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기회다 - 행복한 방구석 ⑧ 영화 (디스토피아 시대 영화)

 

〈디스트릭트 9〉의 핍박받는 외계인은 유색인종의 다른 이름이다.

1982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나타난 거대한 우주선. 그저 떠 있기만 할 뿐 며칠째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다. 결국 지구인들이 먼저 우주선 문을 열고 들어간다. 병들고 지친 외계인들이 힘없이 쓰러져 있다. 급히 지상에 집단 수용소를 만들어 그들을 격리하고 ‘디스트릭트 9’라 이름 붙인다.

그로부터 28년이 흐른 2010년. 250만 이주 외계인은 세상과 격리된 채 온갖 차별과 박해를 감내하며 살고 있다. 급증하는 외계인 범죄를 줄이겠다면서 정부 당국은 더 외지고 황폐한 땅으로 강제이주를 명령한다. 보금자리를 지키려는 외계인과 강제철거로 몰아세우는 지구인이 격렬하게 충돌하던 어느 날. 담당 공무원 비커스(샬토 코플리)가 정체불명 외계 바이러스에 감염된다. 그를 서둘러 포획하려는 정부를 피해, 자신이 그렇게 혐오하던 외계인 무리 속으로 도망치는 주인공. 살아남기 위해, 이제 그는 외계인과 손을 잡기로 한다.

서른 살에 만든 첫 장편영화 〈디스트릭트 9〉로 아카데미 작품상 포함 4개 부문 후보에 오른 감독 닐 블롬캠프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나고 자란 사람이다. 어릴 적 목격한 인종분리 정책, 일명 ‘아파르트헤이트’에서 이 영화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실제로 강제철거가 진행 중인 남아공 흑인 빈민가 판자촌에 들어가 영화를 찍었다.

그 덕분에 관객은, ‘현실에 없는 외계인 이야기’에서 지극히 현실적인 기시감을 느끼게 되었다. 〈디스트릭트 9〉의 핍박받는 외계인은 ‘유색인종’의 다른 이름이다. ‘빈민’과 ‘이주민’의 바뀐 표현이면서, 나아가 ‘난민’과 ‘성소수자’ 같은 모든 사회적 약자의 은유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개봉한 2009년 10월15일, 실제로 나는 그해 1월에 일어난 ‘용산 참사’를 떠올리며 영화를 보았다. 그때는 최근 다큐멘터리 〈안녕, 미누〉로 재조명된 네팔인 이주노동자 활동가 고 미누 씨가 불법체류자 단속에 걸려 잡혀간 직후이기도 했다. 18년 동안 한국에서 살아온 그의 강제추방을 반대하는 서명운동과, 28년 동안 지구에 정착하고 살아온 외계인과 연대하는 영화 속 주인공의 행동은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디스토피아 영화는 ‘다가올 미래’를 상상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오래된 미래’를 기억해내는 일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이미 현실이 되어 있는 이야기를 마치 아직 현실엔 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속임수를 쓰는 장르일 것이다. 〈디스트릭트 9〉가 우리 시대 어떤 이들이 이미 겪고 있는 혐오와 차별을 외계인 이야기에 녹여내는 동안, 같은 해 1월에 개봉한 〈더 로드〉는 우리 시대 어떤 이들이 직면한 절망과 사투를 포스트 아포칼립스(인류 문명 종말 이후) 세계관에 담아낸다.

〈더 로드〉

우리는 어떤 인간으로 살아야 하나

2019년, 지구 하늘에는 해가 없다. 지진이 건물을 삼켰고, 화재가 숲을 태웠고, 공포가 인간을 망쳤다. 사람이 사람을 먹는다. 모두가 광기에 휩싸인다. 그때, 한 아버지(비고 모텐슨)가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길 위에 선다. 따뜻한 남쪽 나라를 향해. 아니, ‘어쩌면 따뜻할지도 모르는’ 남쪽 나라를 향해 걷는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 푸른 바다를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 하나에 기대어 하염없이 걸어간다. 살인자가 날뛰고 약탈자가 공격하는 세상. 가도 가도 길은 끝나지 않고 앞날이 보이지 않는 고난의 행군. 그 여정을 관객이 함께 걸어가는 영화 〈더 로드〉.

실제 강제철거가 진행되던 남아공 빈민가 판자촌에서 촬영한 〈디스트릭트 9〉처럼 이 영화 또한 실제 공간을 로케이션 장소로 삼았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휩쓸고 간 뉴올리언스의 어느 쇼핑몰. 폐허가 되어 방치된 그곳이 지구 멸망 후 을씨년스러운 세상의 풍경으로 영화에 담겼다. 우리가 이미 매일매일 지구의 작은 종말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는 증거다. 특히 미국발 세계 경제위기로 많은 이들의 삶이 휘청이던 2009년(국내 개봉은 2010년), 영화가 상상한 디스토피아는 이미 누군가의 현실이었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집을 잃고 추운 거리에서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에겐 이미 익숙할 대로 익숙해진 ‘오래된 미래’가 거기, 영화 속에 펼쳐지고 있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누군가의’ 오래된 미래가 ‘우리 모두의’ 미래로 공평하게 도래한 세상이라면, 우리는 어떤 인간으로 살아가야 할까. 이 어려운 질문에 나름의 답을 보여준 영화 두 편을 나는 기억한다.

〈더 랍스터〉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의 영화 〈더 랍스터〉. 주인공 데이비드(콜린 패럴)와 그가 형이라고 부르는 개 한 마리가 나란히 호텔 복도를 걸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눈이 맞아 떠난 뒤 데이비드는 이곳으로 와야 했다. 짝 없는 사람은 더 이상 도시에 살 수 없게 한 법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 호텔에 모인 사람들끼리 반드시 새 짝을 찾아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주어진 시간은 45일. 그 안에 커플이 되지 못한 사람은 여생을 동물로 살아야만 한다. 데이비드의 형처럼 되는 것이다.

짝을 찾는 데 실패해도 계속 호텔에 머물 방법이 있기는 하다. ‘외톨이’를 사냥하는 것. 호텔을 탈출한 뒤 도시로 돌아가지 못하고 숲에 숨어 사는 솔로들을 잡아오면 된다. 한 명 포획할 때마다 체류 기간이 하루씩 연장된다. 하지만 불행히도 데이비드는 사냥 솜씨마저 형편없다. 어찌해야 할까? 순순히 동물로 변하는 운명을 받아들일까? 다행히 아직 사람일 때 그냥 죽어버릴까? 차라리 숲으로 도망쳐버릴까? 빠르게 다가오는 결단의 순간. 과연 데이비드의 선택은?

데이비드가 돋보이는 까닭은 살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영화에서 거의 유일하게, 사랑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이다.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려고 기꺼이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감수한다. 아무도 그렇게 살지 않는 세상에서 여전히 그렇게 살아가려 애쓴다. 그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다.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지켜내는 모습. 그래서 필사적으로 헌신하는 모습. 그 필사의 시간 속에서 점점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

〈칠드런 오브 맨〉

데이비드처럼 필사적인 사람이 영화 〈칠드런 오브 맨〉에도 있다.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려고 기꺼이 자신에게 닥칠 위험을 감수한’ 남자가 서기 2027년 런던에도 살고 있었다. 지난 18년4개월 동안 전 세계에서 단 한 명의 아이도 태어나지 않은 전 지구적 불임의 시대. 아이들 웃음소리가 사라지자 앞날에 대한 희망도 함께 사라져버린 어느 날.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는 불법 이민자를 보호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불법 이민자여서 위험에 처한 어느 흑인 소녀를 안전하게 항구까지 데려가 달라는 것이다. 그렇게 소녀의 동행이 된 뒤, 그는 알게 된다. 이 소녀가 위험에 처한 진짜 이유를.

단지 불법 이민자라서가 아니었다. 아이를 가졌기 때문이다.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차지하려는 세력이 아이를 엄마와 떼어놓으려는 시도에 맞서, 이제 테오가 싸운다.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며 끝까지 소녀의 편에 선다. 아무도 그렇게 살지 않는 세상에서 혼자만 그렇게 살아가려 애쓴다. 그 모습이 참 아름답다. 누군가를 필사적으로 지켜내는 모습. 그래서 필사적으로 헌신하는 모습. 그 필사의 시간 속에서 테오가 점점 괜찮은 사람이 되어가는 모습.

이 영화를 〈더 랍스터〉와 함께 보길 권한다.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도 이상하게 무척 비슷한 이야기라고 느낄 것이다. 〈칠드런 오브 맨〉의 먹먹한 라스트신 위로, 〈더 랍스터〉의 애틋한 마지막 장면이 겹쳐 보일 것이다. 〈디스트릭트 9〉의 외로운 외계인과 〈더 로드〉의 겁에 질린 아이가 마음속에 함께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디스토피아는 어떤 세상일까, 하고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디스토피아를 살아가는 나는 어떤 인간의 모습일까, 하고 생각에 잠기게 될 것이다. 영화를 보기 전보다는 조금 더, 아주 조금이라도 더 필사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FM영화음악 김세윤입니다 〉진행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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