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초등학교 5학년 여학생 30여 명과 성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한창 남성과 여성의 몸, 음순과 음경의 모양, 성기 결합 섹스 방법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뒤 혹시 질문이 있느냐고 물었다. 안타깝게도 여성의 경우 연령과 지위를 떠나, 질문이나 의견을 말하는 경우가 적다. 성 이야기는 특히 그렇다. 뭔가 말을 하려고 나서는 여학생의 존재는 무척 반갑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가려는데 맨 앞에 앉아 있던 학생이 손을 들었다.

“선생님 그럼, 남자끼리나 여자끼리 섹스하는 방법도 알려주실 수 있어요?” 훅 들어온 질문에 머릿속에 ‘삐-’ 하고 일시정지 알람이 울렸다. 질문을 마친 학생은 노트 위에 샤프를 쥔 손을 올려놓고 평온하게 받아 적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 역시 별 당황하는 기색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설명은 사실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이 시간을 주관한 공공기관과 저기 맨 뒷자리에 앉아 있는 공공기관 실무자, 내 대답을 학생을 통해 들을 수도 있는 부모님의 반응, 이 강의 이후 연결될 수 있는 다른 기회 등이 빠르게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뿐이다. ‘불이익’이라는 단어와 함께.

생각해보니 ‘동성끼리 섹스가 가능하다고 생각하는지’ 혹은 ‘동성애를 찬성 혹은 반대하는지’를 묻는 질문은 많이 받아봤다. 그러나 이번처럼 당연함을 전제로 구체적인 방법을 질문받은 건 처음이었다. 또 질문하는 학생의 태도에는 성 이야기 시간에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자연스러운 궁금함, 무엇보다 대상화하지 않는 시선이 있었다. 편견 없이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이 거기 있었다.

이는 살짝 과장해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다. 사회가 성을 터부시해온 역사 속에는 솔직하고 편견 없는 성을 이야기할 기회가 없었다. 우리는 이런 흐름에 이의를 제기하며, 성에 대한 평등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통해 성의 일상성과 보통성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나온 학생의 질문은 ‘노력의 결실!’이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결실이 눈에서 초롱초롱 빛나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성애의 성을 기본값으로 두고 다른 성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을 나의 불이익과 연결시키는 건 부끄러운 일 아닌가. 마침 실무자 선생님은 다른 일로 바빠 보였고, 질문을 던진 5학년 당사자 학생과 다른 친구들은 다행히 정신 차린 강사에게서 들어야 하는 답을 듣고 돌아갈 수 있었다. 나는 콧구멍·귓구멍 등을 후비적후비적하면서 몸에 있는 다양한 구멍을 읊었다. 구멍의 다양한 쓰임새에 대해서도. 담담한 강사의 말을 아이들도 담담히 받아들였다.

성소수자가 제대로 나설 수 없는 사회

얼마 전 성소수자인 동료 성교육 강사가 ‘내 덕’을 봤다며 인사치레를 해왔다. 지인과 서울 이태원 클럽발 집단감염 관련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소수자들은 제대로 나서서 수습하지 못할 행동을 왜 하느냐’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내 사연을 팔아서 이렇게 대답했다. “내 친구 봐라. 모름지기 성평등한 성교육을 한다는 이성애자 강사도 이성애 외에 다른 성관계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불이익’을 떠올리며 긴장하게 되는데,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성소수자라는 걸 말하기가 쉽냐!”

우리 사회 성소수자 혐오를 마주할 때면 그 학생의 질문과 나의 반응을 종종 떠올린다. 그 학생은 다른 사람의 성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을 비난하거나, 이를 문제의 원인으로 착각해 그들의 섹스를 대상화하고 혐오하는 이 사회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 학생이 앞으로도 자신이 궁금해하고 배웠던 동성애 섹스를 대상화하지 않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기를. 그런 ‘미래’가 늘어날수록 이 ‘근본 없는 혐오’도 결국은 사라질 테다.

기자명 심에스더 (성교육 전문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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