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순간의 풍경을 담아낼 수 있는 시대에 그림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심지어 이제 스마트폰 카메라 성능은 웬만한 카메라 못지않고, 손쉽게 여러 가지 필터를 적용해서 한 장의 사진으로 다양한 느낌을 낼 수 있는데 말이다.

그 대답은 아마도 그림 속에 있을 것이다. 〈동쪽 수집〉은 윤의진 작가가 두 해 동안 동해 바다와 태백산맥 사이의 작은 마을에 살면서 그린 그림을 엮은 책이다. 이 책에는 보는 순간 압도되는 태백산맥의 웅장한 풍광이나 자연에서 깨우친 심오한 철학 같은 것은 없다. 오히려 잔잔한 파도와 밤하늘에 단정한 새벽달, 소나무 한 그루, 학교 건물에 드리운 그림자, 해 질 녘의 아파트, 날아가는 갈매기 떼, 청명한 보리 들판, 귀여운 고양이, 해가 지고 가로등 불빛도 없이 깜깜한 밤의 공원처럼 소소한 풍경이 가득하다. 색연필로 층층이 색을 쌓아 올린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어느새 어떤 감정이 보는 이에게 스며들기 시작한다.

포근하면서도 쓸쓸한 감정의 기록

본래 자연에는 감정이 없다. 햇살, 그림자, 파도, 바람, 구름이란 존재들은 무심하기 짝이 없다. 자연은 감정이 없고 우리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는 자연의 그런 면모에서 위로받는지도 모른다. 눈부신 햇살에 따뜻함을 느끼고 잔잔한 파도에서 쓸쓸함을 맛보고, 초록을 찬란하다고 여기며 해 질 녘의 어둠을 그리워한다. 자연은 우리에게 순간적인 인상을 남기고 때때로 그것은 영원한 추억이 되기도 한다.

〈동쪽 수집〉에는 그러한 자연과 일상적인 풍경 속에 스며든 포근하면서 사랑스럽지만 때로는 쓸쓸하면서 한없이 슬픈 감정의 기록이다.

책을 따라 여덟 번의 계절이 흘러가는 강원도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함께하다 보면 작가가 그림마다 곁들인 글처럼 여러 감정이 일렁거리며 마음을 간지럽힌다. 그림 한 장 한 장이 모두 사랑스럽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지금 당장 동해로 달려갈 수는 없지만 시원한 파도의 모습에서 성큼 다가온 여름의 심상(心象)이 전해진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자연의 풍경을 바로 곁에서 바라보기조차 힘들다. 그만큼 닳아 없어지기 쉬운 감수성을 한 권의 그림책으로나마 달래본다.

기자명 박성표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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