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전남 보성군 복내면 유정리에서 삼베 농사를 짓고 있는 이찬식씨(76)는 스스로를 ‘삼베에 미친 사람’(마광)이라고 부른다. 40년 전부터 삼베 밭 갈고, 씨앗 뿌려 가꾼 뒤 수확해서 실 만들고, 베를 짠다. 그가 이렇게 만든 삼베옷이 ‘보성포’다. 9년 전에는 삼베옷 외에도 삼으로 만든 독특한 종이(삼지)까지 개발했다. 이씨가 만든 삼지는 해외에서 더 인기다. “영국 왕실에서도 가져다 썼고, 일본과 타이완에서도 주문이 끊이지 않는다. 문화재청에 성분 분석을 의뢰했더니 함축성·항염성·방염성이 기존 한지에 비해 우수하다고 알려왔다.”

이씨가 이처럼 삼베 외길을 고집하는 배경에는 한 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좌절이다. 그는 젊어서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 1967년 대학을 졸업한 뒤 실제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연좌제 덫에 걸렸다. 바로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 ‘빨갱이 자식’이라는 주홍글씨 때문에 공직 진출은 불가하다는 경찰의 통보였다.

1948년 10월19일 일어난 여순 사건 당시 아버지 이병권씨는 복내면 당촌마을에서 정미소를 운영하고 있었다. 당시 제주에서 일어난 4·3 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한 여수 주둔 14연대는 진압군의 토벌작전에 밀려 이병권씨의 정미소로 들어와 식량 제공을 요구했다. “밤에 총 대고 쌀 내놔 밥 내놔 하면 안 내놓을 사람이 어딨는가. 할아버지가 겨우 빼낸 뒤 경찰은 아버지를 복내면 보도연맹 책임자로 앉혔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경찰은 이병권씨를 포함해 복내면 일대 보도연맹원 37명을 소집해 집단 총살했다. 그날 이후 이씨에게 ‘아버지’는 금기어였다. “경찰이 시신 근처에도 못 가게 해서 1955년에야 아버지 유골만 찾아와 장례를 치렀다. 그 뒤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함구령을 내렸다.”

그는 이후 진로를 농업으로 정했다. 문중 땅 14만 평이 밑천이었다. “14만 평 중 5만 평은 밭 만들고, 5만 평은 초지 조성하고, 3000평은 논 만들고 해서 10년 동안 농업 쪽 전 과정을 다 해봤다. 최종적으로 친환경 삼베 농사에 올인했다.” 이찬식씨는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빛바랜 아버지의 흑백사진 한 장도 찾아냈다. 아버지와 함께 학살당한 뒤 뿔뿔이 흩어진 유족들을 찾아 전국을 돌며 8명을 찾아냈다. 최근에는 여순 사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운동에도 전력을 다하고 있다. 지난해 가을 순천대학교 여순연구소가 펴낸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이름, 그리운 아버지〉라는 ‘여순 10·19 증언록’에도 그의 증언이 담겼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