으려 사방을 바삐 쏘다니던 박쥐 무리가 아침을 맞아 둥지로 돌아오고 있었다. 차양 아래로, 콘크리트 천장 사이로, 새끼들을 먹이고 눈을 붙이며 낮시간을 보낼 그늘 속으로. 한때 이곳에 모여들어 울고 웃었던 관중들의 박수 소리에 지지 않으려는 듯, 무수히 많은 날갯짓이 야구장 주위를 돌며 어지러이 펄럭였다. 이 또한 예전과는 전혀 다른 광경이었다.

하지만 박쥐들에게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일이기도 했다. 아주 아득한 옛날부터 박쥐들은 항상 같은 곳에서 보금자리를 마련해왔다. 겨울이 되면 따뜻한 남쪽으로 몸을 피했다가, 날이 풀리면 일제히 북쪽으로 올라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서 새끼를 길렀다. 다만 과거에는 그 보금자리가 아늑한 동굴이나 나무 구멍이었고 지금은 다리 밑, 건물 속, 버려진 야구장 안이라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었다. 급격한 환경변화에 어떻게든 성공적으로 적응했기에 박쥐들은 아득한 세월 동안 꿋꿋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득한 세월 동안 꿋꿋이 살아남았기에 계절마다 대륙을 가로지르며 갖가지 변화를 직접 볼 수도 있었다. 이를테면 유적 기록으로 남은 대륙 최초의 구기 스포츠 경기장이 3500년 전 멕시코의 파소 데 라 아마다에 세워지던 순간을, 오직 고무공을 가지고 하는 놀이만을 위해 중앙아메리카 전역에 1300개 이상의 비슷한 경기장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모습을, 치첸 이사의 장엄한 대경기장에서 펼쳐진 치열한 명승부를…. 그러다가 바다 건너에서 다른 사람들이 와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무슨 경기장을 지었고, 또 지었고, 또 지었다. 나무를 베고 연못을 메우고 동굴을 부수면서 마을을 지어놓으면 그곳에는 크고 작은 경기장도 어김없이 한두 개씩은 있었다. 그 곳곳마다 사람들은 한결같이 몰려들어 소리를 지르고 펄쩍펄쩍 뛰며 열광했다. 3500년 내내 그랬다.

그러더니 갑자기 소란이 멎었다.

박쥐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다만 한때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둥지를 틀었던 곳에 다시금 빈자리가 생겼음을 눈치 챘고, 그래서 한 마리 한 마리씩 살그머니 모여들어 보았다. 태곳적부터 그러했듯이 박쥐들은 조심스러웠지만 결코 기회를 마다하지는 않았다. 아무도 보지 않는 틈에 재빨리 발을 뻗어 천장을 움켜쥐었다. 먹이를 양껏 잡아먹고 새끼를 낳아 길렀다. 계절이 신호를 보내면 힘껏 날아가 겨울 은신처를 밟고선 때맞춰 다시 고향의 보금자리로 돌아왔다. 살아남기 위해 꼭 필요한 모든 일을 거침없이 해나갔고,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스포츠가 무너진 자리에 삶이 둥지를 틀었다. 찍찍거리는 새된 소리가 걷혀가는 어둠을 화살처럼 뚫고 여러 갈래로 울렸다.

ⓒ연합뉴스

땅콩이랑 팝콘도 좀 사주세요
영영 돌아오지 못해도 좋아요

살아남는 일이란 게 결코 쉽지는 않았다. 생존경쟁이란 언제나 잔인한 스포츠였고 온 힘을 다해 달린다 한들 죽지 않고 성공적으로 진루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원래부터 그토록 호락호락하지 않은 승부였건만 특히나 근래의 상황은 박쥐에게 특별히 가혹하기까지 했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은 아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시합 속에서 박쥐들은 광견병이나 에볼라처럼 훨씬 치명적인 질병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조차도 아무런 문제 없이 몸에 품고서 태연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익힌 지 오래였다. 그러니 만일 박쥐에게도 뉴스란 것이 있었다면 코로나바이러스 대유행 사태쯤은 고작해야 인간 세상의 요지경을 다루는 보도 한 꼭지에서나 다뤄져 조금도 주목받는 일 없이 지나갔을 것이다. 한밤의 사냥을 마치고 둥지로 돌아와서 옹기종기 모여앉아 뉴스 채널을 켜면, 그것보다 훨씬 심각한 뉴스가 하루가 멀다 하고 얼마든지 쏟아져나와 경기장 안의 모든 박쥐들을 공포에 떨게 했을 테니까.

어쩌면 북미 지역의 박쥐들은 혹여나 인근에서 흰코증후군 확진자가 발생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려 매일 귀를 곤두세워야 했을지도 모른다. 박쥐가 동면을 하지 못하고 계속 깨어나다가 지쳐 쓰러지게 만드는 이 고약한 곰팡이성 질환은 2006년 처음 학계에 보고된 이래 주춤하는 일 없이 꾸역꾸역 퍼져나가면서, 겨우 몇 년 동안 적어도 수백만 마리에 이르는 박쥐의 목숨을 너무나 간단히 앗아갔다. 동굴에 집단으로 모여서 동면하는 특성상 하나라도 병에 걸리면 동굴 전체의 박쥐가 전멸하고 마는 것이 특히 심각한 문제였다. 아마 박쥐들은 뉴스에 나와 ‘미증유의 재난’이라고 호소하는 과학자의 말을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귀 기울여 들었으리라.

하지만 ‘미증유의 재난’을 알리는 뉴스가 고작 그것 하나뿐이었을까. 갑작스러운 이상고온으로 인해 나무에 매달린 채로 목숨을 잃고서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호주 과일박쥐들의 모습이 보도될 때면 온 경기장이 나지막한 탄식에 잠겼을 것이다. 지난 20여 년 동안 계속해서 일어난 일이었다. 막 태어난 새끼들은 졸지에 어미를 잃어버렸고, 안경과일박쥐는 전체 개체수의 3분의 1이 단 이틀 새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람들은 과일박쥐의 이 허망한 떼죽음을 점점 심해져만 가는 전 지구적 기후위기에 대한 수많은 경고 중 하나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과일박쥐들에게 죽음은 경고가 아니었다. 그들이 참가한 스포츠에 친절한 경고 따위가 존재했던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어떤 죽음은 재난이라기보단 차라리 진지한 낯빛으로 대뜸 던져대는 비틀린 농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를테면 풍력발전기 아래에 떨어져 죽은 박쥐 시체가 그러했다. 풍력발전기는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사람들이 곳곳에 세운 물건이었지만, 일단 가동하고 나니 호주의 박쥐들을 구하는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전 세계의 박쥐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발전기 날에 맞아 죽는 박쥐도 있었고, 발전기 날이 만들어내는 급격한 기압차 때문에 내출혈을 일으켜 죽는 박쥐도 있었다. 하나 이런 농담 같은 죽음조차 수백만 번쯤 쌓이고 나면, 그 뒤로는 시청자도 앵커도 잠깐의 안타까움조차 표하지 않는 지극히 일상적인 사고가 되기 마련이었다.

반면에 겨우 몇 년 동안 한 지역에서 5만 마리의 과일박쥐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박쥐들도 작은 애도를 표할 수 있었으리라. 인도양 남서부의 모리셔스섬 토착종인 모리셔스과일박쥐에게 일어난 일이었다. 박쥐 수가 지나치게 많아져 농작물에 해를 끼친다는 이유로 특수기동대를 동원해 시행된 정부 차원의 사냥은 효과가 미미하다는 전문가들의 항의에도, 모리셔스과일박쥐의 개체수가 절반 가까이 줄어들어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되는 사태에도 아랑곳 않고 꾸준히 계속되었다. 이 모든 것이 박쥐들에게 현재진행형으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코로나바이러스가 인간 세상을 휩쓸기 한참 전부터.

그럼에도 박쥐들은 이 모든 재난의 시발점을 지목하여 원망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치명적인 전염병을 둥지에서 둥지로 마구 퍼뜨리고 다닌 것이 누구인지, 지구를 뜨겁게 달군 것이 누구인지, 박쥐가 다니는 길에 풍력발전기를 세운 것이 누구인지, 박쥐들의 땅을 빼앗아 농작물을 잔뜩 심어둔 것이 누구인지 굳이 생각하지 않았고 복수하려 들지도 않았다. 다만 재난 한가운데서 죽기 살기로 발버둥을 쳤을 뿐이다. 사람들이 박쥐의 둥지를 부수고 집을 지으면 박쥐들은 사람이 지은 집 근처에 새 둥지를 틀었다. 사람들이 주변 먹이의 씨를 말리면 박쥐들은 더 멀리까지 나와 먹이를 구했다. 그러는 동안 본의 아니게 사람들과 더 많이 마주쳤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마시려고 떠놓은 물에 입을 댔을지도 모른다. 그 결과 무슨 일이 일어났든 그건 죽은 동족에 대한 복수 따위가 아니었다. 다만 박쥐의 땅에 꾸역꾸역 들어와 살기로 결정했다면 박쥐와 함께 걷고 박쥐와 같은 물을 마시게 될 것쯤은 예상했어야 할 뿐. 그 당연한 게임의 규칙을 감당할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허둥지둥 한두 발짝 물러나 꽁꽁 틀어박혔고 덕분에 박쥐를 내쫓고 세운 야구장은 다시금 박쥐의 집이 되었다. 한때 그토록 소리 높여 울리던 합창도 이젠 포근한 잠에 빠져드는 박쥐의 귓가에 꿈결처럼 울리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시사IN 포토

홈팀을 소리 소리쳐 응원할래요
이기지 못하면 부끄럽잖아요

사람들은 꿈꾸기를 좋아했다. 언젠가 전염병이 기적처럼 물러가고 나면 과거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일상이 되돌아올 것이라고 정말 오래도록 꿈꿔왔다. 하지만 야구장의 콘크리트 그늘 아래에 잠든 박쥐들은 그렇게까지 낙관적인 꿈을 꾸지 않았다. 사람들이 정말 순순히 물러날지, 이곳이 앞으로도 영원히 보금자리가 되어줄지, 그런 달콤한 희망을 품기에 7회 초는 아직 너무 이른 시기였다. 첫 번째 공놀이보다도 훨씬 오래 전부터 이 땅에 살아온 박쥐들은 쉽게 기대하지 않는 법과 쉽게 포기하지 않는 법을 전부 알았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는 결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박쥐보다 조금 늦게 깨달았다. 어쩌면 예측할 수 없이 튀어 오르는 고무공을 가지고 처음으로 승부를 벌여본 뒤에야 비로소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과테말라 고지대 원주민인 키체족이 대대로 구전해온 마야 신화를 18세기에 프란치스코 히메네즈 신부가 받아 적은 책 〈포폴 부〉에는 지하 세계인 시발바의 신들이 주최하는 잔인한 공놀이 시합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신들의 초대를 받고 시발바로 향한 쌍둥이 영웅 우나푸와 스발란케는 꾀를 짜내 함정을 피하고 시련을 통과하며 시합을 계속해나간다. 뼈 칼날이 달린 시발바의 고무공 ‘흰 단검’ 대신 스스로 준비해온 공을 쓰겠다고 말해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고, 칼날의 방과 추위의 방과 재규어의 방과 불꽃의 방을 아무런 상처 없이 통과하기도 한다. 하지만 시발바의 수많은 시련 중에서도 단 하나, 죽음의 박쥐 떼로 가득한 방에서 하룻밤을 지새우는 시련만은 쌍둥이 영웅도 온전히 견뎌낼 수 없었다.

쌍둥이 영웅은 시끄럽게 울부짖으며 위협하는 박쥐들을 피해 바람총 안으로 기어 들어가 새벽을 기다리기로 한다. 하지만 박쥐들이 한순간 움직임을 멈추자 우나푸는 새벽이 온 것인지 확인하겠다고 고개를 내밀었다가 머리를 통째로 낚아채여 죽고 만다. 빼앗긴 우나푸의 머리를 되찾기 위해 스발란케는 들짐승을 불러 모아 협력을 요청해야 했다. 너구리를 닮은 동물인 코아티가 가져온 호박으로 우나푸의 머리를 대신하고, 주머니쥐가 하늘을 검게 칠해 시간을 버는 동안 호박에 이목구비를 조각해 넣는다. 박쥐가 낚아채 간 우나푸의 머리를 공 대신 쓰기로 한 다음 날 아침의 시합에서 토끼는 튀어 오르는 공 흉내를 내 시발바의 신들을 혼란시키고, 그 틈에 스발란케는 우나푸에게 진짜 머리를 되찾아준다. 마침내 지하 세계의 공놀이 시합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둔 쌍둥이 영웅은 이후 태양과 달이 된다. 마야 창조신화의 일부다.

위험이 진정으로 사라질 때까지 안전하게 몸을 숨길 줄 알았기 때문에 스발란케는 마지막 시련에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겸손하게 자연의 힘을 빌릴 줄 알았기 때문에 스발란케는 형제를 구해내고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쌍둥이 영웅의 승리는 머나먼 신화시대의 일에 지나지 않았고 한번 우승팀이 영원한 우승팀이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쩌면 다음번에는 사람들이 더 성급할지도 몰랐다. 어쩌면 다음번에는 자연이 사람의 편을 들어주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쩌면, 정말로 운이 좋다면 다음번에는 박쥐와 사람이 맞붙을 필요가 없어질지도 몰랐다. 이 시합의 향방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단언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한낮의 깊은 잠 속에서 박쥐들은 그저 차분하게 7회 말을 준비했다. 합창이 끝나가고 있었다. 시합이 조만간 다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스트라이크 하나, 둘, 세 번에 아웃이에요
옛날 옛적 그 야구 경기에선…. 

기자명 이산화 (SF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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