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윤무영

눈을 떴으나 몸이 묶여 있었다. ‘좌우로 들썩거리며 몸을 칭칭 동여맨 벨트에 저항했다.’ 잠든 채 병원으로 실려 왔고 12시간 만에 깨어났다고 간호사가 알려주었다. 병실을 배정받은 뒤 데스크에 문의해 뇌파검사 종이를 달라고 부탁했다. 정신과에선 뇌 활동을 측정한 뇌파검사지가 폐지로 버려진다. ‘얇으면서도 만지면 쫄깃한 느낌이 들었고 연필 볼펜 어느 것으로 쓰든 필기감이 좋은’ 종이였다. 뇌파검사지 일기장을 만들었다. 일간지 기자이기도 한 이주현 작가가 병원에 다시 강제 입원했다. 한 달 만이었다.

2001년 조울병이 발병했고 2006년 재발했다. 두 차례 입원했고 그사이 몇 번의 파도를 넘었다. 그는 조울병을 경험하며 많은 일기와 메모를 남겼다.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면 광기의 절벽으로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 나의 말을 영원히 잃어버릴까 두려워서 펜을 들었다.’ 그의 책 〈삐삐 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는 매우 사적인 기록이지만 조울병 일반에 대한 대중의 이해를 돕는다. 경험했던 감정과 사건을 바탕으로 병의 양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기록했다. 조증과 울증을 지날 때 어떤 상태에 놓이는지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빠른 속도로 생각하고 의욕이 과다하며 지나치게 쾌활하고 ‘모든 걸 이해한다는 느낌’의 시기(조증)를 지나 마침내 짙은 우울이 찾아온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가 출간된 지 2년 지났다. 정신과 전문의나 심리학자 같은 전문가가 아닌 정신질환 당사자의 본격적인 수기로는 처음으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크라우드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 독립출판을 했다가 반응이 좋아서 단행본으로도 나왔다. 출간 직후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 백세희 작가 스스로 “이렇게까지 잘나갈 일인가” 의아해했을 정도다. 10년째 기분부전장애를 겪고 있는 작가의 정신과 치료 기록을 담았다. ‘참을 수 없이 울적한 순간에도 친구들의 농담에 웃고,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허전함을 느끼고, 그러다가도 배가 고파서 떡볶이를 먹으러 가는 자신이 우스웠다’고 자신의 상태를 묘사했다.

‘내 이야기인 줄 알았다’는 독자들의 반응이 많았다. 전후로 우울증 당사자들의 글쓰기가 이어졌다. 비슷한 시기 독립출판을 통해 나온 우울증 수기 〈죽지 않고 살아내줘서 고마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정신과는 후기를 남기지 않는다〉 등이 단행본으로 나왔다. 경험을 고백하는 방식도 다양했다. 우울증 치료의 경험을 만화로 그린 〈판타스틱 우울백서〉와 기분부전증을 가진 작가의 글과 그림을 묶은 〈나는 내가 우울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가 그렇다. 오랫동안 드러내기를 주저하던 우울증의 경험이 각축을 벌이듯 출판시장에 쏟아졌다.

과거에 비해 정신과 문턱이 낮아지고 우울증에 대한 편견이 옅어진 사회 분위기와도 연관이 있었다. 출간된 책들의 공통된 조언은 ‘병원에 가고 약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 함부로 완치를 이야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챙기고 돌봐야 하는 만성질환’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어렵사리 꺼내놓은 당사자들의 경험을 통해 독자들은 문 닫힌 정신과 진료실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우울증은 (완치가 힘들다는 점에서) 마음의 감기라고 부르기에 무리가 있고 환자에게 쉽사리 “다들 힘들다”라거나 “힘내”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일부는 폭력적인 어린 시절과 각박한 양육환경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지만 우울증 수기를 담은 책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서사는 ‘나쁘지 않은 가정과 경제적 조건 속에서도 자주 우울했다’는 점이다. 강조되는 건 당사자들의 평범함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질환이 그만큼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5년마다 조사하는 정신질환 실태조사(2016)를 보면 주요 17개 정신질환에 대한 평생유병률은 25.4%로, 성인 4명 중 1명이 평생 한 번 이상 정신건강 문제를 경험한다(전문가와 상의한 적이 있는 경우는 9.6%에 그쳤다).

당사자 글쓰기는 우울증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신질환에 대한 이야기로 확대되고 있다. ‘양극성 장애 1형, 조증과 망상 및 환청을 동반’한 질환(〈당신은 아파했던 만큼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공황장애(〈넌, 생생한 거짓말이야〉), 조현병(〈책이 아팠던 내 마음을 고쳤어〉) 등 병의 종류와 개인 경험에 따라 각기 다른 증상을 들려준다. 정신질환자의 곁을 지키는 가족의 기록도 있다(〈오늘도 나는 너의 눈치를 살핀다〉). 정신병원 출신 간호사가 정신병동의 풍경을 담아내는가 하면(〈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한 종합병원 정신과의 임상심리사는 스스로의 우울증을 고백한다(〈정신과 박티팔씨의 엉뚱하지만 도움이 되는 인간 관찰의 기술〉).

어떻게 우울을 서사화할 것인가

고통스럽고 내밀한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해 보인다. 이들은 왜 쓰기로 결심했을까. 백세희 작가는 우울증인지 아닌지 헷갈리는 사람을 위해 내원 일기를 썼다고 했다. 이주현 작가는 ‘조울병을 비롯해 다른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과 세상을 연결하는 징검다리를 놓고 싶었다’고 한다. 글쓰기를 통해 질병과도 거리두기가 가능해진다. 이주현 작가는 병원에서 개최하는 투병문학상에도 응모했다. 그동안의 병력을 돌아보는 시간이자 조울병을 객관화하는 데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박티팔 작가는 ‘나 자신을 위해 글을 썼고, 쓰다 보니 재미있어서’ 또 썼다.

정신질환 당사자들의 글쓰기는 일반인의 에세이가 약진하는 출판계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는 “담론이 사라진 시대에 개인의 가치와 감정이 훨씬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다. 공동의 목표를 찾을 수 없는 세대의 박탈감과 그럼에도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싶은 욕구가 같이 가는 것 같다. 경제경영서 역시 최근 몇 년 신자유주의나 세계화 같은 키워드의 책이 아니라 자기계발서 중심이다. 개인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관심이 많다”라고 말했다.

〈다소 곤란한 감정〉의 김신식 작가는 지금의 출판시장을 ‘감정 소비 경험을 독려하는 콘텐츠의 활황’으로 이해한다. 그는 우울증을 겪어온 ‘일반인 기록자’를 우울 매개자라고 명명한다. 진료실에서의 체험을 바깥으로 서사화하는 이들이 심리·의료계의 ‘슈퍼 아마추어’라는 것. 어떻게 우울을 빼어나게 서사화할 것인가를 놓고 경합이 벌어지고 있다는 해석이다. 자기감정을 능숙하게 검토하는 이와 그렇지 못한 이 사이에 나타난 감정 해석의 격차를 말하기도 한다. “우울이라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 가운데 당사자들의 수기가 많이 나오는 게 이들을 돕는 방편도 되지만 나는 왜 이렇게 해석하지 못할까 하는 박탈감의 요인이 되기도 한다.” 비슷한 수기가 반복되자 혹평을 받는 책들도 등장했다. 그럼에도 당분간 ‘고백’은 지속될 것 같다. 오래 침묵한 당사자들이 이제 막 입을 떼기도 했고, 질환의 종류를 떠나 ‘인간이란 존재가 모두 취약하기 때문에 아픈 것이고 그러면서도 방어적 본능, 강인함을 갖고 있어 견딜 수’ 있기 때문이다(〈삐삐 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중).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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