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고된 농사는 흔적을 남겼다. 이원애의 손가락 마디는 모두 뒤틀려 있다.

평생 끝나지 않을 애도

한 지역에 생애 전반을 단단히 뿌리내린 사람들은 웬만한 일로는 쉽게 이주하지 않는다. 교우촌은 더 그렇다. 그들이 살았던 터 자체가 삶일 수 있다. 드물게 떠난 이들이 없지는 않았지만 금강농산으로 인한 집단 암 발병도 이주를 추동하지 못했다. 삶의 기반이 이곳에 있고, 다른 지역에서의 삶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가까이 학교도 없어서 일찍이 익산 시내로 ‘유학길’에 올랐던 자녀들만이 부모 세대의 미련함을 타박했다.

장점마을 주민들이 보낸 세월은 단순하게 또 쉽게 정리할 수 있는 역사가 아니었다. 이곳의 많은 물건에는 세월이 묻어 있었다. 가늠하기 어려운 세월은 찐득거리거나 어딘가 상한 얼굴로 나타나서 당황시킨다. 이주는커녕 이사할 일도 없이 정주한 사람들의 살림에는 모두 이야기가 숨어 있다.

오래된 살림은 그들이 말하지 않은 이야기까지 끄집어냈다. 지난 2월17일부터 장점마을 40가구 모두 순차적으로 도배·장판 교체가 시작됐다. 역학조사 이후 익산시가 시행하는 장점마을 지원사업 중 하나다. 금강농산 운영 중에 배출된 1군 발암물질 담배특이니트로사민(TSNAs) 등 각종 유해물질은 먼지나 검댕의 형태로 벽이나 문에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 때문에 지원사업 예산 중에서도 가장 빨리 편성됐다.

이원애(82)는 도배·장판 교체를 앞두고 1960년 시집올 때 누벼서 가져온 최고급 솜이불을 2020년 장롱 안에서 꺼냈다. 그 이불 속에서 자란 아이들과 무뚝뚝한 남편과 고된 시집살이는 당신 20대 전부이기도 했다. 창고를 열자 쏟아진 책과 흙 묻은 신발은 2004년 급성위암으로 갑작스레 세상을 뜬 둘째 아들 김주엽(당시 35세)의 것이었다. 이원애는 그 물건들 앞에 그저 망연히 앉아 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짐을 정리한다는 건 기억을 정리하는 일이다. 이원애는 그 짐에 묻어 있는 이야기를 ‘감히’ 정리할 수 없었다. 미래에 가지고 갈 것과 버릴 것을 구분할 수 없는 사람은 이원애처럼 아직 남아 있는 사람이다. 그것은 평생 끝나지 않을 애도의 한 모습이었다.

“내가 아들 둘, 딸 둘을 낳았어. 2남2녀라고, 딱 좋다고 했는데. 1남2녀가 돼부렀어.” 주엽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밥이 넘어가지 않는다. 물을 끓여 말아 먹으려고 했는데 전기포트가 말을 듣지 않았다. 불은 들어오는데 작동이 안 되었다. 이원애는 밥그릇을 밀어놓고 두유 하나를 꺼내 마셨다. 빈속은 아니니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어지럼증, 혈압, 당뇨, 관절약 따위를 털어 넣었다. 고된 농사는 흔적을 남겼다. 이원애의 손가락 마디는 모두 뒤틀려 있었다.

악취가 심한 날이면 남편 김순길은 이원애에게 바닥으로 몸을 최대한 낮춰서 누워보라고 권했다. 그 말에 의지해 장판에 얼굴을 붙여도 악취로 인한 두통은 잦아들지 않았다. 2017년 공장이 문을 닫고 악취가 사라졌다. 그리고 바닥에 얼굴을 붙여보라던 남편 김순길도 이제는 없다. 김순길은 담낭암을 앓다가 2009년 71세의 나이로 숨졌다.

이원애는 김순길이 유명을 달리한 건 주엽을 잃고 화병이 난 것도 한몫했다고 여긴다. 그럴 때면 ‘왜 자신은 아직 죽지 않았느냐’고 신에게 물었다. 미국 조지아 공대에서 유학한 주엽은 당시 취업에 연이어 실패하고 상심한 채 집에 내려와 있었다. 주엽은 끝내 취업에 성공하지 못했다. 부모는 2억여 원을 들여 전주에 실내 인라인스케이트장을 차려줬다. 몇 달 운영도 못해보고 급성위암이 발병했다.

ⓒ시사IN 이명익박명숙은 폐암 투병 중이던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 새 차를 뽑았다.어머니는 딸의 새 차를 한 번도 타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날’에 붙들려 있는 사람이 이원애만은 아니다. 박명숙(54)은 2013년 어머니 황임순(당시 74세)을, 2014년 아버지 박노섭(당시 76세)을 연달아 여의었다. 모두 폐암이었다. 5남매 중 둘째 딸인 박명숙은 부모와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떠맡듯 병구완을 시작했다. 익산 시내에서 장점마을까지 차로 30분 거리니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두 분 다 투병 기간은 짧았다. 어머니가 1년, 아버지가 9개월을 앓다 돌아가셨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사는 바쁜 형제들은 드물게 병원에 왔다. “엄마가, 아빠가 진짜 아플 때 어떤 모습인지 형제들은 끝내 모르겠죠.” 그래도 ‘편히’ 돌아가셨다는 형제들의 위로를 박명숙은 이해했고, 또 이해하지 못했다.

황임순은 2012년 자꾸만 쿡쿡 쑤시는 옆구리가 불편했다. 의사는 보호자인 박명숙을 불러 물었다. “엄마가 ‘담배 피우느냐’라고 물어요. 안 피운다, 음식도 태운 건 질색하는 분이라고 했죠. 그랬더니 ‘주변에 공장이 있느냐’고 묻더라고요. 있긴 있다고 했죠. 그때만 해도 설마 했어요.” 익산병원에서는 대학병원으로 가 조직검사를 해보라는 내용으로 소견서를 써줬다. 검사 결과는 나빴다. 암 발병 부위가 좋지 않아 수술도 할 수 없었다. 1년 동안 3차에 걸쳐 항암치료가 진행됐다.

그사이 박명숙은 20년 가까이 끌고 다니던 자동차를 당시 최신형이었던 쉐보레 크루즈로 바꿨다. 어머니를 태워 병원과 집을 오가는 동안 오래된 자동차를 불안해하던 모습이 기억나서였다. 안심시켜드리고 싶었다. 새 차를 뽑은 날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한다. 2013년 5월7일이었다. “차 뽑자마자 급하게 몰고 엄마 있던 요양병원으로 갔어요. 엄마 병실 창문에서 제일 잘 보이는 데 차를 댔어요. 올라가서 엄마한테 새 차를 가리키며 그랬어요. ‘엄마, 저거 봐봐. 저기 흰 차가 내 차야. 이제 저거 타고 집에 가자.’ 그랬더니 엄마가 ‘내가 이제 마음이 놓인다’고 좋아하더라고요.” 황임순은 결국 둘째 딸의 새 차를 한 번도 타보지 못했다. 병세가 악화돼 한 달 뒤인 6월3일 눈을 감았다.

장례식장에서 아버지 박노섭은 내내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처음에는 ‘장례 치르느라 힘드신가’ 생각했다. 장례를 마친 후 어깨가 결린다는 말에 정형외과 전문병원으로 모셨다. 진찰을 마친 의사는 “과를 잘못 찾아왔다”라고 말했다. 혹시 암이냐고 묻는 말에 의사는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다. 검사 결과 폐암이었다. 박노섭은 아내가 투병하는 동안 ‘네 엄마 죽으면 1년 안에 따라간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편찮으신데 숨긴 거 같아요. 엄마부터 살리자고, 그것만 생각하자고 매번 말하셨어요.” 박노섭은 명숙의 새 차 뒷자리에서 병원을 오가며 혼잣말을 하곤 했다. “내가 당신(엄마) 몫까지 새 차 실컷 타고 간다.”

ⓒ시사IN 이명익장점마을은 함라산에 둘러싸인 분지 형태다. 사진 정면 가운데 보이는 파란색 슬레이트 건물이 금강농산이다. 마을 입구에서 약 5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하늘나라에서는 농사 안 지어서 편하죠?

박노섭이 황임순을 묻고 집으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지하수를 상수도로 바꾼 일이었다. 대여섯 발자국 남짓한 땅을 파서 상수도관을 묻는 데 100만원이었다. 2013년 상수도 통계에 따르면 장점마을이 속해 있는 함라면의 상수도 보급률은 16.9%에 불과했다. 그만큼 지하수 이용률이 높았다. 2008년부터 마을에 상수도가 보급되기 시작했지만 설치비용 일부를 주민이 부담해야 해서 대부분은 지하수를 이용했다.

장점마을에서 사람이 죽어 나가면서 익산시는 상수도 비용을 전액 지원해줬지만, 박노섭은 이미 들인 비용을 아까워하지 않았다. 박노섭은 금강농산이 배출한 폐수 때문에 황임순이 병에 걸렸다고 확신했다. 금강농산은 2010년 9월까지 대기배출시설이나 폐수배출시설을 따로 갖추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기도 했다.

박노섭은 장기들이 정신보다 먼저 무너졌다. 식사하는 와중에도 소변 조절을 못해 받아내야 했다. 박명숙은 아버지를 씻기면서 매일 울었다. “작은딸이랑 아버지 팔을 하나씩 나눠 드는데 이 양반이 양쪽에서 들어도 꼼짝을 안 해.” 생은 무겁고, 생을 포기하는 마음 역시 무거웠다.

병구완을 하는 동안 가출을 감행했던 중학교 2학년 때 생각이 자주 났다. 5남매 중 둘째 딸은 깍두기 같은 존재였다. 언니 옷을 물려받아 입으며 막내 여동생이 새 옷 지어 입는 걸 부러워하기만 했다. 어쩐지 집안의 궂은일도 박명숙의 몫이었다. “자식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다섯이나 있는데 일을 그렇게 나만 시키더라고. 일이 너무 지겨워서 중2 때 수업료 준 거 들고 서울로 가출했어. 큰집에 일주일쯤 가 있었어요. 엄마랑 아버지가 데리러 왔길래 내가 그랬어. ‘공부를 시켜야지 일을 시킨다’고 울었어요. 아버지가 그래. ‘명숙아, 일 이제 안 시킬게 가자’고. 그 약속을 결국 못 지켰지(웃음).”

결혼해 서울에서 딸 둘을 키우는 동안 유년의 기억은 불쑥불쑥 치고 올라왔다. 박명숙은 서울을 ‘돈 없으면 사람 취급 못 받는 도시’로 기억한다. 어느 날에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밑도 끝도 없이 소리를 질렀다. 나만 일을 많이 시켜서, 내가 어려서부터 일만 많이 해서 되는 일이 없다고 양껏 화풀이를 했다. 그러고는 잊었다. 엄마는 기억하고 있었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 황임순은 딸에게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그 말을 더는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하고 갔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박명숙은 그 말을 붙잡고 산다. “진짜 아들밖에 몰랐던 양반들이거든. 딸은 필요 없다고 그랬어. 그런데 편찮으시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딸이 필요하더라는 거야.”

부모가 없는 집은 박명숙이 지킨다. 부모 영정사진을 안방에서 가장 잘 보이는 텔레비전 위에 걸었다. 사진을 보며 때로 혼잣말도 한다. “텔레비전 보면서도 한 번씩 쳐다볼 수 있어서 좋더라고. 내가 나고 자란 집이니까, 사진을 보고 있으면 엄마가 이맘때 무슨 일을 했지, 내가 뭣 때문에 혼났지, 그런 생각을 떠올릴 수 있어. ‘거기서는 편하시냐. 농사 안 짓고 사니까 재밌냐’라고 묻기도 하고.”

장점마을의 2013년은 여러모로 잔인한 해였다. 손창영(당시 75세)을 시작으로 줄줄이 사망자가 나왔다. 정경례(77)는 남편 손창영이 숨진 날짜와 요일을 지금도 정확히 기억한다. “2013년 3월25일이 월요일이었어.” 경로당에서 라면 끓여 먹고 멀쩡하게 걸어서 병원에 간 손창영은 다시 마을로 돌아오지 못했다. 익산병원에 입원한 지 보름 만이었다. ‘대학병원으로 전원시키라’는 결정을 받았다. 아무래도 더 큰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다는 담당 의사의 말에 정경례와 큰딸은 원무과로 병원비를 치르러 내려갔다. “그 짧은 새 아들한테 전화가 왔어. 어머니, 빨리 병실에 올라오라고. 올라갔더니 남편이 아래위로 구멍마다 피를 흘리면서 고함을 치고 있는 거야. 내가 의사 멱통(멱살)을 잡고 흔들었어. 살린다더니 어떻게 된 일이냐고.” 느닷없는 죽음이었다. 입원 기간이 짧고 내내 상태가 좋지 않아 병명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쇼크다발성 장기부전, 그리고 피부 관련 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을 받았다.

“우리 집이 그때 화목보일러를 땠어. 공장 올라가는 언덕에 아카시나무가 많거든. 남편이랑 나무 주우러 올라가는데 큰 트럭이 줄줄이 공장으로 올라가데. 그러더니 곰방 공장 아들(이수영)이 와서 나무를 못하게 하는 거야. 뭘 알아야지. 나중에 보니까 그 트럭에 태우면 안 되는 ‘나쁜 거’를 잔뜩 실었는가 싶지.”

ⓒ시사IN 이명익장점마을의 주민 90%는 천주교 신자다. 정경례와 마을 주민들이 황등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있다.

정경례의 집은 마을 첫 집이다. 언덕 위 공장에서 태우며 생기는 ‘나쁜 거’는 악취와 매연의 모습으로 나타나 바닥까지 낮게 내려앉곤 했다. 손창영을 보낸 후 정경례는 공장 앞에서, 익산시청에서 “눕고 뒹굴고” 난리를 여러 번 쳤다. 연이은 부고에 농민회와 인근 마을 주민까지 300명이 금강농산 앞 좁은 길을 막고 집회를 열었다. 천막도 쳐봤다. 소용없었다. “못 배운 시골 사람이라 그런가. 우리 얘기는 아무도 안 들어주는갑다 했지.”

배움은 ‘국민학교(초등학교)’ 문턱에서 멈췄다. 1학년 1학기를 다니며 ‘가나다’를 겨우 뗄 무렵 부모가 등교를 막았다. 아래로 남동생이 다섯이었다. 해수 기침 때문에 바깥 거동을 못하는 아버지를 대신해 생계를 책임지는 어머니를 돕는 건 첫딸인 정경례의 몫이었다. “지금 같으면 두들겨 맞아가면서도 학교 가겠다고 싸웠을 것인데….” 일찍 부모를 여읜 손창영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손창영은 예초기며 트랙터며 못 고치는 농기계가 없었다. 손재주가 좋기로 소문이 나 먼 마을에서도 고장 난 기계를 들고 정경례의 집으로 왔다. “그짝으로 공부를 더 했으면 우리 아저씨는 참 좋았을 것인데….” 정경례가 다시 한번 말을 줄였다.

그해 6월10일, 김형구(54)는 부모를 한날에 잃었다. 함열장례식장이 문을 열고 36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김형구는 원두커피가 담긴 잔을 한참 내려다봤다. “꼭 이랬어, 공장에서 나오는 연기 색깔이.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코가 뻥 뚫린다고 해야 하나. 부모님 묻고 공장 올라가서 얼마나 싸웠나 몰라. 내가 쌍욕을 아주 잘하거든. 좀 해도 될랑가(웃음). 이 X같은 새끼들아, 니들이라고 괜찮을 거 같냐!”

암 확진을 먼저 받은 건 어머니 박원례였다. 2008년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아버지 김수정은 5년 뒤인 2013년 간암과 담낭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길어야 3개월을 살 수 있다고 했다. 손쓸 방법이 없었다. 6월10일 새벽에 어머니를 모셔둔 요양원에서 급한 연락이 왔다.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소식이었다. 아버지를 간병하는 형제 한 명을 제외하고 온 가족이 임종을 지키러 갔다. 아침 일찍 숨을 거둔 어머니를 함열장례식장에 모시는 사이 또 다른 부고를 들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3시간 만에 숨을 거뒀다. “그때부터 내 목표는 하나였어. 저 공장 무조건 문 닫게 만든다. 이를 악물었지. 저걸 없애야 우리가 산다. 애들도 살고, 새로 이사 오는 사람도 산다.”

김형구의 집은 장점마을에서 가장 북적이는 집이다. 3대가 함께 산다. 김형구와 아내 배유경(52), 그리고 5년 전 식을 올리기도 전에 ‘혼수’를 준비해온 큰아들 민진(30)과 며느리 정지영(24)이 낳은 손주 윤후(5)와 시후(4)가 있다. 김형구와 배유경의 둘째 아들 민석(28)은 회사가 있는 군산에서 자취한다. 2007년 김형구가 ‘늦둥이’로 얻은 셋째 아들 민영(13)은 윤후·시후와 함께 자랐다. 딸을 낳고 싶었는데 또 아들이었다. 민영은 그런 부모의 바람을 잘 아는 아이였다. 곰살궂고 다정했다.

김형구도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난 적이 있다. 서울 생활은 낯설고 고되고 짧았다. 1989년부터 을지로 인쇄공장에서 제판실 ‘고바리’ 일을 했다. 포토숍이 없던 당시 사진을 수작업으로 고치는 일이었다. 사진을 어둡게 혹은 밝게 고쳤으며 때로 신체 일부를 조정하기도 했다. 1997년 IMF(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공장이 망했다. 김형구는 미련 없이 짐을 쌌다. “고향 내려오니까 숨통이 트이더라고. 서울이 어찌나 답답했던지. 내가 뼈를 묻을 데는 여기밖에 없다 했지.”

ⓒ시사IN 이명익장점마을 사건 이후 전라북도에서는 담배 찌꺼기인 연초박 도내 반입을 금지했다. ‘나쁜 거’가 사라진 뒤 장점마을 사람들은 여전히 밭을 일구며 살고 있다.

가끔 그 결정을 후회한다. 금강농산은 부모의 목숨만 앗아가지 않았다. 두 아들 민진과 민석의 피부도 망가뜨렸다. 둘째 민석은 아직까지도 피부과에 다닌다. 여름에도 반팔과 반바지를 입지 못한다. 큰아이 민진은 반팔을 포기하지 않았다. 흉터가 남은 피부를 문신으로 덮었다. 어깨부터 왼쪽 팔까지, 커다란 잉어를 그려 넣었다.

정지영은 그런 민진을 무서워하지 않은 한 사람이었다. 지영은 원광보건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며 함라면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가족을 돕던 중 김민진을 만났다. 식당에 밥 먹으러 우르르 들어온 ‘남자 떼’ 중 한 명이 민진이었다. 무리 중 한 명이 지영에게 농을 걸었다. “민진이가 너 관심 있대.” 민진은 “시끄러워, 조용히 해”라고 답하며 밥그릇에 얼굴을 묻었다. 오기가 생겼다. 지영은 그날 밤 집에 가서 페이스북으로 김민진을 검색했다. 먼저 쪽지를 보냈다. 3개월 연애했다. 첫째 윤후도 그때 생겼다. 집을 마련할 돈을 벌 때까지 시댁에서 지내기로 했다.


익산시의원을 꿈꾸는 ‘장점 며느리’

포도즙을 컵에 따라 내오며 지영이 덧붙였다. “이 마을에서 난 거 아니니까 안심하고 드세요.” 외지인인 취재팀을 대접하며 새침하게 말했지만 지영이 이 마을에서 난 식재료를 안 먹는 건 아니었다. 마트는커녕 구멍가게 하나 없는 마을에서 배추나 파, 마늘은 어디에나 흔했고 다른 곳보다 품질이 좋았다. 아직 어린 윤후와 시후에게 ‘먹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지만, 흙에서 바로 뽑아낸 것들은 어찌나 싱싱한지 자꾸만 마음을 뺏기곤 했다.

사춘기를 통과 중인 민영은 맞벌이로 바쁜 아빠(김형구)와 엄마(배유경)보다 형수인 정지영을 따랐다. 정지영은 민영의 학교 행사에 부모보다 더 자주 참석했다. 민영이가 눈에 띄게 밝아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스물넷 나이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어린’ 시동생 뒷바라지를 도맡고, 3대가 복작거리는 집이 정지영에게는 벅차고 사는 것 같다.

지영은 초등학교 4학년 때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었다. 함께 타고 가던 차가 사고가 났다. 지영이 혼수상태에서 한 달 만에 깨어났을 때 엄마는 이미 장례를 치른 뒤였다. “제가 결혼하고 대학을 마쳤거든요.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이 있어요. 지금은 애 키우고 살림하지만 나중에 익산시의원 해보고 싶어요. 잘할 거 같지 않아요?”

정지영처럼 장점마을 외부와 접촉이 많은 젊은 사람들은 마을 밖을 잘 나서지 않는 노인들과는 다른 차원의 스트레스를 경험한다. 중학교에 다니는 김민영도 마찬가지다. ‘장점마을에서 집단 암이 발병했다는 데 (너희 집은) 괜찮니?’라는 질문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선생님 한 명이 시작한 질문이 전교생 65명뿐인 작은 학교 전체가 던지는 질문이 되어 민영에게 꽂히기도 한다. 정지영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여기서 버스를 타잖아요? 기사님이 물어봐요. ‘여기 암 마을인데 사는 거 괜찮으냐’라고요.” 그런 질문은 아무리 반복돼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기자명 익산/장일호·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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