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영 그림

김유담의 첫 소설집 〈탬버린〉(창비, 2020)에는 단편소설 여덟 편이 실려 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이 연작소설인 것은 그것이 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한 사람의 주인공이 주변 인물을 차례로 관찰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탬버린〉에 실려 있는 작품들은 그런 요건을 갖춘 게 아닌데도 연작소설인 것처럼 읽힌다.

이 소설집에 나오는 여주인공인 인숙(‘핀 캐리’), 하경(‘공설운동장’), 영주(‘우리가 이웃하던 시간이 지나고’), 지연(‘멀고도 가벼운’), 인희(‘가져도 되는’), 선재(‘두고두고 후회’), 피티(‘영국산 찻잔이 있는 집’)는 대부분 대학생이거나,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지방 소도시를 고향으로 두었다는 공통점을 지녔는데, 그들의 고향은 ‘밀양’이나 ‘포천’이라는 실명으로 표기되거나 ‘Y시’ 또는 ‘M시’와 같은 기호로 처리되어 있다. 〈탬버린〉은 청년들이 서울로 와서 입사하는 과정을 변주하고 있다.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여주인공들의 꿈은 오직 하나다. 인숙은 고등학교 1학년 때 고향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서울에서 살기 위해 일부러 사투리를 쓰지 않고 친구를 깊게 사귀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한 집안의 장녀인 하경은 고등학교 시절 몇 번이나 삐뚤어진 길을 가고 싶었으나 “그랬다가는 절대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이를 악물고 공부한 끝에,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지방 국립대나 교대 대신 서울 진학을 선택한다. 이 때문에 그녀는 가족들로부터 이기적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또 지연은 하경보다 더 어린 초등학교 때부터 “고향을 떠나 먼 곳으로 가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쇠락해가는 고향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이들의 청소년기를 불안과 초조로 물들였다.

‘사람은 서울로 보내고’라는 말이 옛날부터 있어왔지만, 그것은 금의환향과 은퇴 후 낙향을 전제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되돌아갈 고향이 없다. 2018년 연초에 발행된 〈시사IN〉 제538호와 제539호 기획기사는 지방 소멸의 심각성을 심층 취재한 기획물로, 전국의 162개 시·군 지역 중 유소년 인구보다 노인 인구가 두 배 이상 많은 지역이 71군데나 된다고 말한다. 국가(state)와 인구통계(statistic)가 같은 어원인 것처럼, 마을 인구가 감소하면 마을도 따라 사라지고 만다.

어디서 태어났느냐가 중요한 사회

비수도권 지방도시의 인구가 감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 한 가지는 지방도시의 젊은이들이 지위 경쟁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서울 진학과 취직을 선호하는 때문이다. 일본 정부 주도의 지방 창생(지방 회생) 정책의 모순과 허점을 줄기차게 지적해온 야마시타 유스케는 〈지방 회생-인구 감소와 수도권 초집중 극복의 길〉(이상북스, 2019)에서 위와 동일한 이유를 ‘직업 권위의 서열화’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직업에는 서열이 있다. 직업 권위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결정한다. 농림어업의 권위는 낮다. 샐러리맨(화이트칼라)은 중간 수준에 위치하고, 그들의 관리직 권위는 더 높다. 학자나 의사, 변호사 등과 같이 ‘선생님’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또 그 위에 존재한다. 공무원의 권위는 2000년대 이후 상대적으로 높아졌다. 동일한 내용의 업무라 할지라도 수도권에서 일하면 권위가 더 높아지고 지방에서 하면 낮아진다. 같은 일자리라 하더라도 농촌보다 도시에서의 권위가 더 높고, 같은 도시라도 인구 규모가 큰 도시일수록 일자리의 권위가 더 높아진다. 공무원도 기업도, 대학도 마찬가지로 도쿄에 위치하면 일류이고, 다음에는 각지의 거점도시, 그다음은 작은 도시, 작은 읍·면, 그리고 마을로 갈수록 그 권위는 점점 낮아진다. 이러한 권위의 서열화가 진학과 취업에서 젊은이들의 이동 방향을 결정한다.” 지연의 애인이었던 은호가 대기업 계열의 생명보험회사와 전자회사 가운데 전자를 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전자회사는 지방 공장으로 많이들 보낸데. 난 지방에서는 못 살 거 같아.”

야마시타 유스케는 직업 권위의 서열화를 강화·존속시키는 핵심이 국가라고 말한다. 한 나라의 수도를 중심으로 피라미드화한 행정과 시장의 중앙집권화를 해체해야 고향에서 성공하려는 인재도 생기고 금의환향할 공간도 생긴다. 중앙집권화를 유지한 채 이루어지는 지방 창생은 중앙 정재계의 이해만 키워 도리어 지방 소멸을 앞당긴다. 예컨대 아베 정권은 지방 소멸을 경고한 ‘마스다 보고서(2014)’의 위세에 힘입어 농촌을 압박하는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밀어붙였다(미국이 탈퇴하면서 CPTPP로 변경). 인구 감소와 지방 소멸이라는 충격을 이용해 일종의 쇼크 독트린(Shock Doctrine:대참사를 이용해 실시되는 과격한 시장 원리주의 개혁)을 꾀한 이런 사례는 지방 회생이라는 위급한 상황조차 중앙 정재계가 이득을 흡수하는 기회라고 말해준다.

지방의 소도시에서 태어난 주인공들은 ‘흙수저일수록 어디서 태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절규한다. 서울 사람은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서울에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100m 달리기 시합에서 이미 50m나 앞서 있는 것이다. 인희는 자신과 똑같이 지방 소도시에서 기를 쓰고 서울로 올라와 대학을 마친 남편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딸은 어떨까. 우리가 윤지에게 괜찮은 스타트라인이 되어줄 수 있을까.” 스티브 잡스도 워런 버핏도 조지 소로스도 미국이 아닌 아프리카 오지에서 태어나거나 자랐다면 어떠했을까.

하경은 아르바이트와 옥탑방 생활에 지쳐 대학 생활 2년 만에 휴학계를 내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고향에 머무르며 등록금을 벌겠다고 찾아간 입시학원에서 그녀는 고등학교 때 잠시 다녔던 단과학원의 국어 강사였던 L 선생을 만난다. 서울 생활에 좌절한 하경에게는 가벼운 연애였던 반면, 임용고시에 번번이 떨어진 지방대 출신의 L은 자못 적극적이다. 두 사람의 연애는 하경이 복학을 결정하면서 막을 내리는데, 이런 결말은 하경이 L을 본의 아니게 농락한 것으로 비친다. 방금 요약한 ‘공설운동장’의 플롯과 결말은 김승옥의 〈무진기행〉(1964)을 떠올려준다. 김승옥의 주인공이 덜컹이는 버스 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것은 “당신은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 안녕히 가십시오”였다면, 하경이 밀양을 떠나며 보게 된 현수막에는 “잘사는 밀양, 따뜻한 밀양”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다. 남녀의 처지가 바뀐 이 작품은 물론이고, 〈탬버린〉에 등장하는 무능력하고 실패한 모든 아버지들은 지방 소도시의 쇠락과 남성 권위의 실추를 상징한다.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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