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들이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나경희 기자
  • 호수 662
  • 승인 2020.05.2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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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화재 사고 사망자 가운데에는 서로 가까운 이들이 많았다. 남겨진 이들은 친구와 가족을 동시에 잃었다. 발주사인 한익스프레스와 시공사 건우는 안전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시사IN 신선영경기도 이천시 물류창고 화재로 숨진 38명의희생자 유가족들이 5월6일 이천 서희청소년문화센터 내에 마련된 합동분향소에서 추모식을 열었다.

1년도 지나지 않은 웨딩 사진에 검은 띠를 둘렀다. 영정 38기가 늘어선 하얀 제단 위에는 남편 말고도 아는 얼굴이 5명이나 있었다. ㄱ업체 직원 3명과, ㄱ업체로부터 하청을 나눠받은 ㄴ업체 직원 2명이었다. 지난 4월29일 불이 난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현장에는 지인 혹은 가족끼리 일하던 영세업체가 유난히 많았다. ‘하청의 하청의 하청’까지 일감이 쪼개져 내려온 구조 때문이었다.

시공사 ‘건우’로부터 하청을 받은 방수팀·도장팀·덕트설비팀·냉동설비팀·엘리베이터팀 등 9개 업체 안에 또 얼마나 많은 재하청 업체들이 있는지는 유가족 대책위원회에서도 아직 명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박 아무개씨(42)의 남편 김 아무개씨(40) 역시 당일 ‘하청의 하청의 하청’을 받고 들어갔다. ㄱ업체(하청)가 ㄴ업체(재하청)에게 일감을 나눠줬고, ㄴ업체는 최근 회사에서 독립해 나간 개인사업자 김씨(재하청의 하청)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했다. 일명 ‘대전팀’이 만들어졌다(아래 그림 참조).

김씨는 군대를 제대한 뒤 덕트(공기 통로)를 설치하는 일만 15년째 맡아온 베테랑이었다. 원래 ㄴ업체에서 일했다. ㄴ업체는 작은 회사였다. 사장을 포함해 전 직원이 5명밖에 안 되었다. 업체라기보다 함께 작업하는 팀에 가까웠다. 서로를 직함 대신 형이나 동생이라 불렀고 아내들도 형수나 제수로 불렀다. 대전의 한동네에서 살며 같이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그러다 시간이 늦어지면 서로의 집에 하룻밤씩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일이 들어오면 전국 어디든 함께 출장을 갔다.

얼마 전 개인사업자 등록을 한 김씨는 여전히 ㄴ업체 사람들과 한동네에 살았고, 늘 하던 대로 바쁘면 서로 일을 도왔다. 그렇게 일손이 부족한 ㄴ업체가 김씨에게 일을 부탁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하청 구조 한 단계가 더 생성됐다. ㄴ 같은 영세업체나 김씨 같은 개인사업자에게 몇 단계씩 내려오는 하청 일감은 일상이었다. 하청이 하청으로 꼬리를 무는 구조 속에서 노동자 개인이 목소리를 내기는 쉽지 않았다. 어딘지도 알 수 없는 ‘위’에서 끝내달라고 하는 기한에 맞춰 공사를 마쳐야 했다. 급할 때는 친한 지인이나 가족만 한 지원군이 없었다. 박씨는 남편과 동료들을 “서로 먹고살아야 되니까 도와주면서 열심히 살던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박씨도 남편 김씨를 따라 일을 다니곤 했다.

ⓒ시사IN 이명익박 아무개씨는 남편의 유품인 목걸이 치(治)와 자신의 목걸이인 시(時)를 함께 걸고 있었다.

사고 당일 다른 현장에 나가기로 했는데…

결혼 전 박씨가 김씨에게 호감을 느낀 것도 한 공사장에서였다. 현장에서 김씨는 일을 척척 해내는 ‘프로’였다. 일을 야무지게 하면서도 늘 사람들에게 “서두르지 마, 이거 안 된다고 답답해서 서두르면 다치니까 천천히 해”라고 말하곤 했다. 박씨는 그런 김씨의 모습에 반했다. 무엇보다 김씨가 하는 일은 박씨가 막연히 생각했던 ‘막노동’ 이미지와 달랐다. 월급제가 아니라 일당을 셈해서 받는 일용직이지만 무엇보다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한 ‘기술 일용직’이었다.

두 사람은 2019년 5월19일 결혼했다. 결혼하기 전 커플 금목걸이를 맞췄다. 각자의 이름에서 가운데 글자 하나씩을 한자로 새겼다. 김씨는 ‘治(다스릴 치)’였고 박씨는 ‘時(때 시)’였다. 함께 다스리는 시간 속에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자고 약속했다. 결혼을 한 뒤 오랫동안 살던 대전을 떠나 얼마 전 충남 논산으로 이사했다. 사고가 나기 이틀 전인 4월27일에는 시아버지가 코로나19 때문에 미뤄왔던 집들이를 다녀가기도 했다. 집들이 선물은 닭이었다. 전원주택에 왔으니 닭도 키우며 살림을 가꿔보라고 했다. 뜰에다 손수 닭장을 지어주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김씨는 아내 박씨에게 “예전에는 아버지가 산처럼 크게 느껴졌는데 지금 보니까 너무 작다. 내가 잘해야겠어”라고 말했다.

사고 당일 김씨가 나가기로 했던 현장은 따로 있었다. ‘옛정’을 떨치기 어려웠던 게 화근이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일감이 예전처럼 많지 않아서 일을 골라 받기가 어렵기도 했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ㄴ업체 사장이 김씨에게 이천시 모가면 소고리에 있는 냉동 물류창고 신축 현장 덕트 설치를 며칠만 도와달라고 부탁한 터였다. ㄴ업체 사장과 김씨가 통화한 날짜는 4월24일이다. “(4월)28~29일 말이야.” “○○(다른 건설 현장) 가기로 했잖아요.” “근데 이천에서 도와달라네. 요즘 일감이 없으니 쪼개서라도 가자.” “아 어떡하지….” 망설이던 김씨가 말했다. “제가 갈게요.”

김씨는 4월28일 처음 이천 현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그날 저녁 박씨는 남편에게 ‘내일(4월29일)은 일을 뺄 수 없느냐’고 물었다. 친정집에 일이 있었다. 남편이 곁에 있으면 든든할 것 같았다. 김씨는 “이미 약속했는데 지금 와서 못 바꾸겠어. 어떡하지, 미안해”라며 아내 박씨를 다독였다. 대신 내일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4월29일 아침 6시15분 김씨는 집을 나섰다. 예전에 살던 대전 동네에 들러 함께 일했던 ㄴ업체 동료 두 명을 태우고 이천으로 향했다.

ⓒ시사IN 이명익박 아무개씨는 “2008년 냉동 물류창고 사고 이후 법이 바뀌었다면 신랑도 살아 돌아왔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아내 박씨의 집안 행사에 함께하지 못한 게 못내 마음에 걸렸던 그는 두 시간마다 아내에게 전화해 안부를 물었다. 오후 1시37분에도 전화가 왔다. 박씨는 5초 만에 전화를 받았다. 남편에게 걸려오는 전화에만 다른 벨소리를 설정해놨기 때문에 발신자가 누구인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아내는 반갑게 남편을 불렀다. “짠지(애칭)~” 그런데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여보숑?” 9초 뒤 여전히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자 박씨는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끊고도 박씨는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바쁘게 현장에서 일하느라 전화가 잘못 걸린 줄도 몰랐겠거니 했다. 사고 소식을 모른 채 저녁으로 소고기뭇국을 끓이고 있었다. 오후 5시28분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남편 벨소리가 아니었다. 박씨도 알고 지내던 ㄴ업체 사장이었다. 박씨는 그제야 텔레비전을 켰다. 보통 큰불이 아니었다.

남편을 삼킨 불은 간신히 휴대전화를 남겼다. 그을음 그득한 휴대전화를 유품으로 쥔 박씨는 휴대전화에 남은 남편 목소리라도 붙잡고 싶었다. “불이 나고 한참 지나고 나서야 신랑 폰에 자동 녹음된 통화 파일을 들었어요. 신랑이 누구한테서 일을 받았는지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들었어요. 처음에는 그걸 듣는 게 너무 무섭더라고요. (ㄴ업체 사장이) 거기(이천 현장)로 가라는 말이 결국 죽는 곳으로 가라는 말이 돼버렸네요.”

박씨에게는 잘 들리지 않던 마지막 통화도 남편의 휴대전화에 녹음돼 있었다. 주변이 화르륵 타는 소리, 남편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남편은 “자기야, 이거 안 되겄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남편이 사고 전날에도 일하러 갔던 현장이기 때문에 빠져나가려 해도 나갈 곳이 없다는 걸 깨닫고 마지막으로 전화를 걸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일반창고가 아닌 냉동창고라서 창문이 몇 개 없었다.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의 건물에 출입구는 세 곳뿐이었다. 2층에서 사망자가 가장 많이 나왔다. 위층에서 작업하던 사람들이 내려왔지만 불길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 출구가 있는 1층까지 내려갈 수 없었다. 2층에서 발견된 사람들은 대부분 질식사가 사인이었지만 얼굴과 몸에 화상도 많았다. 그만큼 불길은 거셌다.

이천시 냉동 물류창고 신축 현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는 신고는 4월29일 오후 1시32분 접수됐다. 소방 당국은 5월14일 현재까지 정확한 최초 발화 원인을 찾지 못했지만, 지하 2층에서 공정 중 발생한 유증기(기름방울 형태의 증기)에 불이 붙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실내에 유증기가 가득 찬 상태에서는 아주 작은 불씨 혹은 정전기만으로도 불이 날 수 있다. 이 경우 공기에 기름 성분이 녹아 있기 때문에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번진다. 여기에 냉동창고라는 밀폐된 특수성이 겹쳤다. 현장에서 일하던 노동자 78명 중 절반에 가까운 38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박씨가 이천 현장에 도착한 건 밤 10시30분이 넘어서였다. 논산에서 이천까지 약 169㎞, 평소 2시간 남짓이면 충분한 거리지만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4시간 이상 걸렸다. 퇴근 시간과 긴 연휴의 시작이 겹친 탓이었다. 하루 일을 무사히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도로를 메울 만큼 많았다. 박씨의 남편 김씨도 그중 한 명이어야 했다.

끓이다 만 소고기뭇국을 두고 이천으로 가는 길에 박씨는 남편과 함께 일을 나간 동료 ㄴ업체 소속 조 아무개씨(46)의 아내 강 아무개씨(55)에게 전화를 걸었다. 김씨와 조씨는 함께 일한 지 10년이 넘었다. 박씨가 논산으로 이사 가기 전에는 걸어서 3분 거리에 살던 이웃사촌이었다. “언니, 이천에 불이 났대.” 강씨는 “가서 확인하고 연락 좀 줘”라고 말했다.

“나만 맛있는 거 먹어서 미안해”

남편 조씨와 아내 강씨가 마지막으로 통화한 시각은 4월29일 오후 12시38분이었다. 남편의 목소리는 들떠 있었다. “이런 현장에 가면 비싼 밥을 안 먹거든요. 근데 ‘오늘은 식당을 잘못 들어가서 인당 3만원짜리 불고기 정식을 먹었다’고 좋아하더라고.” 아이처럼 신이 난 그는 점심이 얼마나 비싸고 맛있었는지 아내에게 자랑했다. 그러면서도 밥값이 많이 나와서 큰일 났다고 ㄴ업체 사장을 걱정했다. 전화를 끊기 전 남편이 말했다. “나만 맛있는 거 먹어서 미안해. 저녁에 집에 가서 맛있는 거 사줄게.” 강씨는 웃으며 대답했다. “알았어, 기다리고 있을게요.” 조씨는 오후 4시쯤 퇴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연휴 전날이라 차가 많이 막히겠거니 했다. 하지만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난 시각에 박씨에게 연락을 받은 강씨는 초조함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대전에서 택시를 빌려 시어머니를 모시고 이천으로 향했다. 현관에서 출발하려는 순간 휴대전화가 울렸다. 박씨였다. “언니, 우리 신랑 갔어.” 같은 공간에서 같은 작업을 했을 남편 조씨에게도 뭔가 일이 났겠구나 짐작했다. 올라오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시어머니에게는 차마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사고 현장에 도착해서 명단을 보니까 이름 옆에 요양원이라고 쓰여 있더라고. 병원에 병실이 부족하니까 급한 대로 요양원으로 옮겨서 치료하고 있겠거니 했어요. 남편 이름만 찾던 어머님이 딱 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그랬어요. 근데 사람들이 자꾸 사망자 명단, 사망자 명단 하는 거예요. 그래서 맨 위를 보니까 ‘사망자 명단’이라고 쓰여 있는 거야.”

믿어지지 않았다. 남편은 한때 유도 선수를 했을 만큼 몸도 무척 날랬다. 일전에 4층 현장에서 떨어졌을 때도 다치지 않아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곤 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후배들도 “그럴 리 없다, 형은 어디 다쳤으면 다쳤지 절대 죽지 않았을 거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몸이 빠른 조씨도 피할 수 없는 사고였다. 강씨는 안치된 시신을 보고서야 남편 조씨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얼굴에는 새까만 그을음이 묻어 있었고, 어둠 속에서 불길을 피하다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얼굴에는 상처와 화상 자국이 나 있었다.

ⓒ시사IN 조남진4월29일 발생한 화재로 사망자 38명을 낸 경기도 이천 한익스프레스 물류창고 화재 현장.

조씨와 강씨는 원래 올봄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 유행이 한창이었다. 가을로 식을 미루고 살림을 먼저 합쳤다. 코로나19는 점차 잦아들고 있었고, 벌써 제법 여름 날씨였다. 4월29일 일을 마치고 나면 4월30일부터는 석가탄신일과 어린이날까지 닷새 동안 연휴가 시작될 참이었다. 그 나흘 후에는 시어머니 생신이었다. 조씨는 어머니를 좋은 식당에 모시고 가서 용돈도 두둑이 챙겨드리고 싶어 했다. 어버이날에는 처가댁에 가기로 했다. 조씨가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할 이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다른 일을 구하기 전까지 잠시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덕트 설비는 어느새 생업이 됐다. “자기가 좋아서 이 직업을 택한 경우는 정말 드물잖아요. 직장이 되게 좋아서 그 일 한 것도 아니고, 먹고살려고 간 거잖아요.”

김씨, 조씨와 함께 일했던 ㄴ업체 원 아무개씨(43)도 마찬가지였다. 김씨와 중학교 때부터 20년 이상 친한 선후배 사이였던 원씨는 젊었을 적 함께 현장을 다녔다. 곧 다른 일을 알아보겠다며 공사장을 떠났지만 2~3년 전 다시 공사 현장으로 되돌아왔다. 마지막으로 했던 일보다 미래가 있다고 했다. 관계가 돈독했던 김씨와 함께 사업을 할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원씨의 아버지는 아들과 통화를 할 때마다 수차례 당부했다. “위험한 일을 하니 술 많이 먹지 마라. 건강 해치면 모든 게 다 끝이니 술 많이 먹지 마라.” 정작 아들을 앗아간 건 술이 아니라 사방이 밀폐된 공사 현장에서 일어난 화재였다. “아들이랑 통화는 자주 했지. 힘들다는 얘기는 일절 안 해. 아들이 일용직이었는지 뭐였는지도 몰랐어.” 사고가 나기 열흘 전 집안일을 도와주기 위해 아버지를 찾았던 아들 원씨는 “이제 내가 돈 버니까 용돈 많이 드릴게요”라고 말했다.

원씨는 이천으로 일하러 갈 때 아버지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다. “아침에 가서 저녁에 올 거니까 굳이 전화할 필요가 없었겠지. 근데 아침에 출근해서 점심에 죽어버렸어.” 원씨의 아버지가 눈물을 훔쳤다. 손수건을 떼는 사이 눈가에 다시 눈물이 맺혔다. “사고가 나고도 당일에 몰랐어. 4월30일 새벽 12시에 며느리한테 전화를 받았어. 가까이 사는 내 동생한테 먼저 가보라고 했어. 나도 올라가면서 계속 통화를 했어. 동생이 ‘신원 확인 됐어요’ 그래. ‘살았냐 죽었냐’ 하니까 머뭇거리더니 ‘간 거 같아요’ 그러더란 말이야. 시신을 확인하는데 얼굴이 온통 새까매. 못 알아보겠더라고. 보니까 내 아들이야. 애 엄마는 까무러쳐서 병원으로 실려 가고.”

4월30일 오후 이천 서희청소년문화센터에는 합동 분향소가 차려졌다. 두 줄로 안치된 영정 38기가 농구장 한쪽 벽면에 가득 찼다. 조의를 표하는 화환이나 검은 현수막보다 영정 수가 더 많았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었던 만큼 제대로 찍은 영정사진이 아니었다. 여행지에서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야경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도 눈에 띄었다. 분향소가 차려진 문화센터 안까지는 계단 43개를 올라야 했다. 나이 많은 부모들은 한 계단 한 계단 힘겹게 오르다 울음을 터뜨리곤 했다. 어린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검은 티셔츠를 입고 성큼성큼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시사IN 이명익원 아무개씨는 “아들을 앗아간 건 술이 아니라 사방이 밀폐된 공사 현장이다”라고 말했다.

5월14일 현재 사고가 일어난 지 2주가 지났지만 박씨는 여전히 남편의 죽음이, 함께 일했던 동료들의 죽음이 믿기지 않는다. 박씨는 재하청까지 일감이 내려오는 구조 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다. 오히려 이렇게 ‘아래’까지 일감이 오지 않으면 개인사업자나 영세업체는 버티기 힘들다. 문제는 재하청에 재하청이 이어지더라도 원청이 돈을 아끼지 않고 안전을 지키는지 여부다. “저도 현장을 다니지만 재하청까지 내려가도 안전 시스템이 잘돼 있는 곳도 많아요. 안전교육 이수했다는 증서 보여주고도 거기서 또 교육을 받습니다. 혈압이나 질병 여부 다 체크하고 체조도 하고 투입되거든요. 안전관리 하는 사람이 돌아다니면서 ‘작업화 신으세요’ ‘헬멧 쓰세요’ 일일이 지적하고요. 안전 수칙을 어기면 최소 그날 작업에서 빠져야 하고 깐깐한 곳에서는 영구 퇴출이에요.”

하지만 사고가 난 냉동 물류창고를 지어달라고 주문한 발주사 한익스프레스와 시공사 건우는 안전관리에 소홀했다. 5월3일 YTN이 입수한 고용노동부 비공개 자료에 따르면 2018년 건우의 산업재해 발생률(4.58%)은 업종 평균(0.75%)보다 월등히 높았다. ‘관행’처럼 산업재해가 은폐되는 현실을 고려하면 더욱 그랬다. 숨진 김씨나 조씨, 원씨보다 앞서 이천 현장에서 한 달 동안 근무했던 한 생존자는 현장에서 안전관리자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화재 경고등이나 대피 유도선도 설치돼 있지 않았다. 실내에 소화기도 비치돼 있지 않았다. 살아남은 그는 4월29일 함께 작업하던 친동생을 잃었다. 그 역시 김씨와 조씨, 원씨처럼 가까운 이들과 팀을 꾸려 작업하던, ‘하청의 연쇄 고리’에 속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걸 왜 수십 년째 반복하고 있습니까”

이번 사고에서 이런 사례는 흔했다. 남겨진 사람들은 친구와 가족을 동시에 잃은 경우가 많았다. 여동생의 남편과 남동생을 모두 잃은 한 유족은 “자기 집 지어달라던 발주처가 사고가 나니까 책임 없다고 하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느냐”라고 말했다. 그는 5월4일 열린 첫 유가족 기자회견이 끝나자 한익스프레스가 보낸 근조 화환을 계단에 내던졌다. 발주처인 한익스프레스와 시공사 건우 측은 5월14일 현재까지 분향소를 찾아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가족 대책위원회에 별다른 연락도 취하지 않은 상태다. 권미정 김용균재단 사무처장은 “발주처인 한익스프레스는 ‘우리는 시공사인 건우에 다 맡겼는데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공사 자금과 공사 기간은 발주처에서 정한다. 발주처에서 정한 자금과 기간이 빠듯하다면 그만큼 안전은 무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라고 말했다.

유족들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그리고 현장 안전관리 시스템 강화를 요구하고 있다. 박씨는 남편 김씨를 두 번 죽일 수 없다고 말했다. “신랑이 왜 이런 사고를 당했는지 알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이야기라도 해주고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음에 또 이런 사고 나면 저희 신랑은 또 죽는 거예요. 두 번 죽는 거예요. 12년 전에도 이런 일이 다시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또 일어났잖아요. 그럼 앞으로도 일어나지 말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시사IN 이명익경기도 이천 서희청소년문화센터 내 합동분향소에서 유가족들이 분향을 하고 있다.

12년 전에도 꼭 닮은 사고가 있었다. 2008년 1월7일 이천시 코리아2000 냉동 물류창고 지하 1층에서 시작된 불길은 폭발적으로 번져나갔다. 당시 40명이 사망하고 10명이 부상당했다. 소방 당국은 각종 화학 공정에서 발생한 유증기가 쌓여 불이 붙은 것으로 추정했다. 시공사가 받은 처벌은 산업안전법 위반으로 2000만원 벌금형이 전부였다. 사망자 한 명당 벌금 50만원인 셈이었다.

한 유가족은 5월12일 분향소를 방문한 더불어민주당 노동안전특별위원회 위원들에게 호소했다. “저희들이 법을 압니까 뭐를 압니까. 정부는 충분히 자료를 많이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걸 가지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연구해서 법을 만들고 제도를 만들면 노동자들도 살 수 있고 국민도 살 수 있고, 얼마나 깔끔합니까. 이걸 왜 수십 년째 반복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는 산업재해를 막을 수 있는 대안을 이미 안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만드는 것도 유력한 대안 중 하나로 오래전부터 논의되어왔다(우리는 왜 날마다 명복을 비는가 기사 참조). 박씨는 조심스럽게 ‘책임’의 범위를 한발 더 넓혔다. “아마 지금 다른 분들도 방관하겠지만 저는 그게 서운하지는 않아요. 저도 2008년 (코리아2000 냉동 물류창고 사고) 당시에 그랬던 사람 중 한 명이니까. 내가 더 목소리를 내주고 다 같이 공감해줬다면 그때 법이 바뀌었을까요? 그럼 이런 일이 안 일어났을까….” 박씨의 목소리가 느려졌다. 인터뷰 내내 참아오던 울음이 새어나왔다. “그건 모르겠지만 적어도 희생자가 많이 줄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쩌면 저희 신랑도 살아 돌아왔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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