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대병원경기도 동두천시에 소재한 ‘이호왕 박사 기념관’ 내부 모습.

얼마 전 미국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이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한에 있는 그 연구소에서 나왔다는 상당한 양의 증거가 있다”라고 주장하는 일이 있었지.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졌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는 한, 병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한 국가와 국민이 매도되거나 손해배상 소송의 대상이 되는 건 부당하다고 생각해. 병이 처음 발생한 곳이 책임을 져야 한다면 1918년 수천만 명의 생명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이 시작된 미국은 파산해야 하지 않겠니. 우리나라조차도 ‘전염병의 발상지’라는 타이틀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아. 유행성 출혈열이라는 병 때문이지(이 병의 발상지에 대해서는 다른 설도 있다).

6·25(한국전쟁)는 지극히 파괴적인 전쟁이었다. 휴전회담이 개시된 1951년 이후 한 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는 소모전이 전개되면서 엄청난 수의 전사자가 발생했어. 그런데 수십 차례 고지를 뺏고 뺏기는 격전이 치러지던 1951년 중부전선의 미군들 사이에 이상한 질병이 돌기 시작했어.

“두통, 오한, 고열, 요통, 구토와 복통이 있고 얼굴과 가슴에 출혈 반점도 있었으며 쇼크에 빠지는가 하면 1주일 후에는 소변이 잘 나오질 않고 혈뇨와 혈변도 있었다. 특이한 것은 모든 환자가 심한 단백뇨를 나타내는 것이었다(이재광·황상익 〈신증후 출혈열의 질병사적 고찰〉).” 경험 많은 미국 군의관들도 도통 병의 정체를 알 수 없었어. 이 병은 속수무책으로 전방의 국군과 유엔군 사이에 퍼져 나갔단다. “전쟁 기간 중 모두 3200명의 유엔군 장병들(미군만 2000명 이상)이 출혈열에 걸려 대략 500명이 목숨을 잃었다(〈사이언스 타임스〉 2017년 3월20일).” 중공군과 인민군도 사정은 다르지 않아서 그들은 유엔군이 세균전을 벌인다고 목소리를 높였지.

그러나 전쟁이 끝나고 휴전협정이 체결된 뒤에도 이 괴질은 휴전선 근방에서 계속 기승을 부렸어. 아무도 이 괴질의 정체를 알 수 없었지. 이 괴질과 수십 년간 맞선 끝에 마침내 그 멱살을 잡아 밝은 세상으로 끌어내고 백신까지 개발한 공로자가 있었어. 이호왕 박사가 그분이야.

1928년 함경남도 신흥에서 태어난 이호왕은 일제강점기 의과대학에서 내과와 미생물학을 선택해 공부하게 된다. “한국전쟁 중 말라리아, 콜레라, 매독, 임질 등 수많은 전염병을 보며 이왕 의사가 된다면 많은 환자들을 돌볼 수 있는 곳을 가야겠다고 생각(과학기술한림원 웹진)”한 이호왕의 선택은 그에게나 나라에게나 크나큰 축복이었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59년 귀국해 서울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그의 관심은 전염병 연구에 가 있었어. 처음에는 일본 뇌염을 연구했는데 한발 앞서 일본에서 뇌염 백신이 나오며 5년 동안의 연구가 그만 도로아미타불이 되기도 해. 그러나 이호왕은 실망하지 않고 다음 파트너(?)를 찾는다. 그게 유행성 출혈열이었지.

ⓒ연합뉴스2007년 10월18일 이호왕 기념비 제막식에서이 박사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들쥐의 폐를 살펴보시오”

한국전쟁 때부터 1967년까지 미국 연구진이 기를 쓰고 노력했으나 숙주가 들쥐일 것 같다는 추정 외에는 밝혀낸 것이 없었던 괴질. 해마다 국군 병사 수백 명을 쓰러뜨린 침묵의 살인마. 미국 육군의 지원을 받으며 이호왕은 “조교, 동물실험실 연구원, 야외 채집원, 조직배양 기술자, 동물사육인 등 7명의 연구팀을 꾸렸다(〈경향신문〉 1996년 12월26일).” 다들 막막하고 험난한 길에 접어든 나그네였지만 그중에서도 야외 채집원 김수암은 고생복이 터진 셈이었지.

출혈열 환자가 발생한 군부대 주변에서 들쥐를 잡아오는 게 그의 임무인데 하루는 사색이 돼서 돌아왔단다. “간첩으로 몰려 사살당할 뻔했습니다.” 야행성 들쥐들은 시간이 지나면 제풀에 죽어버렸기에 살아 있는 들쥐를 확보하려면 아침이 오기 전에 쥐덫을 수거해야 했거든. 캄캄한 최전방에서 들판을 사각거리며 더듬는 괴한이 총을 맞지 않으면 이상하지. 그뿐만 아니라 김수암을 비롯한 연구진 대부분은 본인들이 연구하던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 사경을 헤매기도 했어. 들쥐를 셀 수도 없이 잡아들였고 그 내장을 일일이 들여다보았지만 유행성 출혈열 바이러스는 좀체 발견되지 않았단다. 설상가상으로 1975년 미국 육군 의학연구개발사령부는 더 이상 연구비를 지급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어.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호왕 박사는 출혈열 연구를 하다 은퇴한 W. F. 젤리슨 박사로부터 연락을 받아. “들쥐의 폐에 기생하는 곰팡이 독소를 살펴보시오.” 그리 탐탁한 제안은 아니었어. 연구진은 곰팡이 따위가 아니라 바이러스가 유행성 출혈열의 이유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그런데 ‘폐’라는 단어가 이호왕 박사의 정수리를 내리쳤지. 그때까지 들쥐의 폐를 들여다본 적은 없었던 거야. 출혈열 환자의 다른 장기에는 출혈이 발생했지만 폐는 멀쩡했기 때문에 어느 학자들도 들쥐의 폐를 조사해보지 않았거든. 마침내 1975년 10월 이호왕 박사 연구진은 유행성 출혈열의 덜미를 잡았어. “들쥐의 폐 샘플에 환자의 항체가 있는 혈청을 반응시키고 현미경을 들여다봤더니 밤하늘의 은하수같이 노란 빛이 나타났어요. 새로운 별을 찾아낸 거죠.” 수천 명의 목숨을 잡아먹은 바이러스였지만 발견의 순간만은 어느 일등성보다도 더 환하게 빛났을 테지.

이후 이호왕 박사는 등줄쥐의 오줌에서 유행성 출혈열의 원인이 되는 바이러스를 분리해낸단다. 하지만 병원체 발견은 문제 해결의 시작일 뿐이었어. 바이러스에 대적할 백신이 필요했지. 그로부터 10여 년간 이호왕 박사는 유행성 출혈열 백신을 만들기 위해 골몰한다. 인체에 해롭지 않으면서 항체를 형성할 수 있을 정도의 병원체 양을 가늠한다는 것은 ‘예술’에 가까운 일이었어. 자칫하면 ‘물백신’이 될 수도 있었고 조금만 과도하면 접종자가 환자 명단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으니까.

결국 이호왕 박사와 연구진은 세계 의학사의 선배들처럼 자신의 팔목에 주사기를 대었단다. 7명. 연구를 공동 진행하던 제약회사 직원들도 팔을 걷었어. 30명. 성공적이었지만 이것으로는 부족했어. 그때 가뭄 속의 단비 같은 일이 벌어졌지. 경기 북부의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치던 기자 한 명이 유행성 출혈열에 걸린 거야. 그러자 골프장 근무자 수백 명이 떼를 지어 백신을 맞겠다고 몰려왔다고 해.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1990년 이호왕 박사는 ‘한타박스(Hantavax)’라는 이름의 유행성 출혈열 백신을 세상에 내놓게 되었단다.

한타박스는 ‘한탄 바이러스’에서 나온 이름이야. 새로운 바이러스를 발견한 이는 응당 그 명명권을 가지며 세계 과학사에 이름을 남길 권리가 있지만 이호왕 박사는 여기에 한탄강의 이름을 붙였다. “학문적 업적을 개인의 이름으로 돌리는 것은 후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거니와 병원체를 발견한 것도 한탄강 주변이었고, 한탄강은 남과 북이 갈라진 강으로 우리 민족의 한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여겨져 ‘한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해.

인간이 자연을 ‘정복’한다는 건 오만한 표현이겠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의 비밀을 풀어헤치고 인간을 위협하는 자연에 대해 저항하기를 멈추지 않았단다. 코로나19 역시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덜미를 잡힐 거야. 자신들이 연구하는 병균에 감염되고, ‘움직이면 쏜다’ 소리를 들어가며 들쥐 굴을 파헤치고 종국에는 자기 팔에 주사기를 누른 이들에게 한탄 바이러스가 무릎을 꿇었듯 말이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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