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형제복지원 피해 생존자인 최승우씨는 “이제 중요한 것은 트라우마 치료”라고 말한다. 상처 치유의 첫 단계는 진상규명이다.

일부러 5월5일을 골랐다. 어린이날이었다. 미리 준비해둔 사다리를 타고 국회 의원회관 출입문 지붕 위로 올라가며 최승우씨(52)는 자신이 잃어버린 어린이날들을 떠올렸다. 그는 1982년 4월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마주친 한 경찰에 의해, 책가방에 든 빵이 슈퍼에서 훔친 것이라는 ‘즉석재판’을 받고 곧장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다. 가방에서 나온 빵은 형편이 여의치 않은 학생들에게 정부가 지원하던 빵이었다. 이혼한 부모 대신 할머니와 함께 살던 그가 집에 가서 먹으려고 아껴둔 빵이기도 했다. 얼마 뒤에는 오락실에서 놀고 있던 최씨의 동생이 형제복지원에 잡혀 들어왔다. ‘거기서 사람을 때려직인다 카더라’는 소문을 들은 아버지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형제복지원을 찾아온 건 1986년 10월이었다. 4년6개월 만에 세상에 나온 그의 어린 시절은 온 적도 없이 지나가 있었다.

사다리를 한 칸 한 칸 올라가며 최씨는 올해 어린이날만은 꼭 선물을 받겠다고 다짐했다. 중년이 된 그가 원하는 어린이날 선물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과거사법) 개정안’ 통과였다. 2005년부터 2010년까지 5년 동안 보도연맹 사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굵직한 과거사 정리를 위해 활동했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에서 미처 다루지 못했던 사건들을 재조명할 기회였다. 보름 뒤인 5월20일에는 제20대 국회 마지막 본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다. 제20대 국회에서도 과거사법이 통과되지 않는다면 최씨는 아예 내려오지 않을 작정이었다.

고공 농성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애초에 고공 농성으로 시작했던 것도 아니다. 2012년 5월 또 다른 피해 생존자 한종선씨(45)가 국회 앞에서 연 1인 시위가 첫 신호탄이었다. 1984년 10월 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던 한씨는 당시 아홉 살이었다. 두 남매를 파출소에 맡긴 구두닦이 아버지도 나중에 형제복지원으로 잡혀 들어왔다. 1987년 형제복지원 비리가 밝혀진 뒤 시설이 폐쇄되면서 한씨는 아무런 준비 없이 사회로 내쫓겼다. 누나와 아버지는 평생 정신병원을 떠돌았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한씨가 국회 앞에 서서 직접 적은 피켓을 들기까지 25년이 걸렸다. ‘정부 정책 실패로 빚어진 인권유린 사건을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오히려 잠재적 범죄자 취급만 하고 있습니다.’ 피해 생존자가 최초로 형제복지원 사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순간이었다.

최승우씨는 ‘형제복지원’을 검색하다 한종선씨를 알게 됐다. “옛날에 삼보컴퓨터 쓰던 시절 있잖아요. 그때부터 저는 계속 ‘형제복지원’ 검색을 했어요. 누가 사건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싶어서.” 형제복지원이 운영되던 1975년부터 1987년까지 12년 동안 2만여 명이 입소했고 이 중 최소 513명이 숨졌지만 ‘사건’이 되지 못했다. 온갖 폭력과 불법을 눈감았던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이 횡령한 국고지원금은 11억4254만원에 달했다. 당시 수사를 이끌던 부산지방검찰청 울산지청 김용원 검사는 사건을 축소해 빨리 덮으라는 외압에 시달렸다. 그나마 횡령죄만은 적용했다. 박인근 원장은 징역 2년6개월을 살았다.

가해자는 감옥에서 나와 형제복지원 부지를 판 돈으로 온천, 스포츠센터, 복지시설 등을 세우며 자산을 불려나갔다. 피해 생존자 최승우씨는 분노를 키워나갔다. “뭔가 말은 하고 싶은데 말이 잘 안 나왔죠. 감정은 꽉 차 있는데 말을 못 찾겠더라고요.” 시설이 폐쇄된 뒤 다시 만난 친구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지만 그녀의 부모는 최씨가 ‘부랑아’였다는 이유로 만나지 못하게 했다. 둘 사이에 낳은 아이는 입양 갔고 그녀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국 사회에 진절머리가 난 그는 밀항하려다 실패하고 5년간 원양어선을 탔다.

상승곡선을 그리던 가해자와 하강곡선을 그리던 피해 생존자는 2002년 경북 울진에 있는 ㄷ온천 주차장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최승우씨는 박인근 원장을 한눈에 알아봤다. 10여 차례 탈출을 시도해서 잡혀올 때마다 교회 단상에 세워놓고 “너희를 예수의 이름으로 벌한다”라며 마구잡이로 주먹을 날리던 사람이었다. “딱 보고 너무 놀라서 자빠지겠더라고. 나는 박인근이 그때 사형이라도 받은 줄 알았거든. 이미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렇게 심각한 일이었는데…. 순간 눈이 확 돌아가더라고요. 마침 옆에 나무 몽둥이 같은 게 있어서 들고 막 뛰어가는데 박인근이 차 문을 잠그더니 도망가더라고. 그 외제차 브랜드가 잊혀지지 않아요. 충격이었죠.”

박인근 원장이 제대로 처벌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최승우씨는 그날 이후 자주 인터넷에 형제복지원을 검색했다. 2013년 11월 한종선씨가 나온 기사를 본 최씨는 ‘드디어 사건이 됐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는 기자에게 메일을 보내 자신도 피해 생존자임을 밝혔다. 얼마 뒤 형제복지원 서울대책위원회에서 연락이 왔다.

알고 보니 한씨와 최씨는 형제복지원에서 같은 24소대에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서로를 알지 못했다. “1982년에 제가 잡혀왔을 때는 사람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는데 1984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사람들을 잡아오기 시작했거든요. 왜냐하면 1986년에 아시안게임이 있고 1988년에 올림픽을 앞두고 있었으니까. 1984년 당시에는 한 소대에 100~110명 정도 있었어요.”

ⓒ시사IN 신선영2019년 11월27일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 지붕에 올라가 단식 농성을 벌이고 있는 최승우씨.

형제복지원 사건은 ‘국가폭력’의 결과

당시 경찰이 영장도 없이 한 시민을 ‘부랑인’으로 판단해 형제복지원에 감금하는 즉결처분이 가능했던 건 1975년 박정희 정권이 만든 행정규칙 ‘내무부 훈령 410호(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조치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지침)’ 때문이었다. 1975년 부산시는 내무부 훈령 410호에 따라 형제복지원과 부랑인 수용·보호 위탁계약을 체결했다. 형제복지원이 12년 동안 유지될 수 있었던 건 박인근 원장 한 사람의 탐욕 때문만이 아니었다. 경찰의 집행과 시의 행정을 등에 업은 형제복지원은 당시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아 수용시설이 됐다. 생존자들이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폭력’의 결과라고 이야기하는 이유다. 최승우씨도 자신이 당한 고통이 국가가 공모한 폭력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렸다. “젊었을 때는 왜 더 일찍 데리러 오지 않았느냐며 아버지를 많이 원망했어요. 누군가에게는 사과받고 싶은데 사과를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으니까.”

2015년 4월28일 한종선씨와 최승우씨를 포함한 피해 생존자 11명이 형제복지원 진상조사 특별법 통과를 요구하며 국회 앞에서 머리카락을 깎았다. 여야가 특별법을 위해 공청회를 연다는 소식을 듣고 58일 만에 농성을 풀었지만 그뿐이었다. 2015년 12월7일 한씨와 최씨는 단식에 들어갔다. 8일째에 한씨가 쓰러졌다. 둘 다 병원으로 옮겨졌다. 특별법은 ‘(배·보상 관련해) 사회적 비용이 많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안전행정위원회 법안심사위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이야기를 하던 최씨가 가슴을 움켜잡았다. “그게 첫 믿음이었는데 깨져버리니까 정말 상처를 받았죠.”

피해 생존자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2017년 9월6일 희망과 기다림을 상징하는 노란색으로 점퍼를 맞춰 입은 그들은 국토대장정에 나섰다. 지금은 아파트단지가 된 부산 형제복지원 옛터에서부터 서울 청와대 앞까지 22일 동안 486㎞를 걸었다. 두 달 뒤인 11월7일에는 한종선씨와 최승우씨가 다시 국회 정문 앞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제20대 국회에서만은 특별법을 통과시키고 싶었다. 처음에는 천막을 치지 못하게 해서 엉성한 뼈대에다 비닐을 휘둘러 감아 바람을 막았다. 첫날에는 바닥에 깐 매트 한 장과 이불 한 장이 농성장 살림의 전부였다. “그때는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죠. 국회에 대해서 몰랐던 거죠.”

새벽에 버스나 오토바이 소리에 잠이 깨면 지하철이나 맞은편 건물 화장실에서 고양이 세수를 했다. 청소하는 분이 힘들까 봐 세면대 주변에 튄 물자국은 항상 깨끗이 닦고 나왔다. 아침은 굶었다. 둘 다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초수급비로만 생활비를 충당해야 했다. 대신 점심은 잘 챙겨 먹기로 했다. 주로 의원회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의원들에게 얼굴도장을 찍었다. “원래는 4800원을 주고 먹었는데 하도 가다 보니까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저희를 직원 가격인 3600원에 해주셨어요.”

저녁은 농성장에서 라면으로 때웠다. 시민들과 활동가들이 도시락을 싸오는 날도 있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도 정말 많다는 걸 깨달았다. 사회에 대한 신뢰를 조금씩 복구해나가는 과정이었다. 최씨에게 농성장은 집이기도 했지만 청소년기에 끊겨버린 인생 공부를 이어가는 학교이기도 했다. “종선이가 쓴 표현이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라는 말에는 정말 큰 의미가 담긴 거예요. 당사자들이 더 이상 짐승과 같은 삶을 살지 않고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하는 과정이 있어야 당당하게 국가에 저항할 수 있더라고요. 한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가 지금까지 버틴 것 같아요.”

농성을 이어가던 중인 2018년 10월3일 최씨는 연극 〈편육〉을 통해 배우로서 무대에 데뷔하기도 했다.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머리카락도 길렀다. “1시간10분짜리 공연인데 객석이 꽉 찼어요. 저를 보러 와준 사람들이 많았어요. 심장이 기분 좋게 뛸 수도 있구나, 그걸 처음 느꼈어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엄청 얻었고요.”

고맙고 행복한 순간만큼 힘든 순간도 많았다. 농성 초기에는 후원금을 받자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한종선씨와 최승우씨가 강하게 반대했다. “돈이 들어오기 시작하면 우리 안에서도 분란이 일어나게 되잖아요. 비록 처음에는 다들 순수한 의도로 시작하겠지만 자꾸 무언가를 하려고 하거나 무언가를 만들려다 보면? 조심스럽죠.”

‘불쌍하다’고 보는 단순한 동정도 둘을 지치게 했다. 언론도 자극적인 생존자 이야기만 반복해서 보도했다. “피해자를 피해자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국가폭력 피해자이기 이전에 똑같은 사람으로서 대해줬으면 해요. 제가 ‘함께’라는 말을 많이 쓰거든요. 아무리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너는 가만있어, 우리가 알아서 할게’ 이러면 피해 생존자들은 계속 피해자 역할만 하게 되고 자극적인 소재만 말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트라우마를 계속 생성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제 피해 생존자들이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에 초점을 맞춰야죠. 무엇보다 트라우마 치료가 중요해요. 트라우마는 전이되거든요. 피해 생존자가 결혼하면 배우자, 배우자의 주변 사람, 자식, 자식의 주변 사람까지 다 전이가 돼요.”

상처 치유의 첫 단계는 진상규명이지만 쉽지 않았다. 2017년 11월7일 형제복지원 진상규명 특별법 통과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간 최승우씨는 2년이 다 되도록 별다른 진척이 없자 고공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함께 농성장을 지키고 있던 ‘종선이’에게는 미리 말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선택이라며 말릴 게 분명했다. 농성 2주년을 하루 앞둔 2019년 11월6일 최씨는 국회 정문 바로 앞에 위치한 국회의사당역 6번 출구 지붕 위로 올라갔다. 들고 올라간 건 천막과 침낭뿐이었다.

단식 15일째 되던 날 국회 본관 앞에서 황교안 당시 자유한국당 대표가 패스트트랙 법안을 저지하기 위해 단식에 들어갔다. “나는 여기에 보름 동안 올라와 있어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는데 저기는 따뜻한 난로도 있고 시중드는 사람도 있고…. 단식에도 흙수저가 있고 금수저가 있구나 소외감이 확 들더라고요.” 황교안 전 대표는 8일 만에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 최씨는 버티고 또 버텼다. “형제복지원에서 맨날 굶었으니까. 어떻게 보면 형제복지원이 저를 이렇게 강하게 만든 거죠.” 너무 배가 고플 때는 대리만족이라도 하려고 휴대전화로 먹방 프로그램을 보기도 했다.

단식 24일째이던 11월29일 나경원 당시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순간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보름 동안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최씨는 고집스럽게 다시 농성장으로 돌아왔다. 지난 5월5일 그는 다시 한번 고공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제20대 국회 마지막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이번에는 국회 의원회관 출입문 지붕이었다. ‘의원실이 있는 건물 출입구가 막히면 다들 한 번씩이라도 쳐다봐주겠지.’ 연극무대에 올라간 배우가 된 심정이었다. 단식 중이었지만 건물 앞을 지나가는 의원이 있으면 목청껏 이름을 불러 인사했다. “연극도 사람들한테 소리치고 주목을 받아야 비로소 관심을 받잖아요. 저는 거기 올라가서 연극 한 편을 했던 것 같아요. 자랑스럽게.”

ⓒ연합뉴스5월20일 과거사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자 형제복지원피해생존자모임, 서산개척단사건진상규명대책위,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 등 국가폭력 피해자들이 국회 본관 앞에서 기뻐하고 있다.

과거사법 본회의 통과, “이제 첫발을 뗀 거죠”

이틀 뒤인 5월7일 여야가 과거사법을 본회의에 상정해 처리하는 데 합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중재에 나선 미래통합당 김무성 의원이 이제 그만 내려오라고 했다. 최씨는 한 가지 조건을 더 달았다. 국회에서 두 번이나 고공 농성에 들어간 본인 때문에 혹시라도 경호과 직원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걱정됐다. ‘과거사법 본회의 통과’와 ‘경호과 직원 문책 금지’라는 두 가지 조건이 받아들여졌다. 이번에는 사흘 만에 땅을 밟을 수 있었다.

5월20일 과거사법은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부산에서 위암 투병 중인 아버지가 전화를 했다. “우리 아들 장하다.” 그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지 몰라 서로 원망하던 긴 세월이 스쳐 지나갔다.

5월21일 최승우씨와 한종선씨는 927일 동안 투쟁했던 농성장 천막을 정리했다. 과거사법이 통과되고 난 뒤 부산에 있는 형제복지원사건 피해자종합지원센터에는 하루 평균 40건씩 전화가 걸려온다. ‘부랑아’라는 낙인을 숨기고 살았던 피해 생존자뿐만 아니라 실종자를 찾는 가족의 전화도 많다. 최승우씨는 여전히 노란색 점퍼를 입고 다닌다. “이제 첫발을 뗀 거죠. 진상규명이 완전히 될 때까지는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요.”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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