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기회다 - 행복한 방구석  문학

고영직 문학평론가가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우리가 ‘정지의 힘’(백무산)을, 무엇인가를 ‘함부로’ 하지 않는 미덕을 배울 수 있는 작품들을 소개했다.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책 속에는 길이 없다. 다만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사태는 ‘정지의 힘(백무산)’을 배우는 시간이 될 수 있다. 아니, 그렇게 되어야 한다. 나는, 우리는 정지의 시간에 무엇인가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

인도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위 왼쪽). 백무산 시인(위 오른쪽).

〈소유냐 존재냐〉(까치, 2020)를 집필한 에리히 프롬 식으로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유포하는 무한한 진보라는 환상은 삶의 목적이 ‘소유’에 있지 ‘존재’에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당연시하는 경제적 원리가 전일적으로 작동하는 사회를 요구한다. 그 결과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의 시간이란 생산과 소비의 끝없는 증대와 시간 절약을 통해 최대 능률과 이윤을 얻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시적 직관 내지 정서적 삶 같은 것은 하등 중요한 삶의 원리가 아닌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코로나19 사태는 나는,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근본적으로 묻고 있다. 〈작은 것들의 신〉(문학동네 2020)을 쓴 인도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는 어느 책에서 “길을 잘못 들어서 공동묘지에 들어선 기분이 든다”(〈생존의 비용〉, 문학과지성사)라고 썼다. 나는 코로나19 시대를 살며 자주 이 말을 뇌까린다.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재난을 제대로 배워야 ‘시민’이 되는 것이리라. 다음 시를 보자.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 백무산 ‘정지의 힘’ 전문

나는 위 시가 수록된 백무산의 열 번째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비, 2020)의 ‘해설’에서 “생태-생명-생활을 저마다 분리되고 분절된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인 의미로 포괄하려는 사유와 시적 실천을 확인할 수 있다”라고 썼다.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자동사’의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사용이다. 각 시행 마지막의 동사들, ‘달리다’ ‘가다’ ‘알다’ ‘되다’ ‘피어나다’의 용례를 보면 누군가가 ‘시켜서’ 움직이는 피동사 계열이 아니라, 스스로 ‘내켜서’ 움직이는 능동사 계열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피동사의 신세에서 벗어나야 ‘정지의 힘’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1984년 〈민중시·1〉에 연작시 ‘지옥선’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백무산 시인의 시적 행보를 따라가며 ‘홈뒹굴링’의 시간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그런 자발적 격리의 시간은 신생(新生)의 시간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2008년 12월19일, ‘드디어’ 백수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껏 자발적 백수의 생활을 하고 있다. 내 인생을 ‘다르게’ 살고 싶었다. 이후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도 선생님(도스토옙스키)’의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전 3권, 열린책들, 2009)을 제대로 완독했고, 19세기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허먼 멜빌의 〈모비딕〉(작가정신, 2011)을 정주행했으며, 스페인 문학의 대표작인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열린책들, 2014)를 읽었다. ‘도 선생님’ 특유의 만연체 문장에 머리가 쥐날 것 같았고, 서사시적 산문체로 바다 항해에 관한 백과사전식 지식을 과시하는 허먼 멜빌의 솜씨에 파랗게 기가 질렸으며, 고려대 안영옥 교수가 번역한 최초의 스페인어 완역본인 세르반테스의 작품을 읽으며 인간의 속물근성을 고발하는 숙수의 솜씨에 혀를 내둘렀다. 이들 작가들은 인터넷, 페이스북, 유튜브 같은 새로운 미디어가 없는 시대에 자신이 쓰고자 하는 주제에 관해 박물지적 사유와 지식과 상상력을 과시한 것이다. 그런 작가들은 오늘날처럼 급변하는 지식 변동의 시대에 다시 탄생하기 힘들 것이리라.

도스토옙스키.

정지의 시간에 정지의 힘을 배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이른바 자기계발서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2년 전 문체부가 주최하고,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주관하는 ‘생애전환 문화예술학교’ 추진단장으로 50+ 신중년들과 함께 ‘문학으로 한 달 살기’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다. 평소 만나고 싶었던 작가를 만나고, 문학관을 방문하고, 참여자들과 1박씩 머무르며 자기 인생을 되돌아보기도 하고, 글을 써서 발표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런데 상당수의 신중년들이 ‘자기계발서’를 읽겠다고 계획서를 작성했다. 그래서 내가 “선생님들, ‘이생망 정신’ 아시나요?” 하고 물었다. ‘이생망’이란 ‘이번 생은 망했다’는 뜻이다. 이번 생은 망했으니 슬퍼하자는 것이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번 생은 망했으니, 하마터면 못해보고 죽을 것 같은 일에 도전하자는 것이다.

이 점에서 19세기 러시아 ‘도 선생님’의 책을 정주행하다 어느 대목에서 만난 이야기는 내 삶의 방향키 같은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제법 시간이 지났지만, 잊히지 않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었고, 내 인생의 작은 이정표가 되었다. 흥미 있는 사실은 이 에피소드는 작품에서 별반 중요한 구실을 하는 대목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느 시인이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기형도 ‘우리 동네 목사님’)라고 한 말과 통한다고 해야 할까.

옛날 옛적에 몹시 심술 고약한 할멈이 살다가 죽었어요. 그런데 그 할멈은 평생 선행이라곤 눈곱만큼도 해본 적이 없었어요. 그래서 악마들은 그녀를 붙잡아다가 지옥 불에 빠뜨리고 말았지요. 할멈의 수호천사는 하느님께 말씀드릴 만한 할멈의 선행으로 어떤 것이 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했지요.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 천사는 “저 할멈이 밭에서 파 한 뿌리를 뽑아서 거지에게 준 일이 있습니다”라고 하느님께 말씀드렸어요.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어요. “너는 바로 그 한 뿌리를 가져가 지옥 불 속에 내밀어서 할멈이 그걸 붙잡고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라. 만일 할멈이 그걸 붙잡고 빠져나오면 천국으로 가도록 하고, 파가 끊어지면 지금 있는 곳에 계속 머물게 해라.”

그래서 천사는 할멈에게 달려가 파 한 뿌리를 내밀며, “자, 할멈, 어서 붙잡고 나와요” 하고 말했지요. 천사는 파를 조심스럽게 잡아당기기 시작해서 거의 다 끌어올렸는데 지옥 불 속에 있던 다른 죄인들이 할멈이 올라가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함께 그곳을 벗어나려고 너도나도 할멈에게 매달리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몹시 심술 고약한 할멈은 “나를 끌어올리는 것이지, 너희들을 끌어올리는 것이 아니야. 이건 내 파지, 너희들의 파가 아니야” 하고 악을 쓰면서 사람들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어요. 그녀가 이렇게 말하는 순간 파는 뚝 끊어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그 할멈은 지옥 불에 떨어져 지금까지 고초를 겪고 있지요. 천사는 하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그곳을 떠나고 말았어요. -도스토옙스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중권, 617~618쪽)

위 에피소드는 코로나19 바이러스 사태와 관련해 인간의 ‘탐진치(貪瞋痴)’를 무한정 용인하며 영원한 성장을 추구해온 근대의 근대성을 문제 삼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뉴노멀’의 시대를 운운하고, 집단면역을 주장하며, 평소와 다름없는 ‘비즈니스 애즈 유주얼(business as usual)’을 지향하고자 하는 자본의 탐진치는 멈출 줄 모른다. 코로나19 이전을 ‘정상 상태’로 상정하고자 하는 우리 안의 무의식은 그토록 완강하다.

흥미로운 점은 또 있다. 위의 에피소드는 일본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1918년에 발표한 단편 〈거미줄〉과 너무나 흡사한 작품 모티브가 작동한다는 점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작품에서는 하느님과 할멈이 ‘부처님’과 도둑 ‘간다타’로 바뀌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다른 삶 상상하는 ‘홈뒹굴링’의 시간

차분한 명랑함의 정신을 지키며 자기 앞의 인생을 응시하는 홈뒹굴링의 시간은 소중하다. 나는 요즘 〈고정희 시전집〉(전 2권, 또하나의문화, 2010)을 읽고 있다. 고정희 시인이 ‘예수 전상서’에 쓴 “그대도 나도 불온한 땅의 불온한 환자”라는 시적 표현에 아프게 공감하며 읽는다. 어느 재일조선인의 평화를 향한 고투가 잘 드러나는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의 첫 시집 〈지평선〉(소명출판, 2018)을 비롯해 김시종의 시집들을 찾아 읽는 것도 권하고 싶다. 우리에게는 ‘힐링’도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감각은 ‘필링(feeling)’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사랑했고, 윤동주 시인을 특히 사랑한 일본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처음 가는 마을〉(봄날의책, 2019)과 〈여자의 말〉(달아실, 2019) 같은 시집 또한 강추한다. 패전 후 일본 최고의 화제작이 된 ‘내가 가장 예뻤을 때’ 같은 노리코의 시는 쉬운 언어로 인생과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는 사회적 서정시의 한 진경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서정시 다이어트’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책을 읽어야 할지 가늠되지 않는 독자들에게는 1991년부터 ‘모든 시인은 생태주의자다’라는 모토 아래 〈녹색평론〉을 발행하는 문학평론가 김종철 선생의 역작 〈大地의 상상력〉(녹색평론사, 2019)과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 2019)를 추천한다. 김종철은 프란츠 파농·블레이크·디킨스·이시무레 미치코 같은 작가들의 문학 세계를 심층적으로 탐사하고 있으며(〈大地의 상상력〉), 에콜로지와 민주주의에 관한 논의를 줄기차게 전개한다(〈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최근 정치권에서 전 국민 대상의 재난기본소득을 지급하는 것으로 결정이 된 기본소득 논의는 김종철이 10여 년 전부터 〈녹색평론〉 지면에서 선구적이고 적극적으로 담론화 작업을 한 바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코로나19 시대의 책읽기는 다른 삶과 다른 시간을 상상하고 실천하려는 홈뒹굴링의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책 밖’의 현실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실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인이 “바람은 딴 데에서 불어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온다(김수영)”라고 한 말을 실감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책읽기는 ‘지금’을 배우는 일이다. 휴대전화를 끄고, 조용히 마음의 불을 켜자.

기자명 고영직 (문학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