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산내 골령골의 정치범 학살. 애버트 미군 소령이 1950년에 찍은 사진이다.

올해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0년이 되는 해다. 그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기억하는 이도 이제 나이가 들어 인구 대비 2.5%에 불과하다. 기억 대부분은 망각되고 왜곡되며 일부만이 성한 채 오랫동안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정부는 올해 대전 골령골 집단학살에 대한 재조사를 시작한다. 정부가 민간인 학살 유해 발굴에 다시 나서는 것은 이명박 정부 때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활동 시한 만료로 해산된 이후 13년 만에 처음이다. 골령골 집단학살 사건은 1950년 6월 말부터 대전형무소 재소자들과 지역 보도연맹원 등 6900명을 집단학살한 사건이다. 성신여대 이사장이었던 심용현이 헌병대 중위로 근무하면서 3200명에 달하는 1, 2차 집단학살을 주도했다. 이 거대한 홀로코스트는 1999년까지 직접적인 증거가 없어 침묵을 강요당했다. 재미 사학자 이도영 박사가 1999년 12월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에서 골령골 학살에 대한 기밀문서를 찾아냈다. 이 문서는 당시 촬영된 18장의 사진과 글로 정리된 것이다. 작성자는 미국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 총책임자 애버트 소령이다. 보고서의 사진은 애버트 소령이 라이카 카메라로 직접 촬영했으며, 정보장교들이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과 보고 차원에서 촬영한 것이다. 이는 한국전쟁 당시 연합군이라는 이름으로 참전한 미군이 이 학살에 직접적으로 가담하진 않았어도 방조한 공범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18장의 사진 중에 유독 우리를 찌르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머리카락이 짧은 한 사내가 엎드려 있고 그의 앞에는 시체들이 쌓인 구덩이가 있다. 카메라를 쳐다보는 그이의 눈은 한없이 절망스럽다. 살려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일까? 하지만 이것이 전부다.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사진의 프레임 바깥은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비극적인 상황이 한 장의 사진에 담겨 지금까지 그 고통을 전달하고 있다. 비평가 수전 손택이 〈사진에 관하여〉에서 이야기한 한국전쟁과 사진에 대한 평은 꽤 의미심장하다. “어떤 면에서 10여 년 뒤에 발생한 베트남 전쟁보다 생태계 파괴와 집단학살이 훨씬 더 철저히 이뤄진 한국전쟁의 참상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면, 미국인들이 한국전쟁을 묵인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점이 있다. 그 당시에는 이데올로기적인 이유로 그런 사진이 설 만한 자리가 없었으며 마찬가지로 대중도 그런 사진을 보지 않았던 것이다.”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의 한국전쟁 사진

사실 한국전쟁이나 베트남전쟁이나 모두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강했지만 수용하는 집단이 달랐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적들도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평양의 일상생활을 찍은 사진을 들여오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국전쟁은 자유 진영이 소련과 중국에 맞서 벌이는 투쟁의 일부로 받아들여졌고, 화력을 퍼붓는 미군의 잔인함을 사진에 담는다는 것은 부적절한 행위라고 여겨졌다.”

최근 들어 사회학과 인류학 연구자들 사이에 사진을 기본 텍스트로 삼는 연구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기억과 구술보다 구체적이며, 사물과 배경으로 관계를 더 심층적으로 연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군이 진주했던 1945년부터 한국전쟁이 종료된 1953년까지 찍은 사진 수십만 장이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고 수많은 연구자들이 방문해서 오늘도 새로운 사진을 찾아내고 있다. 골령골처럼 한국 현대사는 사진에 의해 다시 쓰일 것이다.

기자명 이상엽 (사진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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