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간 문화’를 간과하는 나의 법관 동료들에게
  • 정욱도 (대구지방법원 부장판사)
  • 호수 661
  • 승인 2020.05.2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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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부장판사가 ‘n번방’ 사건을 키운 사법부의 자성을 촉구하는 글을 보내왔다. 강간 문화에 일조해온 스스로를 돌아보고, 남성 법관들이 성범죄를 과소평가할 소지가 있음을 지적했다.
ⓒ연합뉴스4월22일 춘천지방법원 앞에서 여성단체 회원들이 안일한 사법부를 비판하는 피켓 시위를 열었다.

내겐 강압적 성행위에 대한 판타지가 있다. 이 선언에서 부끄러움과 위화감을 함께 느낀다. 나는 성범죄가 어떻게 피해자를 파괴하는지 이해하고 이를 단죄해야 할 법관이다. ‘○○양 동영상’이 공유되던 시절, 나는 그 영상을 보는 게 범죄 가담처럼 느껴져 누가 건네주던 고화질 버전을 애써 거절했다. 이런 판타지는 당혹스럽다. 지인들도 위화감을 느낄 게 분명하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따로 없다. 사회인으로서 망신과 법관직에 대한 비난까지 감수하며 이런 선언을 하는 이유? n번방 사건을 비롯한 성범죄와 싸우는 모든 이들을 위해, 우리의 ‘주적’이 무엇인지, 그에 대항할 전략은 어떠해야 할지 제시하기 위해서다.

어디서 온 걸까, 이 판타지. 내 안의 하이드를 인정하기 싫으니 ‘강간 문화’ 탓으로 돌려볼까. 강간 문화는 존재한다. 섹스란 것을 알게 된 초등학교 친구들은 벌써 손가락 사람으로 강간을 묘사하며 놀았고, 남자 화장실에는 ‘따먹었다, 덮치고 싶다’는 낙서가 흔했다. 강간을 모티브로 한 농담은 성년이 될 때까지 일일이 기억하기도 어려울 만큼 들었다. 여성을 사물화·대상화하고 성을 정복·획득·지배와 결부시키는 문화는 만연해 있다. 나는 그저 거기에 오염된 불쌍한 영혼이라고 자신을 변명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부끄럽게도 본성 또한 크게 작용했음을 나는 느낀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집요하고 강렬할 수가 없다. 즐겨 여성을 소비하고 강압적 성관계의 실행이나 관찰을 원하는 이 본성, 악하다. 나만의 본성이 아니기에, 아마도 남자들 거의 전부가 약간씩은 공유하는 본성으로 믿어지기에, 이를 남성의 ‘built-in evil(내재된 악)’이라 혼자 일컫는다. 남성 자체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악하게 발현될 잠재력을 가진 본성이 정도 차이는 있을지언정 기본 사양으로 장착돼 있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성범죄와 무관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실행에 옮기지 않을 남자들은 존중받을 자격이 있다. 그들은 본성을 결코 파괴적인 방식으로 발현시키지 않는다. 보복이나 법의 응징이 두려워서가 아니다. 타인과 평화로운 공존을 추구하는 ‘선한 본성’을 아울러 가졌기 때문이다. 나아가 악한 본성의 발현을 막을 힘을 갖췄기 때문이다. 그 힘이란 여성을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인지력, 자신의 행동이 어디까지 용인될지를 가리는 분별력, 옳지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자제력 등이다.

본성과 강간 문화는 서로 꼬리를 문 한 쌍의 뱀처럼 상호 강화하는 관계인 것 같다. 강압의 판타지는 이런 고리에서 생겨나고 다시 본성·문화와 결합하여 성범죄의 토양을 이룬다. 본성의 꿈틀거림과 강간 문화의 더러운 ‘콜라보’가 곧 성범죄라고 생각한다. 본성 그 자체를 문제로 지목해서는 답을 내기가 어렵다. 남자들의 본성에는 성범죄를 범할 잠재력과 성범죄를 억누를 잠재력이 모두 들어 있다. 그렇다면 문제는 ‘악한 본성’을 거침없이 발현해도 되는 문화를 바꾸는 것이다. 강간 문화는 내재된 악의 발현을 마치 정상인 것처럼 오도함으로써 실행 의욕을 북돋는다. 이걸 없애야 한다. 갑질 문제를 해결할 때 인간의 권력적·지배적 본성을 비난하기보다, 사회구조의 종속관계를 완화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 해결에 더 유익한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내재된 악 자체에 대해서는 죄책감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죄책감을 느껴야 마땅한 대목은 따로 있다. 강간 문화의 형성과 유지에 소극적으로 동조한 공범임을 나는 자백한다. 내밀한 판타지의 자인보다도 한층 부끄러운 고백이다. 나는 주변 남자들이 여성을 사물화·대상화하고 ‘따먹느니, 보내버리느니, 자빠뜨리느니’ 농을 지껄일 때 속으로 불편해할지언정 제지하거나 지적한 기억이 거의 없다. 반응 없이 넘기거나 어색하게 웃고 말 뿐이었다. 더러는 맞장구도 쳐줬다.

ⓒ연합뉴스4월20일 대법원 양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 범죄의 양형 기준을 논의하고 있다.

왜곡된 남성성, 부인하고 위축시켜야

일단 무지했다. 그게 혐오 표현이고, 인지력·분별력·자제력이 모자란 이들의 성범죄 실행에 힘을 보태게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다. 더 큰 이유는 ‘선비질’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저속한 농담과 범죄적 언사를 원초적 남성성의 표출로 쳐주는 분위기에서 ‘덜된 남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상상을 공유하며 은밀히 결속을 다지는 자리에서 ‘혼자 잘난 놈’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비겁했다. 옳은 소리가 남성성 부족의 자인으로 비칠까 봐, 남자 집단에서 소외될까 봐 두려웠다. ‘갑분싸’에 이어질 경멸과 ‘넌씨눈(넌 XX 눈치도 없냐)’을 견디기 어려웠다.

이상의 자기관찰, 경험, 그리고 반성으로부터 나는 성범죄의 복합적 원인 중 우리가 공략할 지점을 이렇게 지목하게 됐다. 본성은 어쩔 수 없다. 이렇게 생겨먹은 걸 어쩌겠나. 판타지도 어쩔 수 없다. 내심의 죄를 어떻게 막겠나. 반면 강간 문화는 깰 수 있다. 문화는 상호작용으로 만들어지고 공유되며 변화하는 것이니까. 묵인과 소극적 동조에 그치는 사람들에게도 적당한 ‘넛지’만 주어진다면 개개인의 각성을 통해 강간 문화에 저항하도록 바꿀 수 있으니까. 우리는 본성이 강간 문화를 강화시키는 구조를 뒤집어야 한다. 내부자인 남성들이 함께 댐을 세우고 본성이 유입되는 수로를 막음으로써 장기적으로 강간 문화를 ‘말려 없애는’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남자들이 대개 몹시도 중시하는 가치, 오해되어 강간 문화를 떠받쳐온 가치, 성범죄자도 무의식적으로나마 추구할 그 가치인 ‘남성성’에 역설적으로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거칠고 반사회적인 모습은 보통 남성성의 전형으로 인식되지만 현대 법치국가에선 별 소용이 없다. 그것이 선사시대에는 종족 보존에 일익을 담당했을지 몰라도 문명사회에서는 부적응일 뿐이고 잘 봐줘야 왜곡된 남성성에 불과하다고 각인시켜야 한다. 이런 지체된 남성성, 왜곡된 남성성이 내재된 악과 결합하여 강간 문화를 유지·강화하는 경로를 끊어야 한다.

이를 위한 무기는 적응적 남성성이자 진정한 남성성인 인지력·분별력·자제력이다. 여성을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인식하는 지성, 본성의 판타지가 문명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걸 알고 실행에 옮기지 않는 힘이다. 나아가 강간 문화를 형성하는 일상의 대화를 거부하고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용기다. 강간·추행·착취를 떠벌리고, 진지하게든 아니든 그것을 모의하는 일부를 ‘남자다운 친구’로 떠받들지도, ‘좀 짓궂은 녀석’으로 넘겨주지도 말고, 면전에서 반박하거나 ‘루저’로 멸시하여 ‘왜곡된 남성성’을 부인하고 위축시켜야 한다.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남성 또래 문화에 대체로 무관심하기에 별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는 현재의 제도교육과 성교육이 올바른 남성성 인지에 기초해 재설계된다면 가능할 법도 하다. 여기서 태생적으로 힘에 매료되는 남성들에게 그 롤모델인 강한 남자들, 성공한 남자들이 진짜 힘과 남성성, 즉 지성과 자제와 통제의 능력을 보여준다면 더욱 효과적일 듯하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교육을 통한 문화 교체는 근본적이긴 하되 너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여기서 단기적 해결책이자 실효적 억제 수단인 형사사법의 역할이 부각된다.

인식의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려면

동시에 그 핵심 운용자인 법관, 그중에서도 다수를 차지하는 남성 법관 일각의 인식이 걸림돌로 떠오른다. 남성 법관들의 경험이 모두 같지는 않겠으나 나의 경험이 그리 유별날 것 같지도 않다. 세 누이와 함께 자랐고 여자들과 격리된 경험도 별로 없으며 마초 성향하고는 거리가 먼 나도 강간 문화의 비정상성을 깨닫는 데 적잖은 시간과 성찰이 필요했다. 이런 직접경험을 고려할 때 남성 법관들의 판단 기준이 강간 문화에 의해 편향됐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법관들이 공정성 유지와 정확한 판단을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는 가까이서 익히 보아 잘 안다. 하지만 법률가가 되는 훈련을 받았으니 강간 문화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너무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 강간 문화도 문화다. 문화는 우리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우리 사고방식에 침투하는 힘이 있다.

법관은 범죄의 충격을 일단 피해자의 시각에서 느껴봐야 한다. 일반 범죄의 경우, 범죄와 담 쌓고 모범생으로 살아온 거의 모든 법관들은 대개 자연스럽게 그리 하고 있다. 그러나 유독 성범죄 사건에서는, 영상·문자·사담으로 익숙해진 공격·지배·착취의 만연 때문에 남성 법관들이 실제 범죄의 비정상성을 과소평가할 소지가 있다. 강간 문화의 무의식적 침투는 남성 법관에게, 강압적 성관계를 합의에 의한 성관계로 인식하거나 성범죄 피해자에게 책임을 적극적으로 돌리고(“남자가 그런 상황에서 하고 싶어 하는 걸 여자라고 모를 리가”), 가해 행위가 피해자에게 미친 실질적 해악을 쉽게 부인하며(“별로 공격적이지 않고 물리적 피해도 없는데 뭐가 문제야”), 가해자의 장래를 배려한 솜방망이 처벌을 정당화하는(“남자라면 원래 속으로 상상하고 원하는 일인데 어쩌다 선 넘은 것뿐이잖아”) 강력한 편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 이 편향을 그대로 둔 채 강간 문화를 타파하기란 요원한 일이다.

존경하는 나의 동료들에게 바란다. 우리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어야 한다. 인간을 물건으로 취급하는 비정상 심리를 조장하는 왜곡된 남성성 및 강간 문화와의 싸움에 앞장선 장수의 심정으로, 내면화된 정상성의 기준을 치열한 자기성찰을 통해 검증하고 재설정해야 한다. n번방 사건을 키운 사법부에 대한 대중의 분노와 비판을 비이성적·감정적 반응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비슷한 고민을 안고 매일을 살아가는 동료로서, 과거를 부끄러워하는 남자로서, 모든 사람이 사람으로 존중받는 세상의 도래를 바라는 시민으로서 우리 남성 법관들에게 감히 바란다. 범행 공모 관계에서의 이탈에 준하는 결단과 실행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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