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박래군 ‘인권재단 사람’ 소장은 공감능력을 강조하며 섣불리 개입하기 전에 일단 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인권운동가 박래군(59). 그가 편집국에 등장하자 몇몇 기자들이 자연스레 인사를 나눴다. 한 기자는 2004년 국가보안법 개폐를 논할 때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였던 그를 처음 취재했다. 또 다른 기자는 그가 용산참사 범대위 공동집행위원장이던 시절 처음 만났다. 기자 대부분이 그를 취재하거나 여러 차례 목격했다. 사건이 터지면 늘 현장에 있었다. 양심수 석방, 고문 추방, 의문사 진상규명, 용산참사, 세월호 사건 등 그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직함이 곧 한국 사회의 주요 현안이었다.

1988년 5·18의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분신한 동생(박래전)의 죽음을 계기로 인권운동의 길에 접어든 지 33년. ‘인권재단 사람’ 소장인 그가 최근 한국 현대사의 역사적 현장을 인권의 시각으로 정리한 답사기 〈우리에겐 기억할 것이 있다〉를 냈다. 제주 4·3, 전쟁기념관, 소록도, 광주 5·18, 남산 안기부 터와 남영동 대공분실, 마석 모란공원, 세월호 선체에서 국가폭력과 범죄의 원형을 발견한다. 그의 인권운동 역사와도 궤를 같이한다. 답사 현장의 기억과 30여 년의 소회를 물었다. 인터뷰 당일 정의기억연대, 나눔의집과 관련된 그의 기명 칼럼이 일간지에 실렸다. 온갖 논란에도 불구하고 ‘운동들이 정방향을 향해 나아가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정의기억연대에 관한 칼럼에서 ‘피해자 중심’을 말했다.

윤미향씨가 고생을 많이 했지만 국회의원에 출마할 생각이었다면 준비를 많이 했어야 한다. 피해자(할머니)도 설득하고 내부 논의를 거치면서 (정치권에 갔을 때) 공격받을 부분을 예상했어야 한다. 시민사회 운동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된다고 하면 운동의 연장선에서 어떻게 할지 단체 내에서 논의가 있어야 하는데, 어느 시점부터인가 개인의 결단에 의해 나가는 것 같다. 게다가 비례 위성정당이 만들어지면서 검증 과정도 짧아졌다.

더 근본적으로는 30여 년간 1인 중심체제였다. 우리(같은 단체)도 마찬가지지만 오래되면 관성이나 패턴이 생기기 마련이라 바꿔줘야 한다. 안성 힐링센터에 관한 것도 미심쩍은데 답할 수 있는 사람이 윤미향씨 본인밖에 없다. 회계처리도 몇십만원, 몇백만원이면 몰라도 꽤 큰돈이 공시에서 누락됐다는 건 이해가 안 된다. 회계 시스템 자체에 문제는 있다. 비영리단체인데 경영성과를 평가하듯 기업의 회계 방식을 요구하는데 참 고민스럽다. 툴 자체가 그렇다. 회계 투명성은 당연한 의무이지만 지금은 몸을 옷에 맞추라는 식이다.

단체에 타격은 없었나?

NGO 중에서도 인권단체 후원자들은 큰돈을 내진 않지만 충성도가 높다. 당장은 아니어도 여파가 있을 것 같다. 전체적으로는 빠지고 있고 작은 단체가 타격이 크다. 코로나19로 인권단체의 활동이 줄었다. 지난해에는 연 2000만원을 긴급히 현장 활동에 지원했는데 9월에 다 떨어졌다. 올해는 3000만원으로 예산을 올렸는데 긴급하게 움직이는 인권 활동이 거의 없다. 10분의 1 수준이다.

인권 현장 답사기를 책으로 냈다.

2011년 인권 현장을 답사하면서 인권센터를 홍보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처음엔 홍보 목적이었는데 주객이 전도됐다. 답사를 하고 글을 쓰다 보니 본격적으로 해보고 싶었다. 현장에 가니 자료를 접할 때와 다른 생생함 같은 게 있었다. 출판사와 이야기되고 2013년 가을부터 작업해 2014년 상반기까지 초고를 넘기기로 했는데, 세월호 참사가 터졌고 미뤄졌다.

ⓒ출판사 클 제공제주4·3평화공원에 재현한 다랑쉬굴. 숨어 살던 사람들이 먹고살려고 애썼던 흔적이다.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시작했다고 했는데.

인권이라고 하는 게 유엔에서 말하는 보편적 가치인데도 분단 때문에 이념의 벽을 못 넘는다. 아직도 빨갱이니 종북 좌파니 이런 말로 공격을 한다. 이게 헐려야 인권의 지평이 넓어질 것 같다. 한국의 인권 현실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추적하다 보니 제주 4·3이었다. 빨갱이라는 말이 약화되었지만 여전히 남아 있고 변형되면서 지배 세력이 끊임없이 써먹고 있다. 빨갱이라는 말은 쉽게 쓸 수 있는 게 아니다. 빨갱이니까 죽여도 좋다는 ‘살인 면허증’이다. 그 때문에 여수·순천사건이나 제주 4·3 때 수많은 사람을 죄책감 없이 죽일 수 있었다. 그런 얘길 하고 싶었는데 인권에 대해 설명하면 재미없어 한다. 한국에서 인권은 이기적으로 수용되고 있다. 직접 당하면 인권을 찾지만 평소에는 남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국가보안법 제정의 배경이 제주 4·3이라서인가? 제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소는?

그렇기도 하고 제주도 자체가 분단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희생양이었다. 대한민국 인권의 역사도 여기서 시작된 것 같다. 제주4·3평화공원에 다랑쉬굴(4·3 당시 사람들이 숨어 살던 곳)을 재현해놓았는데 밥그릇, 양푼 같은 게 깨져 있고 비참했다. 마지막까지 먹고살려고 했던 흔적이다. 시신으로 발견될 당시 상의에 숟가락 하나가 꽂혀 있던 이덕구(인민유격대 지휘관)와도 연결이 되었다. 이념적인 걸 걷어내면 비참함 속에서도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을 발견할 수 있다. 제주도는 역사적으로 설움과 분노, 슬픔이 곰삭은 곳이다. 사계리 공동묘지에는 마을에서 세운 충혼비가 있는데 사계리 청년들을 기리는 거였다. 4·3을 겪고 난 사람들이 폭도라는 누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군에 자원입대하는 식으로) 신분 세탁을 한 거다. 귀신 잡는 해병대의 신화를 만든 것도 그런 배경에서다.

용산전쟁기념관을 둘러보며 ‘기념’과 ‘기억’은 다르다고 했는데.

1년에 220만여 명이 다녀가는 곳이다. 전쟁을 기념하는 건 아니어야 한다. 기억해야지, 있는 그대로. 전쟁 때 있었던 일만 보여줘도 느낄 수 있는데 이념적인 잣대를 강요하고 왜곡한다. 전쟁 당시 서울 시민을 버리고 도망친 이승만 대통령을 대단한 사람인 양 국부(國父)로 숭상하는 것도 그렇고. 왜곡의 절정은 베트남전쟁이다. 한국이 사과를 해도 모자랄 판에 (당시 한국군의 원칙으로) ‘백 명의 베트콩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는 것’이라는 문구를 기념관에 걸어놓았다.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지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다신 일어나서는 안 될 비극이라는 걸 말해주면 된다. 전쟁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도 있었다. 국가가 저지른 일에 대해 사과하는 것까지 가야 한다.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생각하는 장소로 바뀌어야 한다. 여기가 바뀌면 전국의 전쟁기념관도 바뀐다.

5·18 현장에선 책임자 처벌을 강조한다.

지난 주말, 딸들에게 5·18을 알려주고 싶어서 가족과 광주에 다녀왔는데, 전일빌딩에 가봤다. 총탄의 흔적이 있더라. 그게 있는데도 헬기 사격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드러난 사실도 부정하고 최근에도 ‘일베’가 ‘홍어’에 빗대 광주 시민을 조롱한다더라. 특별사면의 후과라고 본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이 형을 제대로 살았으면 학살을 저지른 사람이 단죄된다는 걸 보여줄 수 있었다. 역사적 정리의 기회를 놓치면서 불의한 세력에 힘을 실어준 게 되어버렸다. 국제인권법에서는 ‘불처벌(impunity)’ 개념을 사용해 처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 우리는 진실규명 단계에 머물러 있다.

5·18 민주화운동 당시의 여성들에게 주목했다.

제주 4·3도 70년이 넘었는데 당시 성폭력에 대해 말을 못한다. 전쟁 때 여성은 사람 취급을 못 받는다. 남성 욕구의 희생물이다. 전쟁이 끝나도 자기가 당한 고통의 피해를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일본군 ‘위안부’도 마찬가지다. 남성 중심의 서사에선 몸을 버린 여자가 된다. 알아도 덮는 분위기였다. 드러내지 않으면 똑같은 상황이 일어날 수 있다. 성찰해야 반복되지 않는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활동이 중요했던 건 전시 성폭력 문제를 세계적으로 공론화했기 때문이다.

광주에서 일어난 성폭행도 폭로되었다.

광주도 분위기가 비슷했다. ‘미투’의 힘을 빌려서 2018년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악성댓글의 공격이나 2차, 3차 가해가 있어서 숨어버렸다고 한다. 1988년(국회 청문회), 1995년(검찰 조사 및 재판)에도 관련 얘기가 나왔지만 5월 단체 간부들이 ‘군인이 설마 그랬을라고’ 하는 식이었다. 남성 중심 단체들이라서 그렇다. 40년이 지났으면 바뀌어야 한다.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 벗어나야 한다. 여성, 청소년, 빈민을 포함해서 항쟁의 주역들을 찾아야 한다. 피해 규모가 어디까지인가도 생각해봐야 한다. 세월호 때에도 배가 침몰하는 광경을 생중계로 지켜본 사람 모두에게 트라우마가 생겼다. 직접 피해를 당한 개인의 트라우마는 그것대로 지원하되 집단적인 트라우마 역시 극복하도록 도와야 한다.

ⓒ출판사 클 제공박래군 소장이 서울 서대문형무소 역사관 민족저항실 벽면을 가득 채운 수형기록카드를 보고 있다.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화장실의 변천사로 수감 생활을 회상하기도 한다.

출판사 직원들이 (감옥 안의) 변기로 세수도 하고 샤워도 한다는 부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림을 그려서 설명했다. 감옥 생활은 다섯 번 했지만 합치면 2년밖에 안 된다. 인권운동을 해서 인권옹호자 보호를 위한 유엔 특별보호관의 도움도 받았다. 빨리 나왔다. 20대 때 한미은행 점거농성 건으로 13개월을 살았는데, 환경이 폭력적이고 열악했다. 감옥에서 폭력이 없어진 게 2000년대 국가인권위원회가 생기고 나서다. 인권의 사각지대였는데 감시할 길이 열렸다. 한국 감옥의 독방이 0.75평이었다. 세월호 참사 당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등의 혐의로) 서울구치소에 갔을 때 1.5평이었다. 두 배라 너무 넓더라.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건 비애다. 수감 생활을 하고 나면 환경이 바뀌어서 힘들다. 용산참사 때 수배 생활 10개월, 수감 생활 3개월까지 해서 14개월 만에 집에 들어갔는데 자다가 눈뜨니 캄캄해서 적응이 안 되더라. 감옥은 24시간 불이 켜져 있었다.

마석 모란공원은 각별한 장소일 것 같다.

편하다. 다른 공원묘지보다 공간이 넉넉하다. 초기에는 힘들었다. 동생을 묻은 뒤 혼자 가서 울기도 했다. 한참 또 지나니까 선배, 친구, 후배, 내가 다룬 사건의 사람들이 묻혔다. 비석의 앞면만 보지 말고 뒷면(사람의 약력이나 유지를 집약한 글귀가 적혀 있다)도 봐달라고 했는데, 이름을 잘 모르더라도 그가 어떤 사람이었고 뭘 하려고 했던 사람인지 이해해주면 좋겠다.

거기서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 죽음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생각한다’고 했다.

운동을 하면서 시작은 순수해도 어느 시점이 되면 욕심이 생기는 것 같다. 욕심이 사람을 버리고 운동을 망치는 거다. 맹문재 시인이 ‘반성’이라는 시를 썼는데 모란공원 열사들을 나열하다가 마지막에 ‘너도 저럴 수 있느냐?’로 끝난다. 명이 다해 돌아가신 분도 있지만 대체로 20대에 죽었다. 자결할 때의 심정이 어땠을까. 이런 걸 생각할 수밖에 없다. 왜 우리는 이렇게 살까? 어떻게 하면 죽을 때 추하지 않을까?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곳이다.

세월호를 기점으로 활동가와 단체의 역할을 다르게 설정했다고 들었다.

이전에는 운동 사회가 피해 당사자들에게 방향을 제시하고 신뢰도에 따라 전권을 위임받기도 했다. 단체가 협상을 맡는 거다. 세월호부터는 달라졌다. 유가족들의 지식수준도 높아졌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여러 경로를 통해 정보를 갖고 있다. 당사자끼리 토론하고 만들어가는 게 있었다. 세월호 참사 때 국민대책회의 결성 과정에서 박근혜 정권 타도 투쟁으로 곧장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가가 할 일을 안 해서 애들을 죽게 만든 거니까. 인권 활동 하는 사람들은 반대했다. 그렇게 해서는 유가족이나 시민들과 같이 갈 수 없다고 봤다. 가족들을 중심에 두고 결합해가는 방향으로 해야 한다. 피해 당사자가 중요하다. 자기 문제를 스스로 인식해 풀어가고, 우리는 조력하는 역할이다.

4·16연대 공동대표를 하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욕먹는 게 힘들었다. 사건이 커서 피해자도 많고 피해자와 결합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욕먹는 규모가 다르다. 피해 당사자들에게 오해도 많이 받았다. 초반에는 우리를 잘 몰랐다. ‘직접적인 이해관계도 없는데 뭘 바라고 도와주지? 뭔가 있으니 그럴 거야.’ 그런 생각이 강했다. 마음을 선뜻 못 내준다. 피해자들 곁에서 자기 욕망을 투사하려는 사람도 많았다. 그게 보여서 말리면 도리어 공격을 받아 그럴 땐 서운하기도 했다.

ⓒ출판사 클 제공세월호 내부. 객실을 구분했던 벽들이 다 뜯어지고 바닥에 자리만 남았다.

피해자들 곁에 있는 게 힘들지는 않나?

1988년 동생이 죽은 뒤 의문사 가족들을 만나면서 농성하는데, 자료가 별로 없었다. 진정서나 부검 기록이 자료의 전부였다. 시신 사진이 끔찍하고 그전에는 본 적이 없었다. 28세였는데 그런 티를 내면 안 되고 사진을 외면해서도 안 됐다. 차차 요령이 생겼다. 유족들의 분노와 슬픔의 에너지가 엄청나다. 초기엔 감당하기 힘들다. 그때는 도리어 거리를 둔다. 조금씩,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들어간다. 활동 경력이 있는 사람들도 처음부터 빠지면 나중에 활동을 못한다. 시간이 좀 지나면 에너지의 강도가 달라지고 다른 데로 분산되기도 한다. 그럴 땐 도리어 가까이 가기도 한다. 거리를 좁혔다 넓혔다 하는 건데 판단은 느낌으로 한다.

책에 실린 장소 중 가장 인상적인 공간은?

세월호 선체가 쓰기 힘들었다. 희생자들이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카톡이나 문자의 내용을 썼다가 많이 덜어냈다. (밖에서 보는 것과 달리) 선체 안에 들어가면 또 다르다. 어느 장소에 누가 있었는지 그림이 그려진다.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도 기억에 남는다. 고문을 위해 최적화된 공간이다. 현장을 다니면 괴롭지만 폭력 속에서도 꺾지 못한 의지를 발견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민주주의의 흐름을 꺾지 못한 게 아닌가. 희망을 찾으려는 습관이 배어 있다.

답사 현장이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걸어온 길과도 겹친다.

최종 목적지는 사람이다. 현장에서 고통당했던 사람, 가해를 했던 사람 모두 사람이다. 인간은 존엄하다는 게 인권의 출발인데, 존엄한 인간이 존엄한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 그걸 통해 지위를 얻고 이렇게 되는 게 모순이다. 어떤 조건이 되면 평범했던 인간이 끔찍한 광기의 잔혹성을 발휘하는데 그것조차 인간이라고 봐야 한다. 아주 잔인한, 주도자 말고 말단에서 시행했던 사람들이 부당한 명령을 거부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드는 것까지 생각해야 한다. 피해자 연구도 부족하지만 가해자 연구가 상당히 부족하다. 명령 내린 책임을 어디까지 물어야 하나. ‘제노사이드(국민·인종· 민족·종교 따위의 차이로 집단을 박해하고 살해하는 행위)’를 부정만 하지 말고 인정하고, 평범한 인간이 가해자가 되는 조건을 봐야 한다.

인권의 역사가 나아가려면 피해자와 생존자 곁에 서야 한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방법은?

보통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에 빗대 말하는데, 소녀상의 그림자는 할머니 모습이고 옆에 빈 의자가 있다. 그 의자에 앉으라는 의미다. 섣불리 자기 판단을 가지고 개입하는 게 아니라 일단 듣는 거다. 필요한 게 공감능력이다. 나름의 가설인데 우리의 공감능력이 급격히 떨어진 게 IMF 외환위기 이후라고 본다. 경쟁과 효율을 강조해서 이기면 독차지해도 당연한 것으로 됐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도 그때를 기점으로 부끄러운 게 아니게 되었다.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시대, 아픔과 슬픔을 외면하다가 세월호를 겪으며 공감능력이 회복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생각한다.

활동가로서 현장과 거리를 두겠다고 했는데.

세월호 이후에는 현장에 직접 가지 않고 거리를 두는 편인데 사람들이 모른다. 운동 사회가 빨리 변화해야 하는데 제일 더디다. 혁신이 필요한 곳이다. 우리 같은 386이 물러나줘야 후배들이 주체적으로 활동할 수 있다. 활동에는 정년이 없는데 환갑이 되는 내년에 현장 활동가로서 은퇴하고 싶다. 그런데 도와주질 않는다. 인권운동 초반은 좁은 의미의 운동이었다. 양심수 석방, 의문사 등 국가폭력이나 정치적 탄압에 대한 이슈였다가 1990년대 들어 소수자 문제로 확장되었다. 거기에 더해서 자유권(시민·정치적 권리) 중심에서 사회권(경제·사회·문화적 권리)의 중요성이 커졌다. 의제가 늘어나는 만큼 인권운동 영역이 강화되는 건 아니니까 힘들었다. 다른 운동과 달리 젊은 활동가들이 들어오는 건 고무적이다. 20대가 많다. 5년이 고비다. 중견 활동가가 사라지는 건 큰 손실이다. 지금의 가장 큰 고민은 지속 가능한 인권운동 활동의 조건을 만드는 것이다.

5년이 고비라고 했는데 33년째다. 그만두고 싶을 때는 없나?

배신감이 들 때. 믿고 가던 사람이 뒤통수 치면 내가 사람을 볼 줄 몰랐나 싶다. 다른 거 안 바라고 현장 지키면서 경찰에 두들겨 맞는 동안 누군가 뒤로 딴주머니 찬 걸 알 때도 있었다. 젊을 때는 죽을 만큼 술을 마셨는데 그것도 이해되는 때가 오더라. 가난한 사람일수록 작은 돈에도 쉽게 배신한다. 피해자 가족들끼리 국가배상금 몇 푼 가지고 싸우는 걸 보면 속상하다. 그런데 결국 계속하게 되는 건 또 사람 때문이다. 똑같은 현장이라도 감동적인 사람들이 또 있다.

정치하라는 권유를 많이 들었을 텐데.

내가 할 건 아니다. 2000년 이후로 (사법처리 때문에) 어차피 피선거권이 없다. 그게 편한 건 딱 하나다. 하고 싶어도 안 된다고 말한다. 시민사회 운동을 하며 늙어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정치하는 사람도 있고 이런 사람도 있는 거다. 정치에 진출하며 운동 역량에 공백이 생기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둘 다 강화되는 속에서 자연스레 진출하면 좋겠다. 특정 정당에 속하는 것도 싫다.

아내의 응원과 무조건적인 지지자인 두 딸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의외였다.

사회운동 하는 사람은 가족과 사이가 안 좋을 거라는 건 편견이다. 다만 운동을 하면서 경직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경직된 사람들이 가족과 주변 관계에서도 경직되는 것 같다. 가족한테 미안한 마음은 있을 수밖에 없다. 농성도 많이 하고 감옥도 가고 걱정을 끼쳤다. 계속 이해시키는 작업을 하긴 했다. 딸들이 어릴 때, 농성하거나 단식하는 데 와서 뛰어다니기도 했다. 아빠의 일을 이해해왔다. 절대 나처럼 안 산다고는 하지만 잘 통하는 게 있다.

2권도 계획 중이라고. 올해 계획도 들려달라.

동학혁명 유적이나 민간인 학살 터, 순교지, 형평사 운동 등의 이야기를 2권에서 준비 중이다. 준비가 덜 되어서 이번에 넣지 못했다. 내가 정답이라고 생각은 안 한다. 독자들이 현장을 찾아가 각자 느껴봤으면 좋겠다. 내가 속한 ‘열린군대를 위한 시민연대’에서 한국전쟁 70주년과 관련된 사진전을 준비하고 있다. 6월 중에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열린다. (시민사회계에선) 나눔의집이 더 큰 문제인데, 후원하는 사람들이 뜻하는 바대로 운영되려면 어떻게 풀어가야 하나 대책을 궁리 중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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