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김성숙(왼쪽)과 신옥희가 길에서 잠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죽은 영감 이야기는 마을 할매들의 단골 대화 소재다.

신옥희(75)는 경로당에서 벌어진 거나한 술판에 끼었다가 하루 종일 누워 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해장이나 해야겠다.” 함라마트에서 콩나물을 집어 들었다. ‘옥희 죽었는가’라는 문자 안부에 ‘죽었는지도 모르지’라고 답하며 웃고 나니 마음 한구석이 서늘했다. 넓은 집이 스산해 문뜩 외로웠다.

5남1녀 자식에 손주까지 모두 모이면 26명이다. 큰집은 그 모든 식구를 다 품었다. 온 식구가 여행이라도 한번 가려면 큰일이었다. 가족행사로 어디 한번 놀러갈 때면 아예 전세버스를 한 대 빌리곤 했다. 누구 하나 운전하느라 술을 마시지 못할까 봐 그랬다. 신옥희는 잠시 후 숫자를 정정했다. “25명이네, 이제. 영감이 없으니까.”

신옥희는 스물두 살에 전북 김제 용동에서 익산 장점마을로 시집왔다. 7남매 중 막내로 예쁨받고 자랐다. 부족한 것 없이 자랐지만 중학교까지만 마친 이유는 하나였다. “다른 친구들도 안 가니까 나도 고만둬버렸지. 그 시절에 누가 여자애들 공부시켰는가.” 대신 편물학원과 타자학원을 다녔다. 털실로 치마와 바지 따위를 떠서 입었다.

남편 김성환은 오빠 친구였다. 서울 중앙대학을 나왔다. 서울에 자리를 잡으려 했던 김성환을 설득한 건 신옥희였다. “농촌에서는 정직하게 몸을 놀리면 먹고사는 걱정 안 해도 된다”라는 이유였다. 믿는 구석이 없진 않았다. 김성환의 집은 일꾼 둘에 꼬마일꾼 하나까지, 일하는 사람을 셋이나 부리는 만석꾼 집안이었다. 1970년대에 아들을 서울로 유학 보낸 집다웠다.

장점마을을 통틀어 차가 네 대인 시절에 그랜저를 뽑았다. 면허를 땄지만 쓸 일은 별로 없었다. “남편이 내가 어디 가면 데려다주고, 끝나면 데리러 오는데 차를 몰 일이 있어야지.” 읍내로 수영도 배우러 다니고 남편과 같이 공부도 하러 다녔다. 방 한쪽에 자리한 유리 진열장 안에서 신옥희가 꺼낸 것은 1993년 원광대 최고경영자과정 수료패였다. 신옥희의 수료패에는 ‘명예’가 붙어 있었다. 사유는 ‘내조의 공’이었다.

남편 김성환(당시 73세)은 2014년 담낭암과 췌장암으로 숨졌다. 그 뒤로는 시내에 있는 병원 한번 가기가 쉽지 않았다. 하루 네다섯 번, 한두 시간 간격으로 들어오는 시내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신옥희가 가장 많이 생각한 건 남편이었다. 그런 날은 컴컴한 집에 돌아와 목 놓아 울었다. 갑상선 이상이 의심된다는 결과가 너무 무서웠다. 마치 암을 선고받기 위해 기다리는 삶 같아 막막했다. 사람이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빈 종이를 꺼내 ‘나랏님’에게 편지를 썼다. “그냥 막 써지더라고. 토하는 심정으로 썼지.” 신옥희는 그 편지를 역학조사 발표하는 날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낭독했다.

신옥희 집 옥상에서는 금강농산의 시퍼런 슬레이트가 마주 보였다. 공장이 문을 닫았어도 울렁거림과 어지러움까지 멎은 건 아니었다. “저거 때문에 아주 마을이 쏘되버렸어(쑥대밭이 되었다). 그래도 이제는 옥상에 빨래를 널 수 있어. 공장 돌아갈 때는 검댕 때문에 엄두를 못 냈어.”

남편 장례를 마치고 신옥희는 자녀 여섯을 모두 데리고 황등장에 갔다. 원하는 나무를 두 그루씩 고르라고 했다. 감나무, 대추나무, 석류나무 등 자녀들이 12그루를 겹치지 않게 고른 덕분에 마당은 ‘나무 박물관’이 되었다. 집에 없는 영감과 매일 볼 수 없는 자식을 대신해 세운 나무들로 외로움을 달랜다.

ⓒ시사IN 이명익주민들은 암 외에도 각종 질환에 시달린다. 집집마다 수북한 약봉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죽은 영감 이야기는 마을 할매들의 단골 대화 소재다. 김성숙(75)은 길 위에서 신옥희를 만나자마자 전날 꿈에서 본 죽은 영감 이야기를 꺼냈다. “웬 신사 멋쟁이가 오더니 내 손을 딱 잡는 거야. 영감이더라고. 손잡고 한참을 걸었당께. 죽은 사람은 꿈에서 말이 없다고 하더니 딱 그 짝이여. 얼마나 서운한지….”

열일곱 살에 만난 ‘옆 동네 오빠’ 양선근은 살림에 전혀 보탬이 안 되는 남자였다. 김성숙은 부모 말을 듣지 않은 걸 자주 후회했다. 아버지는 딸이 양선근과 연애를 못하게 하려고 군산으로, 서울로 빼돌렸다. “그때는 나도 눈이 뒤집혀서(웃음). 못하게 하면 더 하고 싶잖아. 그리고 참 잘생겼어. 키도 크고 예뻤어.” 허우대 멀쩡한 남편은 알고 보니 ‘방거칭이’였다. 백수란 의미다. 지게 지는 일 한번 하고 돌아오면 그다음 날은 방구석 네 모퉁이를 기어다면서 죽는다고 앓았다. “일을 안 해. 혼 나간 사람처럼. 어떻게 살았는가 몰라. 솥에 작대기 넣고 저을래야 저을 것도 없어.”

먹고살 길이 없어 김성숙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화장품을 떼서 팔다가 벽돌공장에 나갔고 식당에서 설거지도 했다. 부업으로 익산 ‘태창’ 공장에서 팬티 실밥 따는 일도 했다. 머슴처럼 사는 게 억울했다. 1988년 당시 돈으로 3만5000원 주고 춤을 배우러 다녔다. “내가 춤을 겁나게 잘 췄어. 20m 홀이 여기서부터 쩌그까지 춤추고 가면 여기저기서 나 데려갈라고 잡아댕겨. 참말로 옷이 찢어졌다니께.” 김성숙의 춤바람과 함께 ‘술고래’였던 남편의 의처증도 깊어갔다. “볶아 먹고 때리는” 통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양선근은 2019년 9월 치매를 앓다 숨졌다. 공장이 들어온 이래 시작된 양선근의 기침은 죽기 직전까지 멈추지 않았다. 역학조사 보고서는 장점마을 주민들의 치매와 인지기능 저하가 대조 지역 주민보다 통계적으로 유의하게 많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연구팀은 금강농산이 담배 폐기물인 연초박을 불법적으로 이용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밝혀진 1급 발암물질(담배특이니트로사민, 다환방향족탄화수소류 등) 외에도 확인되지 않은 담배 내 각종 발암물질이 추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고 적었다.

집 안의 신제품은 정수기와 공기청정기

역학조사가 최종 결론이 나기까지 김성숙을 비롯한 마을 주민들의 근심은 깊었다. 주민대책위 구성 이후 안 싸워본 방법이 없는 주민들에게 역학조사는 마지막 비빌 언덕이었다. 2017년 12월 착수한 역학조사는 지지부진했다. 몇 번이나 미뤄진 중간발표는 2018년 7월19일 익산시청에서 열렸다. 그날 김성숙은 ‘뚜렷한 증거가 없다’라고 얼버무리는 연구팀을 향해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장점부락 주민인디, 생체실험은 내가 혔다. 내가 증인이라고 소리쳤지. 답답해 죽겠는데 말이라도 하니까 속이 시원하더라고.” 김성숙도 치매 약과 위궤양 약을 장복 중이다. 출입문에는 딸이 손글씨로 크게 적어둔 종이가 붙어 있었다. ‘밥 드시고 바로 약 드세요.’ 벽에는 자식들 번호도 큼지막한 글씨로 적혀있었다.

2018년 12월8일 약속된 연구 기간이 끝나고도 결과를 최종 발표하기까지 또 1년이 걸렸다. 연구팀 안에서도 ‘역학적 인과관계가 있다’라는 결론을 내릴 경우 정치적 파장이 큰 만큼 부담스러워했다. 그 과정에서 민관협의회 오경재 교수(원광대 예방의학과)가 큰 역할을 했다. 역학회에 연구 결과를 보내 조언을 받아보자고 요청했다. 전문가 집단의 조력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이 마을에 ‘방거칭이’가 어디 한둘이었간. 한마디로 백수가 널린겨. 농사꾼이 농사는 안 짓고 만날 술을 처먹어쌌는 거지.” 죽은 남편 이야기를 하다 말고 김양녀(80)가 호탕하게 웃었다. 김양녀의 남편은 금강농산과 상관없이 많이 마신 술 때문에 20여 년 전 숨졌다. 술 좀 끊게 해보려고 병원에 데려가 입원도 시켜봤지만 소용없었다. 병원복을 입고도 눈 깜짝할 새 사라졌다. 어디선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음주 메이트’는 주로 이정수(73)였다. 이정수는 어디 있는지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목청이 떼까우(거위) 같이 크다니께. 이 동네 어디 있어도 이정수는 찾아.”

ⓒ시사IN 이명익이정수씨가 도배·장판 교체를 앞두고 오래된 매트리스를 내놓기 위해 리어카에 실었다.

이정수는 큰 목소리 탓에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를 모를 수 없는 사람이었다. 2018년 8월 전립선암을 진단받기 전까지는 그랬다. “이 배가 다 호르몬주사 때문이여. 웬만하면 수술 안 허고 약으로 치료한다고 하는디, 그거만 맞으면 아무리 운동을 해싸도 배가 안 꺼져.” 몸의 이상을 처음 느꼈던 날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경로당에서 윷을 놀고 술을 마셨다. 소변이 통 나오질 않았다. 이틀 뒤 검사 결과를 받았는데 큰 병원으로 빨리 가보라고 했다.

아내 최영자(65)에게 말하면 말 안 듣고 술 먹어서 생긴 병이라고 할까 봐 입을 닫았다. 거실 탁자 위에 슬쩍 올려둔 병원 서류를 본 건 전주에 사는 큰아들이었다. “아버지, 이게 뭐요?” 병의 원인을 내 탓이라고 생각하면 편했다. 늙음의 결과라고, 막 살아서 받는 벌이라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다만 이정수 역시 늦게 설치한 상수도가 마음에 걸렸다. 별 생각없이 기름띠가 뜨는 지하수를 벌컥벌컥 마셨던 게 내내 찜찜했다.

최영자는 남편 이정수가 아픈 건 안타깝지만, 술을 ‘똑’ 끊어서 그건 좋다. 익산 시내에서 차로 쉼 없이 30분은 달려 들어와야 하는 마을에는 작은 슈퍼마켓 하나 없다. 먹고사는 모든 일은 마트가 아닌 땅에서부터 왔다. 이정수가 ‘고향으로 내려가자’라고 했을 때, ‘거기 내려가면 먹을 거라도 많으니까’라는 이정수의 말을 믿었다. 농사가 가진 노동의 무게를 그때는 몰랐다. 최영자와 이정수는 1979년 인천의 한 석재공장에서 만났다. 공장 동료가 다리를 놨다. 서울에 신접살림을 차렸는데 시아버지가 몸이 아프면서 아예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내려왔다. 설상가상 시부모 모두 중풍을 맞았다. “내 청춘을 거기 다 바쳐버렸지.”

‘삐약이’ 같은 아들 둘과 시부모를 집에 두고 아침 7시면 군산 합판공장으로 향하는 통근버스가 오는 방향으로 내달렸다. 농사만으로는 여섯 식구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웠다. 오전 8시에 시작한 일은 밤 8시나 돼야 끝났다. 일요일은 유일하게 공장이 쉬는 날이었지만 최씨는 쉬지 못했다. “지금 사람들은 말해도 못 믿지. 아궁이에 불 때서 물 데워 시부모 씻기고, 애기들 씻기고, 손으로 빨래하고. 그러고도 살았어. 머리로는 만날 보따리 쌌지(웃음).”

배움이 짧아 생긴 아쉬움은 한평생이다. 결혼 전 인천에서 일하던 시절, 집으로 가는 대신 야학으로 향했다. 새롭게 알아가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일하다 다쳤는데도 아픈 줄 몰랐다. 지팡이를 짚고 야학 교실을 다녔다. 40년 전 ‘스승’이 한 말을 최영자는 아직도 기억한다. “나보고 성실하대. 뭘 해도 하겠다고.” 요양보호사 자격증에 도전했다가 세 번을 미끄러졌다. ‘나는 안 되나 봐’라는 좌절이 밀려올 때면 스승의 말을 떠올렸다.

몇 년 전부터 장애인 활동보조 일을 하고 있다. ‘중풍 든 시부모를 20년 모시고도 몸이 불편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하느냐’는 아들의 걱정에 최영자는 웃었다. “앉아 있으면 돈이 나오나. 움직여야 돈이 나오지.” 때마침 큰며느리에게 전화가 왔다. 영상통화 받는 법은 매번 배워도 매번 헷갈린다. 최영자는 두 번 만에야 영상통화를 연결했다. 화면 속 며느리가 곧 돌이 되는 아이에게 “할머니한테 새로 배운 거 해보자. ‘주세요’ 해봐”라고 말했다. 최영자가 웃었다. “‘주세요’ 하지 마. 할머니 줄 거 없어.”

‘물을 못 쓰게 됐다’라는 말을 증명하듯 집집마다 정수기와 공기청정기가 흔했다. 오래된 낡은 집마다 새로 들인 가전제품만이 낯설게 반짝였다. 박순옥(71)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남편 문창섭(당시 61세)은 2004년 간암으로 숨졌다. 발병한 지 1년 만이었다. 이미 온몸에 퍼진 암은 수술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거실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은 남편이 죽기 일주일 전 부랴부랴 찍었다. 간병하느라 머리도, 화장도 못한 박순옥의 얼굴이 젊었다. 도배를 앞두고 묵은 짐을 정리하다 박순옥은 울었다. “영감이랑 둘이 찍은 사진이 그날 찍은 가족사진밖에 없더라고. 애들 키우고 공부시키느라 바빠서 그랬지. 고생 끝났다, 이제 좀 재밌을랑가 싶으니까 영감이 가버렸어.” 박순옥은 완주 고산에서 스무 살에 시집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된 어머니가 사위라도 일찍 보자고 서둘렀다.  

ⓒ시사IN 이명익박순옥은 투쟁도 사람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는 농사일 같다고 말했다.

금강농산이 가동되는 동안 박순옥이 가꾸던 고추밭도 몇 번이나 싹 죽어버렸다. 부아가 났다. 까맣게 말라버린 고추를 볼 때면 남편도 그 때문일까 생각하다가, 그냥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다가, 또 그 때문일까 생각했다. 금강농산 올라가는 길 입구에 주민대책위가 천막을 쳤을 때, 박순옥도 몇 번이나 지키러 올라갔다. ‘투쟁’은 농사일 같았다. 사람이 없으면 굴러가지 않았다. 가까이는 익산으로, 멀리는 서울로 몇 번을 오가는 동안 박순옥은 자신이 한 중요한 역할을 잊지 않았다.

사람들은 ‘밥심’으로 싸운다

토론회다, 집회다 해서 서울로 향하는 투쟁 버스는 경로당 앞에서 오전 6시면 출발하곤 했다. “싸우는 거야 똑똑한 양반들이 싸웠다고 한다만, 서울을 몇 번을 가고 또 가도 우리가 다 쌀 씻고, 닭 잡아 삶고, 반찬해서 먹을 거 해다 날랐다고. 그거 없었으면 어떻게 싸웠겠어. 아무도 안 알아줘도 큰일이야. 밥 해먹이니까 싸우는 거지.”

누구도 기록하지 않아 아무도 기억하지 않지만 박순옥은 알았다. 사람들은 ‘밥심’으로 싸운다는 걸. 그리고 박순옥을 비롯한 장점마을 할매들이 묵묵히 밥을 날랐다는 걸. 장점마을의 긴 투쟁에서 이들이 수십 명에게 먹인 수십 끼의 밥이야말로 투쟁 그 자체였다.

장점마을 주민들은 환경오염 구제신청을 포기했다. ‘환경오염 피해 배상책임 및 구제에 관한 법’은 환경오염 피해를 본 주민에게 정부가 금전적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정해져 있다. 하지만 피해구제는 대상이 선별적이고 배상액이 적은 데다 추후 소송에서 이기면 반납해야 한다. 주민들은 선별적으로 나오는 보상이 작은 공동체를 깰까 봐 우려했다. 보상 액수와 관계없는 상징적인 ‘승리’를 원했다. 전북도와 익산시를 상대로 한 민사소송으로 ‘직행’한 까닭이다.

소송 준비는 만만치 않았다. 전북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전북 민변)에서 소송은 맡아줬지만 준비 서류를 떼는 건 각자의 몫이었다. 인터넷이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에게는 고역이었다. 멀리 사는 자식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거나, 열일을 제쳐두고 관공서와 병원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임증자(79)도 서류를 떼다가 부아가 치밀곤 했다. “서류 몇 장으로 내가 당한 일을 어떻게 다 아느냐”라는 말에서 뼈가 만져졌다. 임증자는 2017년 한동네에 살며 모셨던 시어머니 김양례(당시 90세)를 피부암으로 잃었다. 2013년 발병해 5년을 병수발 들었다. 그 세월은 몇 푼 보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시사IN 이명익임증자가 곡식 창고에서 익산시가 수매하기로 한 팥 10㎏을 챙기고 있다.

거실 협탁 위에는 메모지 한 장이 놓여 있었다. ‘고추 10근, 팥 10㎏, 콩 서리태 10㎏, 쥐눈이 5㎏, 메주콩 20㎏, 마늘 5접.’ 익산시청에서 수매해주겠다고 적어두고 간 종이였다. 말이 수매지 폐기처분이었다. 임증자가 가장 성질나는 건 ‘집단 암 마을’이라는 낙인이다. 평생 해온 것, 할 줄 아는 것을 간단히 짓밟혔다. 몇 년 전부터 장점마을에서 나는 농산물이 팔리지 않기 시작했다. 익산 백제병원 앞에서 알음알음 거래했던 농산물 판로도 막혔다. “장점마을 꺼는 안 산다는 거야.”

금강농산은 문을 닫았지만, 한번 난 소문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게 폿(팥)이여. 봐봐, 여기 나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 이렇게 큰 폿 봤나. 팥죽을 쑤면 또 얼마나 맛있는디. 우리가 먹을라고 우리가 직접 길렀응게 맛이 없을 수가 없제.” 광에 들어선 임증자가 굽은 허리를 달래며 농산물 푸대를 풀었다.

2월20일 경로당 앞마당에서 간이 수매장터가 열렸다. 익산시청 미래농정국 농산유통과에서 화물트럭 한 대와 봉고트럭 두 대가 들어왔다. 마을 방송이 나가고 얼마 뒤, 임증자를 비롯해 모두 8가구에서 각종 작물을 이고지고 나타났다. 이날 익산시청이 수매한 작물은 총 2519t이었다. 무가 개당 200~300원으로 ‘똥값’이었다. 일단 창고로 옮긴 뒤 환경정책과에서 처리할 예정이다. 이병학 환경오염대응계장은 곤란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당장 수매는 하지만 장점마을 작물을 사주는 게 오히려 문제가 있다고 인식돼면 안 좋은 이미지만 고착화될까 봐 좀 걱정이 돼요.”

많은 자식들이 부모의 수고 덕분에 집을 떠났다. 가까이는 익산으로 멀리는 서울과 경기도로. 때로는 임증자의 딸처럼 미국으로 향하기도 했다. 그들은 수십 년 마을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에게는 ‘미래의 얼굴’이었다. 문봉학(79)은 파리채 여러 개를 고무줄로 묶어둔 더미에서 하나를 빼내더니 거실 제일 중앙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에서 한 명 한 명을 가리켰다. ‘잘된’ 자식을 파리채 끝으로 하나하나 짚을 때 그의 얼굴은 자부로 가득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 가난 때문에 배를 곯았던 생각밖에 없다. 아래로 동생 다섯이 줄줄이였다. 동네 사람 주선으로 만난 최정녀(74)와 함께 집을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분가하겠다’라는 신혼부부의 말에 아버지는 쌀 한 톨도 보태줄 수 없다고 노발대발했다. 문봉학은 아버지 심부름으로 쌀을 팔러 나갈 때마다 한두 말씩 쌀을 빼돌렸다. 허름한 집이나마 한 채 마련할 만큼까지 ‘훔쳤다’. 장점마을로 이사 온 건 1970년대였다. 농사만으로 살림살이가 늘어나지 않아 ‘막노동’을 다녔다. 원광대병원은 문봉학이 지은 건물 중 가장 번듯한 곳이다. 이제는 아버지가 지은 건물에서 큰딸이 일하고 있다.

화장지로 코를 막고 자도 금강농산에서부터 흘러온 냄새는 막아지지 않았다. 습관처럼 코를 풀었다. 냄새가 좀 떨어질까 싶어서였다. “귀가 먹었는가 싶어. 코를 하도 풀어가지고. 송장 썩는 냄새가 그럴란가. 진짜 냄새가 그럴 수는 없거든.” 문봉학은 갑상선암을, 아내 최정녀는 금강농산에서 4년을 일하고 피부암을 얻었다. 기침이 잦고 힘들어하는 아내에게 문봉학은 일을 그만두라고 만류했다. 아내는 “그럼 애들은 무슨 돈으로 가르치느냐”라고 답했다.

ⓒ시사IN 이명익금강농산에서 4년간 일했던 최정녀(왼쪽)는 피부암을, 남편 문봉학은 갑상선암을 앓았다.

가까이 산부인과가 없어 5남1녀 모두 홀로 집에서 낳았다. 출산을 위해 아랫목에 불을 넣는 일도, 진통 끝에 태를 끊고 젖을 먹이는 것도 오롯이 홀로 감당했다. 그렇게 낳은 자식들이 줄줄이 부모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문대학일망정 모두 대학 공부를 시켰다.

농사로 메워지지 않는 생활을 최정녀는 가욋일로 메웠다. 금강농산에 다니기 전에는 군산 서수 농공단지에 있는 과자 공장에 나갔다. 문봉학과의 싸움은 도돌이표처럼 계속됐다. “애들 아부지(문봉학)가 말본이 없어서 그렇지 잔정이 많아. 내가 만날 힘들어 죽는다고 하니까 걱정돼서 한 말을 그때는 참 예민하게 받았지.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애들 한창 학교 다녔던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가 기억이 안 나. 그 긴 세월이 없는 거 같애.”

여러 공장을 전전했지만 금강농산이 마을과 가깝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오고 가는 시간만 줄여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비료를 만든다길래 뭘 하나 싶어서 올라가봤지. 이갑찬이가 ‘여기 사냐’고 묻더라고. 안 그래도 여자 하나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날로 다녔지.” 비료 원료를 버무리는 일을 했다. 원료 포대가 쏟아지지 않게 잘 자르는 게 관건이었다. 쓰레기를 돈 받고 갖고 와서 비료를 만들어 파는 과정을 보고 세상에 이렇게 땅 짚고 헤엄치는 일도 있구나 생각했다. “이갑찬이가 초기에는 재산세 낼 돈도 없어서 나한테 꾸고 그랬어. 그러다 부자가 된 거야. 쓰레기로 재미를 본 거지.”

금강농산 안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자욱했다. 일을 마치고 나오면 사람 꼴이 아니었다. 건강한 몸 하나 믿고 돈만 보고 살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마을 사람들이 데모하러 공장에 올라오면 최정녀는 믹스커피를 내다주곤 했다. 하루는 이갑찬 대표가 사무실로 최정녀를 불렀다. “공장이 지금 마을 주민들 때문에 피해가 얼만데 왜 협조해주냐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나는 부락 사는 사람인데 어떻게 모른 척하느냐’고 했지.”

그때는 몸만큼 마음이 아팠다. 병명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얼마나 말랐는지 온 동네에 최정녀 죽는다고 소문이 다 났어.” 오죽하면 제 발로 정신병원을 찾아갔다. 군산개정정신병원 의사 이름이 김성수라는 것까지 지금도 기억한다. 신경성 우울증이라고 했다. 우울증 약은 지금도 먹고 있다. 2014년에는 미간에 도돌도돌 피부가 올라왔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피부암이었다.

공장 때문에 암을 얻었다고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일었지만 그래도 최정녀는 이갑찬을 ‘좋은 사람’으로 기억했다. 이갑찬 대표의 아들로 2016년부터 공장이 문닫을 때까지 운영한 이수영도 착했다고 덧붙였다. “자기들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을 거야. 모진 사람은 아니었어. 김제에서 쬐깐한 비료공장을 했는데 그때는 원료만 만들어서 풍농(군산 공장)에 갖다 줬다더라고. 여기 와서 돈을 좀 벌다 보니까 기계도 싹 바꾸고 그러면 더 벌고 싶잖아. 그걸 시랑 도에서 관리를 잘했어야지.”

가족 중 세 명이 위암, 한 명은 대장암

이소현(57)·김상호(58) 부부는 2011년 익산 시내에서 장점마을로 이주했다. 자녀를 일찍 낳아 기른 덕분에 이른 ‘노후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큰딸은 결혼시키고, 아들도 독립했다. 때마침 김상호와 익산 시내 한 택시회사에서 함께 일하며 호형호제했던 김형구가 장점마을 내 빈집을 소개했다. 형태만 겨우 남은 초가집이 덜렁 있던 터를 닦아 잔디가 깔린 전원주택을 마련했다.

원주민이 아니었던 부부에게 흉흉한 소문은 뒤늦게 도착했다. 이소현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이 집터에 살았던 할아버지도 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더라고요. 암이라는 게 워낙 흔하니까. 그런가 보다 했죠.” 누긋해진 날씨와 함께 푸른 잔디가 뾰족 고개를 내밀 때면 인생의 낙이 이런 거구나 생각했다. 집 밖을 잘 나서지 않는 아내와 화물트럭을 운전하며 새벽에 나가 밤늦게 돌아오는 남편은 악취에 다소 무덤덤했다. 2013년 김형구 부모의 장례를 겪으며 두 사람의 무딘 신경줄도 굵어졌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소현은 2014년 자궁암을, 김상호는 2017년 위암을 얻었다. 운이 좋아 둘 다 초기에 발견했지만 생각할수록 아찔했다. “아무리 흔한 암이어도 한마을에서 이렇게 자주 암이, 부부가 동시에 암으로 투병하는 집이 이렇게 여럿일 수는 없는 거잖아요.” 김상호가 투병을 시작했을 때, 이소현은 금강농산 방면으로 뚫린 다용도실 창문을 의심했다. 환기를 이유로 365일 열어두던 창문이었다.

이소현은 ‘공부’에 매달렸다. 동생의 의료 사고로 한 대학병원과 지난한 소송전을 벌인 경험이 있었던 이소현은 컴퓨터를 켜고 법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단순히 ‘악취가 심해요’ ‘냄새가 나요’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컴퓨터를 뒤지고 도서관에 환경문제 관련 서적을 빌리러 다니면서도 설마 했다. “우리 같은 사람은 공장을 관리할 책임이 있는 행정을 믿을 수밖에 없잖아요. 다 허가받고 하는 걸 텐데, 안전하지 않을까….” 혼자서 찾아볼 수 있는 자료는 한계가 있었다. 마을 어른들도 패배감이 완연했다. “우리도 옛날에 공장이랑 안 싸워본 거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거지.”

부부는 요즘 집을 비우는 시간이 더 길다. 이소현은 때마침 둘째를 낳고 ‘구조요청’을 해온 경기 평택 딸네 집에서 머문다. 김상호도 일을 늘렸다. 집에서는 잠만 겨우 잔다. “친구들이 집 팔고 나오라는데 이런 상황에서 집이 팔리겠어요? 여기 정리되면 산으로 가야 하나 싶어. 공기 좋고 물 맑겠지 싶어서 시골로 왔는데 ‘자연인’ 되기 되게 힘드네, 그쵸?”

 

기자명 익산/장일호·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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