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완연한 봄이다. 오후에는 산책을 하고 전면 개방된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코로나19가 소강되는 것 같아 들떴다. 서울 이태원 클럽발 집단감염 재확산 사태가 불거졌지만, 방역 당국은 대체로 여전히 신뢰받고 있다. 사람들은 코로나19 국면에서 국민 생명을 보호하는 ‘컨트롤타워’와 ‘시스템’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 사회는 포스트 코로나19의 ‘뉴노멀’을 사회구조 안으로, 일상 안으로 가져와 이야기하고 있다. 바이러스와 공존하는 삶도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후’를 논할 조건이 아직도 갖춰지지 않은 또 하나의 사태가 있다. 요즘도 나는 거의 매일 n번방 수사 진행 상황을 살핀다.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드러난 지 벌써 8개월째다. 그럼에도 관련 키워드가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에서 죽지 않고 살아 있다. 나처럼 계속 지켜보겠다는 여성들의 자발적인 ‘불신 연대’를 확인하고, 한시름 놓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사람 많은 식당에서 n번방 회원이 스스로 범죄를 떠벌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신고를 받고 출동한 파출소는 수사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사건을 종료하려 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말마따나 우리 사회에는 “디지털 성착취 바이러스가 곳곳에 침투해 있다”. 그동안 새롭게 나타났던 피해 여성들의 고발과, 그들이 때때로 맞이한 죽음을 책임 당국들이 무시한 결과다. 성착취범들은 어쩌다 재판까지 받는 경우에도 집행유예로 자유를 얻곤 했다. 사법부는 여성의 몸을 숙주로 삼는 성착취를 무거운 범죄로 보지 않는다는 신호를 오랫동안 보내면서, 스스로 강간 문화 내부에 있다는 사실을 방증했다. 그 기반 위에서 인신매매를 결합한 형태의 디지털 성착취 범죄가 조직적으로 벌어졌다.

자신을 성폭행하려는 남성의 혀를 깨물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피해자가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하는 오늘날에도, 성착취범들이 여전히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을 확인하며, 나는 확실히 더욱 예민해진다. 아무리 날씨가 더워도 남성인 동거인과 달리 집의 창문을 활짝 못 열거나, 낮잠을 잘 때도 모든 창을 잠그는 정도는 한국 사회에서 내 또래 여성이라면 누구나 공유하고 있을 오랜 습관이다. 공기의 답답함은 공기의 불안함에 비하면 조금 불편할 뿐이니까. 때로는 애먼 걱정을 하는 내 형편도 발견한다. n번방 시대니만큼 문득 내 능욕 영상이 나 모르게 제작되어 유통되는 건 아닐까 생각했고, 머릿속으로 대응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경찰부터 찾지는 않을 것 같다.

디지털 성착취 바이러스를 유포하는 자들

최근에는 업무 관련 모임을 하던 중 n번방 이야기가 나오자 함께 있던 남성들이 혹시 가입자일 수도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다행히 낌새는 없었고, 나는 심란해졌다. n번방 시대의 한국 사회가 나를 ‘스스로 원하지 않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아서다. n번방이 아직 통제되지 않은 지금, 여성들은 ‘알 수 없음’과 동거하는 불안을 경험한다. 온라인 개강 직후 초등학교 교사의 ‘섹시 팬티’ 숙제 사건이 터졌을 때 n번방 존재를 다시 상기한 건 나만이 아니었다.

이미 보도된 n번방 범죄의 단계적이고 구조적인 맥락, 소도시 인구 규모의 남성 집단이 70여 명의 여성을 성노예로 착취한 악랄함을 사회적으로 코로나19보다 약한 병리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감시와 청원을 멈출 수 없는 건, 강간 문화의 연대가 이토록 공고하기 때문이다. 관계 당국은 디지털 성착취 바이러스를 악의적으로 유포하는 ‘슈퍼 범죄자’들을 사회와 제대로 격리하기 바란다. 그런 다음에야말로 ‘포스트 n번방’을 말할 수 있을 테니.

기자명 오지은 (프리랜서 콘텐츠 기획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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