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3월25일 텔레그램 n번방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가운데)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오고 있다.

이른바 ‘n번방’ 사건은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와 상응하는 법과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국가 형사정책 수립과 범죄 방지를 위한 국책연구기관인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앞으로 5주에 걸쳐 디지털 성범죄 및 성착취 문제를 다각도로 살펴본다. 관련 형사정책이 앞으로 어떻게 변해야 하고, 변할 수 있는지를 짚어볼 예정이다.

‘n번방 사건’ 가해자들은 SNS, 채팅 앱 등으로 피해자를 물색하고 접근했다. 피해자의 어린 나이, 경제적 빈곤 같은 취약함을 이용해 관계를 형성하고 성범죄로 나아갔다. 전형적인 그루밍(grooming) 성범죄 수법이었다. 온라인 공간은 성착취에 쉽게 악용됐다. 이처럼 n번방 사건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할 또 하나의 문제가 바로 사건이 일어난 ‘경로’다. 어떻게 아동·청소년이 온라인 성범죄에 이용되었는지를 제대로 분석해야 한다. 그루밍은 보통 다음과 같은 순서를 따라 일어난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선택하고 관계를 형성한다. n번방 사건에서 가해자들은 초기에 광고성 메시지를 통해 아동과 청소년, 여성을 유인하고 소액의 대가를 지불해 욕구를 충족하는 방식으로 관계를 형성해나갔다. 유엔에서 발간한 보고서 〈정보통신기술이 아동 성착취에 미치는 영향〉 (2015, 유엔 마약범죄사무소)은 온라인 그루밍 성범죄 피해자가 ‘보호 부재 등으로 낯선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에 경계심을 덜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가해자들은 이러한 취약점을 이용했다.

그루밍 가해자는 상대적으로 IT 기술에 유리한 10대, 그리고 20~30대가 다수다. 이들은 자신과 나이 차가 적은 청소년이나 젊은 여성을 피해자로 물색하는 경향이 있다. 일반 성폭력 가해자들이 주로 30~40대라는 점에서 비교가 된다.

관계가 형성된 후에는 ‘비밀’을 통해 피해자를 고립시킨다. 가해자는 피해자와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신체 사진 등을 요구한다. 그 과정에서 돈과 선물을 대가로 제시하는데, 이를 보낸다는 명목으로 피해자의 개인 신상정보를 빼낸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의 얼굴이나 집주소 등이 노출된다. 사적 정보를 쥔 가해자와 이 정보가 노출될까 봐 두려워하는 피해자 사이 순환 고리가 형성되기 시작한다. 정보 유출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부모님이나 주변인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지 못하면서 고립은 더욱 심해진다.

고립된 관계는 본격적으로 성착취 및 학대가 일어나는 단계로 쉽게 넘어간다. 가해자의 성향에 따라 강간, 성착취, 성노예 등 오프라인에서 벌어질 수 있는 공격적이고 가학적인 방식의 다양한 성범죄 행위가 발생한다. 대개 온라인 성범죄자는 오프라인 성범죄자보다 소아성애나 가학적 성애 같은 성도착적 성향이 강하다는 연구 결과에 주목해야 한다.

캐나다의 저명한 성범죄 연구자인 마이클 C. 세토와 제임스 M. 캔터가 2006년 수행한 연구를 보면 아동 음란물 범죄자는 아동 성범죄자보다도 소아성애적 성향을 가질 확률이 두 배 정도 높았다. 즉, 성폭력을 저지르지 않는 음란물의 상습적 감상만으로도 소아성애와 같은 성도착적 성향의 표지(indicator)가 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연합뉴스정치권에서도 n번방 대책 마련에 분주했다. 4월29일에는 일명 ‘n번방 방지법’이 통과됐다.

실질적 성적 만남 없이도 성착취로 이어져

이후부터는 피해자에게 지속적 성착취를 가능케 하기 위해 영상물 유포 협박 등으로 통제를 유지하는 단계에 접어든다. 이 과정에서 성착취 기간이 길어지고 피해 정도도 커지게 된다.

성적 그루밍은 오프라인에서 발생할 수도 있지만 온라인에서 일어날 경우 매우 단시간에 일어나는 경향이 있고, 피해자 수도 순식간에 증가할 수 있다. n번방 사건이 있기 전까지 시민단체와 학계를 중심으로 그루밍 처벌 입법 도입에 대한 요구가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논의되지 못했다. 영국이 2003년, 네덜란드가 2007년, 오스트레일리아가 2017년 그루밍 처벌법을 신설한 것에 비하면 대응이 늦다.

유럽 국가들이 그루밍을 법제화한 것은 2007년 ‘성착취 및 성학대로부터의 아동보호에 대한 유럽의회 협약’(일명 란사로테 협약)에서 그루밍을 규율할 것을 권고한 것이 한몫했다. 란사로테 협약은 그루밍이 오프라인 성적 만남으로 이어지는 경우만 처벌하도록 규율했다. 통신 행위 등에서 발각되어 피해자 부모가 경찰에 신고한다 해도 ‘이것이 성적 만남으로 이어졌는가’를 증명하기가 어려워 처벌이 쉽지 않았다.

현재 논의 중인 국제법은 더 이상 그루밍 행위에서 실제적 성적 만남을 전제하지 않는다. n번방 사건에서 보듯이, 실질적 성적 만남 없이도 그루밍 행위는 얼마든지 성착취·성범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국에서 입법할 때도 가해자가 아동을 직접 만날 의도를 갖지 않은 상황에서 일어나는 그루밍 또한 다루어야 한다.

4월23일 정부는 ‘범부처 디지털 성범죄 종합대책’을 통해 아동·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그루밍’ 처벌이 공백이었던 점을 인정하고 이를 범죄로 규정하기로 했다. 온라인 그루밍 처벌이 법제화되면 실제적 성적 만남의 실행이나 성착취·성범죄와 상관없이 성적 목적으로 접근하는 행위부터 처벌이 가능하다. 애플리케이션상의 메시지 송신이 성적 영상물을 요구하는 행위 등으로 이어질 경우 바로 성적 목적의 접근이라는 점이 증명되어 처벌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루밍 지속 기간을 길게 통제하는 과정에서 주로 나타나는 가해자의 강요, 압박, 위협, 성적 협박이 사용된 경우 더욱 가중하여 처벌하는 것도 필요하다.

그루밍 행위는 아동과 청소년의 성을 이용해 일탈적 성욕구를 충족하거나 더 나아가 범죄수익까지 창출한다. 4월29일 국회는 본회의를 열고 성적 촬영물을 소지·구입·저장 또는 시청한 사람을 3년 이하 징역이나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할 수 있도록 했다. 일명 ‘n번방 방지법’이다. 향후 아동과 청소년을 거짓말로 유인하여 길들이는 그루밍 행위를 근절하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상 그루밍 성범죄도 입법되도록 관심을 가져야 한다. 온라인 그루밍만이 아니라 주로 아동·청소년을 지휘, 감독하는 자리에 있는 보호자와 교사, 학원 선생, 스포츠 지도자, 종교인 등에 의한 오프라인 그루밍 행위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기자명 윤정숙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심리학 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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