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기회다 - 행복한 방구석 고전 만화 전작에 도전해보자

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가 고전 만화를 추천한다. 전작 독서가 가능한 장편 중에서 SF, 가족 드라마, 모험 판타지, 대하 역사만화 장르 대표작을 소개했다. 

 

 

가족과 함께 고전 만화 보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미션이다. 고전의 범위가 넓은 데다가 복간된 몇몇 작품을 제외하면 절판되어 만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라이파이〉(김산호), 〈도전자〉(박기정), 〈폭탄아〉(박기정), 〈약동이와 영팔이〉(방영진), 〈땡이의 사냥기〉(임창), 〈요철발명왕〉(윤승운), 〈신판 보물섬〉(길창덕) 같은 1960~1970년대 만화들이 한국만화영상진흥원의 ‘한국 만화 걸작선’으로 복간되었지만 초판 출간 후 절판된 것들이 많다. 절판의 지뢰밭을 건너가면 각각 다른 취향을 지닌 10대부터 60대까지 전 연령을 아우를 수 있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니다. 전작 독서가 가능한 장편 중에서 SF, 가족 드라마, 모험 판타지, 대하역사 만화 장르 대표작을 고른 뒤 함께 볼 수 있는 작품도 소개했다.

마음의 구멍에 대하여
이와아키 히토시, 〈기생수〉(학산문화사)

ⓒ학산문화사〈기생수〉는 소재 특성상 잔인한 장면이 꽤 많이 나온다.

코로나19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문득 그동안 하지 않던 질문을 던지게 된다. 빈곤층에 집중된 사망자를 보며 우리가 사용하는 자원은 공정하게 배분되었나? 인간이 멈추자 살아나는 자연을 보며 인간의 욕망이 지구를 착취했던 건 아닌가? 무엇보다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이라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는다.

전염력이 높고 치사율이 높은 바이러스의 공격. 만화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기생수〉를 떠올린다. 〈기생수〉는 1988년부터 1995년까지 일본 만화잡지에 연재된 만화다. “지구에 사는 누군가가 문득 생각했다”라며 “인간의 수가 절반으로 준다면 얼마나 많은 숲이 살아남을까…/ 인간이 100분의 1로 준다면 쏟아내는 독도 100분의 1이 될까…/ 모든 생물의 미래를 지켜야 한다”라는 내레이션으로 만화를 시작한다. 테니스공 정도 크기의 코로나바이러스를 닮은 정체불명의 생명체가 코나 귀를 통해 침입해 인간의 뇌를 빼앗는다. 인간의 뇌를 장악한 기생수는 다른 인간을 잡아먹는 포식자가 된다. 고등학생 신이치의 오른손을 파고든 기생수는 뇌를 장악하는 데 실패한다. 오른손만 차지한 기생수는 ‘오른쪽이’라 불리며 신이치와 공존하게 된다.

의문의 존재가 몸을 빼앗는다는 ‘신체 강탈(Body Snatchers)’은 1955년 잭 피니의 소설 〈보디 스내처(The Body Snatchers)〉 이후  다양하게 변주되는 설정이다. 지구를 지키기 위해 인류가 모르는 존재가 지구를 침입한다는 설정 역시 낯설지 않다. 지구를 파괴하는 기생수를 막아낼 천적이 없는 상황. 기생수와 동거하며 지니게 된 강력한 힘으로 그것과 싸우는 고등학생 신이치만 그렸다면 흔한 액션만화가 되었을 것이다. 〈기생수〉의 진짜 매력은 ‘마음의 사유’다. 이와키 히토시는 ‘구멍 뚫린 마음’을 구체적으로 묘사한다. 작품 전반부에 신이치는 어머니의 몸을 강탈한 기생수와 마주한다. 어머니가 아니라는 걸 알지만 죽이지 못하고 오히려 공격당해 심장에 치명상을 입는다. ‘오른쪽이’는 심장으로 이동해 신이치를 살린다. 살아난 신이치는 가슴에 큰 상처가 남는다. 이 에피소드 이후 〈기생수〉는 구멍 난 마음을 여러 사건을 통해 구체화한다. 재난의 시대에 〈기생수〉를 다시 읽는 건 육체의 구멍과 마음의 구멍에 대한 공감의 과정이다. 머리를 자유자재로 변형해 사람을 포식하는 기생수의 특성상 폭력적이거나 잔인한 장면이 꽤 많이 나온다. 적정 관람등급은 15세 이상, 부모의 지도가 필요하다.

엄마·아빠의 ‘라떼는 말이야’
이빈, 〈안녕?! 자두야!!〉(학산문화사)

ⓒ학산문화사〈안녕?! 자두야!!〉는 에피소드형 가족 드라마다.

가족 드라마는 만화의 스테디셀러 장르다. 늘 인기가 좋지만 고난의 시기에는 더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 미국식 가족 드라마의 전형인 〈블론디(Blondie)〉는 대공황 시기이던 1930년 9월8일부터 연재를 시작해 아버지에 이어 아들이 여전히 연재 중이다. 가족 드라마는 범인을 찾거나, 사랑의 결실을 맺거나, 우승컵을 들어 올리는 것 같은 명확한 목표가 없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등장해 자기 삶을 살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보여준다. 얼마만큼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캐릭터들을 구현하느냐에 가족 드라마의 성패가 달렸다. 그러다 보니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주로 활용한다.

나와 내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기 위한 선택지는 두 가지다. 지금 내 이야기를 그릴 것인가, 아니면 내가 어렸을 때 이야기를 그릴 것인가. 다음 웹툰에 연재 중인 난다의 〈어쿠스틱 라이프〉(애니북스)는 지금 내 이야기를 그린 가족 드라마다. 엄마·아빠가 어렸을 때를 그린 대표작은 이빈의 〈안녕?! 자두야!!〉다. 부모 세대의 어린 시절을 그린 가족 드라마는 부모와 아이 모두를 만족시킨다.

〈안녕?! 자두야!!〉는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짠순이 엄마,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아빠, 주인공 자두, 여동생 미미와 남동생까지 총 다섯 명인 한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에피소드형 가족 드라마다.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게 담아 전달하는 회고적 성격의 만화이기 때문에 모험이나 사랑 같은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돌아보면 우리의 추억이 그렇듯 소소한 기억 하나하나가 유쾌하다.

오전, 오후반으로 나뉜 2부제 수업 같은 그 시대의 특별한 제도는 물론 ‘스카이콩콩’ 같은 유행 아이템도 등장한다. 무엇보다 자두와 동생, 친구들이 함께 노는 골목과 공터가 인상적이다. 2018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아파트 거주 인구가 50%를 넘어섰으니 골목과 공터에서 함께 노는 풍경만으로도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달라진 부분도 많지만, 엄마 아빠가 어렸을 때에도 서로를 아껴주는 가족이 있었고, 함께 노는 친한 친구들이 있었다는 것만은 지금과 다르지 않다. 총 33권이 출간되었다. 아직 완결되지 않아서 전작(全作) 독서라는 취지에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대개 한 편 한 편이 독립된 에피소드여서 끝까지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조경규의 〈오무라이스 잼잼〉(송송책방)은 가족과 음식을 묶은 작품으로 2010년 다음 웹툰에 연재를 시작해 단행본 10권으로 완간된 만화다. 10권 분량이니 정주행하기 적당하다. 토마토, 샌드위치, 카스텔라, 포테이토칩, 짜장면, 사발면, 코카콜라, 바나나맛 우유, 맛동산, 달걀 프라이, 소시지전, 팥빙수, 활명수와 같은 음식을 다룬다. 쉽고 친근하며 따뜻한 만화다. 가족과 요리라는 키워드의 원조는 일본에서 1985년부터 연재 중인 우에야마 도치의 〈아빠는 요리사〉(학산문화사)이다. 2020년 1월 한국어 번역판 기준 141권이 출간되었으니 정주행하기에는 좀 아득하다. 그래도 일본 요리만화의 걸작으로 손꼽히니 도전해볼 만하다.

〈안녕?! 자두야!!〉가 엄마·아빠의 어린 시절을 그린 에피소드형 가족 드라마였다면, 마리모 라가와의 〈아기와 나〉(대원씨아이)는 어머니를 잃은 초등학교 5학년 다쿠야가 두 살짜리 동생 미노루를 돌보는 가족 드라마다. 아버지는 회사 일에 바빠 어린이집에 다니는 동생은 다쿠야가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육아는 다쿠야를 당황스럽게 하고, 때때로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이 찾아오기도 하지만 꿋꿋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다쿠야의 육아와 함께 같은 학교 친구 관계 등이 얽힌 가족, 육아, 학원 장르를 포괄하는 만화다. 일본 잡지에 1991년부터 1997년부터 연재된 고전 만화로 한국에는 1993년부터 발행되었다.

어른들만 보기 아까운걸
고우영, 〈아라노와 오가녀〉 〈거북바위〉(애니북스)

ⓒ시사IN 신선영〈아라노와 오가녀〉(왼쪽)와 〈거북바위〉.

어떤 이야기라도 스펀지처럼 빨아들여 자신만의 스타일로 탄생시킨 고우영의 장편 극화는 시대를 넘어 꾸준히 사랑을 받는 만화의 대명사다. 고우영은 1972년 1월1일 스포츠신문 지면에 〈임꺽정〉을 발표하며 ‘어른들이 보는 만화’인 ‘극화’ 시대를 연다. 극화(劇畫)는 일본에서 시작된 용어이지만, 고우영에 의해서 역사와 픽션을 넘나드는 한국형 이야기 만화로 다시 태어났다. 중국과 한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고우영 극화(〈수호지〉 〈삼국지〉 〈일지매〉 〈서유기〉 〈초한지〉 〈십팔사략〉 등)는 대부분 복간되어 꾸준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고우영은 성인 극화로 유명하지만 어린이를 위한 만화도 많이 그렸다. 고우영은 1954년 15세 때 단행본 〈쥐돌이〉를 출간하며 데뷔한다. 1958년 둘째 형 고일영이 ‘추동식’이라는 필명으로 연재하던 〈짱구박사〉를 ‘추동성’으로 이어 그리며 유명해진다. 1970년대 이후 스포츠신문에는 성인용 고전 극화를, 어린이 잡지에는 어린이용 고전 극화를 연재한다. 2008년 1~2권 내외로 끝나는 중편 분량의 만화들이 ‘신고전열전’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놀부전〉 〈통감투〉 〈바니주생전〉 〈거북바위〉 〈흑두건〉 〈아라노와 오가녀〉까지 6개 타이틀 중 〈아라노와 오가녀〉와 〈거북바위〉만 어린이 만화로 발표되었다.

〈아라노와 오가녀〉는 삼국시대 이전 부족국가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역사만화로 1972년 〈소년한국일보〉에 연재된 뒤 재편집해 1976년 새소년 클로버문고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강마을 아비달 촌장의 쌍둥이 아라노와 오가녀는 인근 부족의 소년 소녀들이 모인 겨루기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아라노는 뒷산에서 무술 연습을 하다 주몽을 만난다. “나는 고주몽이라는 사람이다. 너 같은 씩씩한 아이들을 찾는 중이다. (중략) 나는 이 넓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하나로 뭉친 큰 나라를 이룩하려는 사람이다.” 아라노는 주몽을 찾아 길을 떠나고, 이런저런 인연들을 만난다.

〈거북바위〉는 만화방용 단행본 〈도술 삼형제〉를 1979년부터 1981년까지 어린이잡지 〈소년중앙〉에 다시 그려 연재한 한국식 판타지 만화다. 익숙한 옛날이야기처럼 “마을 어귀에 외딴집이 있었습니다. 커다란 굴뚝이 있는 대장간이었어요”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대장간을 운영하는 〈삼국지〉의 장비를 닮은 돼지 아저씨가 배고파 쓰러진 화동이를 구해준다. 화동이는 맹산에서 높은 벼슬을 한 아버지의 세 아들 중 막내. 화동이가 여섯 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형 물호는 3년 동안 각자 한 가지씩 재주를 익힌 뒤 다시 만나서 막중한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유언을 전해준다. 어떤 임무인지는 말할 수 없지만 어마어마한 황금덩어리와 관계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둘째 형 풍갈은 그 소리를 듣고 욕심이 가득한 표정을 짓는다. 독자들은 풍갈의 표정만 봐도 어렵지 않게 앞으로 그가 악당이 될 거라고 예상할 수 있다. 이처럼 〈거북바위〉는 착한 편과 나쁜 편을 구태여 감추지 않는다.

물호·풍갈·화동 세 형제는 뒷동산에 올라 느티나무에 단검을 꽂는다. 3년 뒤 이곳에서 다시 만나자는 표적이다. 그렇게 형제와 헤어진 화동은 길을 헤매다 대장간 돼지 아저씨와 살게 되었는데, 어느 날 무사가 나타나 노스님에게 데려간다. 화동은 노스님에게 불을 사용하는 도술 수련을 받는다. 물호는 이름처럼 물을 쓰는 도술을, 풍갈은 바람을 쓰는 도술을 익힌다. 풍갈은 스승인 광풍도사를 속이고 도술 부채 백우선을 훔친 뒤 도적의 우두머리가 된다. 3년 뒤 물, 바람, 불 도술을 익힌 세 형제는 단검을 꽂고 헤어졌던 느티나무 아래에 모인다. 물호는 오랑캐에게 도둑맞은 황금 부처를 찾아오라는 아버지의 유언을 전해준다. 삼형제는 황금 부처를 찾기 위한 길을 떠난다.

ⓒ시사IN 신선영초등학교 고학년이면 고우영의 성인 극화 정도는 소화할 수 있다. 위는 〈삼국지〉.

1970년대 작품인 〈아라노와 오가녀〉 〈거북바위〉는 계속 강한 적이 끝없이 등장하는 게임을 닮은 요즘 만화와 다르다. 마치 판타지의 정석처럼, 임무를 받고 길을 떠나 고난 끝에 성공하는 이야기가 정갈하게 펼쳐진다. 힘을 빼고 약화로 그리기 전 고우영의 그림도 힘이 넘친다. 당시 어린이용으로 연재되어 권선징악의 스토리가 명확하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초등학생 시절 삼촌 책꽂이에 있던 고우영의 〈삼국지〉를 처음 읽었다. 〈삼국지〉 〈수호지〉 〈일지매〉를 연달아 읽으며 ’이렇게 재미있는 만화를 어른들만 보고 있었구나’ 생각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고학년이면 고우영 성인 극화 정도는 소화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폭을 넓히면 〈삼국지〉 〈일지매〉 〈십팔사략〉까지 정주행의 범위가 넓어진다.

대중의 열망을 담아낸 충격적인 데뷔작
김혜린, 〈북해의 별〉(대원씨아이) *전자책

ⓒ김혜린/대원씨아이〈북해의 별〉은 18세기 유럽 대륙을 배경으로 한다.

여러 장르 중 완결된 만화를 쌓아놓고 보기에 적합한 장르는 역사만화다. 역사만화 중 초장편들에 ‘대하(大河)’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명칭 그대로 거대한 강처럼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는 작품을 구분해 ‘대하 역사만화’ ‘대하사극’ ‘대하 역사극화’ 등으로 구분했다. 소설·드라마·만화 등 매체를 뛰어넘어 장강처럼 흐르는 거대한 서사물들은 ‘대하’라는 수식을 별처럼 달고 독자를 찾았다. 1980년대는 대하소설의 시대로 기억되지만, 만화도 마찬가지였다. 이두호의 〈객주〉(바다출판사), 백성민의 〈장길산〉(절판)처럼 대하소설을 각색한 만화도 있지만, 역사의 소용돌이를 살아가는 인물의 로맨스를 그린 대하 역사만화도 큰 인기를 끌었다. 1980년대 불법으로 번역, 소개된 이케다 리요코의 〈베르사이유의 장미〉(대원씨아이)나 〈오르페우스의 창〉(대원씨아이)은 혁명과 대륙을 넘나드는 스케일로 독자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1980년대 황미나는 〈이오니아의 푸른별〉(1980), 〈아뉴스데이〉(1982), 〈굿바이 미스터 블랙〉(1983), 〈불새의 늪〉(1984)으로 이어지는 대하 로맨스를 발표해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모두 학산문화사에서 전자책으로 서비스하고 있다).

만화방용 여성 만화가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휘감아 흐르는 로맨스를 다루는 와중에 충격적인 데뷔작이 등장했다. 1983년 김혜린은 〈북해의 별〉을 발표하며 데뷔한다. 〈북해의 별〉은 18세기 유럽 대륙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공화혁명을 다룬 만화다. 명문 귀족이며 뛰어난 해군장교인 유리핀 멤피스는 음모에 휘말려 유배지에 수감된다. 유리핀 멤피스는 억울한 죄수들과 함께 탈옥해 ‘검은 날개’ 해적단을 결성한 뒤 바다에서 보드니아를 돕다 공화 혁명에 나선다.

〈베르사이유의 장미〉는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하지만 독자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젠, 오스칼과 앙드레의 사랑을 따라가게 된다. 〈오르페우스의 창〉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거쳐 마침내 볼셰비키 혁명의 러시아로 무대가 옮겨지지만, 해적판에서는 핀란드 혁명으로 수정될 정도로 로맨스가 중심이었다. 황미나 만화도 로맨스가 중심이다. 〈북해의 별〉은 로맨스보다 역사의 소용돌이 그 자체에 집중했다. 유리핀 멤피스와 함께하는 동지들의 공화 혁명의 여정은 독자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권력을 장악한 신군부는 언론을 통폐합하고, 민주화운동을 억압했지만 대중은 혁명의 이상을 꿈꾸었고, 김혜린은 그런 대중의 꿈을 만화에 정교하게 담았다.

“동지들-!/ 우린 스스로 일어나 뭉쳐서 승리를 얻은 긍지 높은 보드니아인이다!/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자! 앞으로의 시간을 위해서. 동지들! 흐트러지지 말고 지금 전열을 다시 정비하자!”

국왕을 몰아낸 시민군 앞에 선 유리핀 멤피스의 연설은 1980년대 혁명을 꿈꾸는 팸플릿처럼 읽혔다. 많은 독자들은 현실에서 유리핀 멤피스와 함께하는 혁명을 꿈꾸었다. 1987년 〈북해의 별〉이 완간되던 해에 한국은 6월항쟁으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1988년 만화잡지 〈르네상스〉에 연재한 〈테르미도르〉(대원씨아이 전자책)는 바스티유 감옥 함락부터 시작해 파리코뮌의 붕괴까지 프랑스 혁명의 역사를 혁명군의 주역이 된 유제니, 부모를 살해당해 복수를 꿈꾸는 귀족 알뤼느, 혁명의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던 귀족 줄르 등 가상 인물 세 명과 여러 실존 인물을 엮어가며 그린 만화다.

기자명 박인하 (만화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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