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그림

걸어서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산 한진중공업 김진숙 지도위원이 정리해고에 맞서 85호 크레인 고공농성을 벌이던 2011년 7월이었다. ‘희망버스’라는 운동이 시작됐고 우리 또한 해고 노동자로서 어떤 일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두려웠던 것은 김진숙 지도위원의 진정성이었다. 허투루 내뱉는 말 한마디 없는 사람의 행동은 때론 무서운 법이다. 동료들을 설득하며 평택에서 부산까지 9일 동안 400㎞ 넘게 무작정 걸었다. 오십 줄이 넘어 반백이 돼버린 해고자들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여름 장맛비를 뚫고 부산을 향해 걷고 또 걸었다. 부산에 가까워지면서 출발할 때 했던 말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절뚝거리며 걷는 동료들의 등을 보며 빗물만큼이나 많이 울었다. 많은 말과 약속과 다짐을 했지만 어떤 말을 지켰는지 또 어떤 약속이 미끄러졌는지 남은 해고자들의 복직을 보며 심란하기만 하다.

5월4일 쌍용차 해고자들이 마지막으로 현장 복직을 했다. 처음 복직 약속이 2015년 12월이니 그로부터도 5년이 흘렀고, 2009년 해고 이후로 따지면 11년 만이다. 잘릴 때는 순식간에 잘려 나갔지만 복직은 5년이란 세월 동안 느리고 더디게 진행되었다. 뜯겨 나간 목숨을 잇는 일이니 붙이기가 힘들었던 것일까. 지켜보는 이들조차 화가 날 만큼 몇 번의 약속 뒤집기를 경험한 이후에야 비로소 만들어낸 결과다. 동료와 가족 31명이 숨졌고 옷에선 향내가 떠나지 않았다. 옥상 위로 쏟아지던 노란 최루액과 검은 옷의 경찰이 우리의 2009년 여름을 앗아갔다. 살려고 서로를 향해 휘둘렀던 쇠파이프 멍 자국이 문신처럼 기억 속에 배어 있다. 복직해서 만나는 동료들과는 가급적 과거 얘기를 하지 않았고 불현듯 떠오르는 지난 기억에 몇 번이나 몸서리도 쳤다. 파손된 관계로 살고 있고, 복직자 사이의 앙금도 길었던 시간만큼이나 여전하다. ‘함께 살자’는 구호는 더 이상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기억 속 글로만 남았다.

우리가 꿈꾸던 복직을 이뤄냈는데 기쁘지 않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잃은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인데 그 가운데서도 예전과 같은 동료애가 사라졌다. 어렵고 힘든 시간을 함께 뚫고 지나온 사이지만 미움도 커진 사이가 되어버렸다. 삼키는 말이 늘었고 숨기는 표정이 많아졌다.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도 즐겁게 지냈던 해고 시간이었는데 복직해서 임금 제대로 받으며 더 각박한 사이로 변했다. 의리와 동지애는 삭아버렸다. 마음을 모아 만들고자 하는 일들도 하나같이 깨지고 있다.

그렇다고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것이 생활 안정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밀린 빨래를 하듯 빚을 갚아나가야 하고 자녀에게도 시간을 쏟아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가 끝끝내 움켜쥐고 있던 가치만은 놓아선 안 된다. 함께 살자는 구호가 단순히 해고를 피하기 위한 방패막이가 아니었다면 더더욱 그렇다. 지난 시간 우리가 꿈꿨던 내일의 모습을 잃어버리는 건 복직을 더욱 무가치하게 만들 수 있다.

의미와 가치 찾는 일 벌여나갈 수 있기를

쌍용차 해고 사태는 한국 사회에 일대 경종을 울린 사건으로 기억되어야 한다. 무분별한 해고가 낳은 참상은 가혹할 정도로 아팠다. 죽음뿐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또한 메마르고 건조하게 만들었다. 의심하고 미워하게 만들어버렸다. 가족의 해체는 복직으로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해고와 복직 사이에 벌어졌던 수많은 서사가 있다. 시간과 날짜로도 구분할 수 없는 인간 개인에게 들이닥친 모진 고뇌의 순간순간이 있다. 생각은 성장을 돕지만 좌절 또한 배양한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이 부당한 정리해고에 맞서 의로운 싸움을 했고, 그 영향으로 한국 사회가 노동문제에서만은 조금 더 전진했길 기대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직한 이들이 일상에 파묻혀 허덕이기보다 의미와 가치를 찾는 일을 벌여나가길 소망한다. 우리가 연대하고 연대하고 연대하는 빛나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희망한다.

기자명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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