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가 정해준’ 관계에서 우리는…
  •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 호수 662
  • 승인 2020.05.27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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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켈 그림

영화 〈이장〉에는 낡아버린 가부장이 등장한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5남매의 큰아버지는 외딴섬에서 한평생을 살았다. 이 노년 남성은 재개발 부지에 들어가버린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러 어렵게 시간을 내서 모인 네 자매에게 ‘오느라 고생했다’는 인사치레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머슴아’처럼 입은 넷째 조카 혜연을 유일한 아들인 막내 조카와 헷갈려 하는 와중에 첫마디로 “장남도 없이 어떻게 무덤을 파냐!”라고 대뜸 소리를 지른다. 자신의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싶으면 더 설명하는 대신 마당의 항아리를 들어서 깨버린다.

처제는 화장했어도 남동생은 반드시 매장해야 한다고, 그것이 가부장에 대한 도리라고 생각하는 자신의 의견을 조카들이 왜 받아들이지 않는지 도통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다. 그렇지만 이장 보상비 500만원이 경력단절, 이혼, 결혼 준비 등 개개인의 사정으로 꼭 필요한 네 자매에게 ‘진짜 가부장답게’ 돈 1000만원 내놓을 능력은 없다. 그 장면에서 그는 마치 고칠 수 있는 부품이 단종된 기계 같다. 멋대로 작동하고, 제 기능을 못하고, 존재 자체가 처치 곤란이라는 느낌.

그리고 이내 뜨끔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능을 제대로 못하는 인간을 마주할 때의 내 기분은 종종 이랬다. 도무지 공존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를 마주할 때 그와 어떻게 하면, 얼마나 거리를 두면, 어떤 규칙을 만들면 공존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보다는 나의 세계에서 그 존재 자체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간단한 결론으로 미끄러지곤 했다. 비혼 공동체를 실천하며 평등의 당위와 ‘혈연가족 밖 서로 돌보는 관계’에 대해 말하지만, 내면 깊숙이 나는 여전히 인간 그 자체로서 의미와 가치를 완전히 믿지 않는 능력주의자이고, 이 사회는 그런 내 생각을 자연스럽게 떠받치도록 짜여 있다. 인간 그 자체의 존엄을 믿지 않고, 기능으로 평가하며, 투자가치가 있는지 끊임없이 재는 암묵지와 규칙들이 있다.

돌봄에 대해 생각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아기와 어린이를 떠올린다. 몸도 머리도 말랑말랑하고, 성인에게 대항하지 못한다고 여겨지는 무해한 존재. 논쟁을 걸어오면 ‘대든다’라는 말로 제압할 수 있고, 돌발 행동을 하더라도 육체적으로 제지하기 쉽다 여긴다. 반면 장애인 돌봄, 노인 돌봄에서 간병이 어렵게, 때로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와 반대다. 제 기능에 실패한 존재, 성장이 아니라 쇠퇴하는 존재, 그러나 자의식과 욕망이 있고 이를 표현하고 만족시키고 싶어 하며, 원칙적으로는 이를 보장받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도 기능적으로 끊임없이 가치를 평가받아온 사람들은 이런 모순을 감당하기 어려워한다. 곤란함이 상쇄되려면 다른 수지타산이 맞아야 한다. 부자 노인이 자식(딸과 며느리)에게 상속의 ‘딜’로서 효를 명목 삼아 돌봄을 요구하는 것은 가능하다. 아동학대, 격리시설 문제, 노인 방임과 고독사는 그와 결을 같이한다.

사회가 정한 돌봄이 당연한 대상은 누구인가

지금은 코로나 정국이고 사내 게시판에는 ‘가족돌봄휴가 제도 안내’ 공고문이 오래 붙어 있다. 고용노동부 지침으로 내려온 공고에서 사회생활과 기능(돈 벌기)을 제대로 하는 성인이 정식 휴가를 내어 돌볼 수 있는 대상은 배우자, 부모, 조부모, 자녀, 손자녀다. 사회가 정한 돌봄이 당연한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이 누구인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대놓고 폭로하는 규정이 아닌가! 이 시기 우연찮게 부모도 자식도 아닌 성년의 동생이 아파서 24시간 돌봄을 해야 하는 주 보호자가 된 나는 연차를 끌어다 쓰고 재택근무 일정과 사이버 강의 수강 기간이 남아 있는 친구들의 손을 빌리며 버틴다. 나는 매일 게시판 옆을 지나며 그림의 떡처럼 공고문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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