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 재난’ 마을의 해바라기 꽃 필 무렵 1
  • 익산/장일호·나경희 기자
  • 호수 660
  • 승인 2020.05.11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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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 장점마을 주민은 3분의 1이 암을 겪었다. 발암물질을 내뿜던 비료공장 때문이었다. 주민들은 17년 싸움 끝에 역학적 관련성을 인정받았다.
ⓒ시사IN 이명익

피해자가 아닌 삶의 주인공으로

늙고 병드는 일은 자연의 몫이었다. 세월만이 사람을 시들게 했다. 그런 줄만 알았다. 어떤 죽음은 자연스럽게 오지 않았다. 작은 시골 마을은 언제부턴가 장례를 일상으로 받아들여야 했다. 이웃의 죽음은 예고편이었다. 한 집 건너 한 집에 암환자가 발생했다. 암에 대한 공포가 아니어도 질병은 노인들의 가장 중요한 상태이자 문제였다. 늙음에 대한 ‘벌’이거나 ‘잘못 살아온 삶’의 대가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던 병이 내 탓이 아니라고 알려준 것 역시 시간이었다. 장점마을 주민들이 2001년 들어선 비료공장 금강농산에서 비롯된 악취와 오염에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지 17년 만이었다. 2019년 11월 환경부는 역학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금강농산과 장점마을 집단 암 발병의 인과관계를 인정했다. 정부가 환경오염 피해로 인한 비특이성 질환의 역학적 관련성을 인정한 첫 번째 사례였다.

금강농산은 담배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연초박을 이용해 유기질비료를 생산했고 이 과정에서 제1군 발암물질이 발생해 주민 건강에 영향을 미쳤다. 비료관리법은 연초박을 퇴비에만 사용할 수 있도록 정해두고 있지만, 금강농산은 이를 불법적으로 유기질비료 생산에 사용했다.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익산시는 주민들의 지속된 민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금강농산에 연초박을 제공한 KT&G는 ‘서류에 따랐을 뿐’이고, 금강농산에서 비료를 납품받고 공장 시설 증축에도 관여한 풍농은 자신들도 피해자라고 주장한다. 〈시사IN〉 취재팀은 지난 2월10일~3월1일 20일간 전북 익산시 함라면 신등리 장점마을에 머물렀다. 취재진을 그곳으로 이끈 건 궁금증이었다. 이 작은 마을에 왜 비극이 지속적으로 발생했는지, 그 긴 세월 정부기관과 지방정부는 왜 주민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는지, 막을 수 있는 죽음은 아니었는지…. 장점마을 역학조사 결과의 의미를 짚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과제를 살펴봤다. 4월30일 현재 장점마을 주민 88명 중 18명이 암으로 숨졌고, 12명이 암으로 투병 중이다. 마을 주민 3분의 1이다.

마을에서 생긴 일이 알려지며 ‘집단 암 발병 마을’이라는 낙인을 짊어졌다. 주민들은 뭉뚱그려 ‘피해자’로만 호명됐다. 그들은 피해자이기 이전에 오래전부터 그 땅에 기대 살아온 사람들이었고 제 삶의 주인공이었다. ‘암 환자 아무개’가 아닌 마땅한 이름과 얼굴을 찾아주고 싶었다. 이들이 경험한 질병과 소외의 역사는 우리가 기억해야 할 21세기 현대사다. ※더 많은 사진과 영상은 ‘장점마을의 17년’ 웹페이지(jangjeom.sisain.co.kr)에서 볼 수 있습니다.

ⓒ시사IN 이명익2001년 7월 가동을 시작해 2017년 4월 문을 닫은 비료공장 금강농산 건물 내부 벽. 발암물질을 내뿜던 공장 내부는 먼지와 검댕을 덮어쓰고 있었다.
ⓒ시사IN 이명익

 

ⓒ시사IN 이명익마을기업 ‘세모전자’를 운영하는 문병준(왼쪽)·손평숙 부부는 장점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집안 대소사가 있는 날이면 마당이 주차장으로 변했다. 품에서 키워 전국 각지로 떠나보낸 자식들은 때 되면 돌아와 고향집에서 ‘엄마표’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돌아가곤 했다. 어느 날부터 자녀들은 하루도 채 머물려 하지 않았다. 이유를 알기에 붙잡지도 못했다. 차라리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날도 있었다.

전북 익산시 함라면 신등리 장점마을에는 너른 평야를 좌우에 두고 길게 뻗은 길을 중심으로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 입구 표지석에서 신호등도 없는 폭이 좁은 도로를 건너 작은 터널 하나를 지나면 야트막한 언덕이 나온다. 약 500m를 오르면 오른편으로 파란색 슬레이트 건물이 눈에 띈다. 비료공장인 금강농산이다. 2001년 7월 가동을 시작해 2017년 4월 문을 닫았다. 금강농산은 담배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연초박을 이용해 유기질비료를 생산했다. 이 과정에서 제1군 발암물질이 발생했다. 금강농산에 연초박을 제공한 KT&G나 금강농산에서 비료를 납품받은 풍농, 그리고 익산시가 모두 손 놓고 있는 사이 주민들은 발암물질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었다.

손평숙(74)은 장점마을에서 태어났다. 동네에 살던 문병준(75)과 결혼해 3남1녀를 두었다. 막무가내로 애정공세를 퍼붓는 문병준이 싫지 않았다. 때로는 담을 넘는 일도 불사하며 쫓아다니더니 결혼하고 17일 만에 군대를 가버렸다. 손평숙은 일곱 살짜리 시동생을 돌보는 와중에 시조부모와 시부모를 모셨다. 아궁이 세 개를 쉴 새 없이 돌리며 3대 살림을 해냈다. “그때는 다 그러고 살았어. 그러니 지금이 얼마나 살 만하겠어(웃음).”

하지만 금강농산이 들어선 2001년 이후 또 다른 근심이 생겼다. 자식과 손주들이 집에 올 일이 생기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늘은 저놈의 공장이 또 무슨 냄새를 피울라나.” 머리가 지끈거리고 심장이 벌렁거리는 악취였다. 공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집이지만 냄새가 닿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아이들에게 서운했다가도 건강이 염려되기에 자신이 먼저 아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그럴수록 땅에 의지했다. 작은 땅 하나 그냥 놀리지 않았다. 흙을 만지는 동안은 잡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텃밭에 부추, 쪽파, 배추 따위를 촘촘히 심었다. 손평숙이 심는 시금치와 배추는 토종 씨앗이다. “이제는 토종 씨가 드물어. 국보가 별거 있나. 이게 국보지.”

매년 봄이면 씨를 받는다. 올봄에도 어김없었다. 씨받을 배추는 겨우내 베어 먹지 않고 한 줄 길게 남겨둔다. 아이 키만큼 꽃대가 올라올 즈음이면 어김없이 꽃대마다 씨가 맺혔다. 배추꽃은 꼭 유채꽃처럼 생겼다. 노란 꽃이 다 지면 종자가 남는다. 마른 꽃대를 베어 털면 씨가 떨어진다. 잘 보관했다가 늦가을에 심는다. 지난해에도 그렇게 심은 토종 배추인 경종으로 1000포기 넘는 김치를 담갔다. “어찌나 팔라는 사람이 많은지 몰라. 알음알음 한번 먹어본 사람은 계속 찾아.”

문병준과 손평숙도 나고 자란 마을을 떠난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작은 공장을 열었다. 전기배선 기구 연결장치를 제조하는 공장은 한때 서울 청계천 일대에서 거래하지 않는 매장이 없을 정도였다. 문병준은 단가를 낮춰 공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했다. 미수금을 돌려받지 못하면서 1988년 크게 망했다.

서울에서만 공장을 하란 법은 없었다. 고향으로 내려와 1990년 9월 집 마당에 별채를 짓고 ‘세모전자’ 간판을 걸었다. “하도 크게 망해서 앞으로는 자빠지지 말라고 이름을 ‘세모’로 지었지.” 이번에는 사업을 확장하지 않았다. 인근 마을 사람만 채용해 고정적으로 납품하는 물량만 소화한다. 한때 20명 가까이 뒀던 직원은 현재 4명이 남았다. 마을과 함께 세모전자도 늙었다. 나이를 이기는 ‘업’은 없었다.

24시간 가동됐던 금강농산은 여러 의미로 빠르게 마을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악취나 오수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작은 마을이 공장 문제 해결 방법을 놓고 반으로 쪼개졌다. 그사이 문병준은 금강농산 바로 아래 밭주인이 누군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밭과 밭 사이에 난 좁은 포장도로는 농기계가 올라가기 위해 임시변통한 길로 사유재산이었다. 시내로 이사 간 밭주인을 찾아가 3년 치 세를 줬다. 포클레인을 불러 공장 들어가는 입구를 파버렸다. 담배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연초박을 비롯한 온갖 폐기물을 실어 나르는 차량 통행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일로 금강농산으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검찰 조사도 받았다. “내가 오죽하면 공장 굴뚝에 올라가서 떨어져 죽을라고 했을까.” 2002년 당시만 해도 참 젊었다. 문병준을 비롯해 50~60대를 중심으로 한 마을 청년들은 이후에도 ‘간헐적 데모’를 열곤 했다.

목숨을 증거 삼아 얻은 역학조사 결과

이제는 대부분 돌아가셨지만, 당시 마을 어르신 일부와의 다툼은 필연이었다. 금강농산 이갑찬 대표는 적절히 돈을 풀어 민심을 달래곤 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모두에게 주지는 않았다. 마을 대소사며 애경사를 챙기는 ‘바지사장’도 따로 있었다. 주민들은 아직도 그 바지사장의 이름과 그가 타고 다녔던 흰색 다이너스티 차량 번호를 똑똑히 기억한다. 돈을 받은 일부 ‘어르신’은 데모하는 ‘젊은 것’들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조용한 마을에 괜한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며 단속하기 일쑤였다.

온 마을이 똘똘 뭉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 일이 가능한 공동체는 어디에도 없다. 생각은 모두 같지 않았다. 공장을 적으로 둔 싸움은 오랜 시간 일방적인 패배로 끝났고, 금강농산은 그 틈을 적절히 비집고 들어오는 법을 알고 있었다.

이갑찬은 마을 주민 중 몇몇을 채용하는 ‘아량’을 베풀기도 했다. 비료공장이 들어선다고 했을 때 마을 일부가 반긴 것도 내심 이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농사짓는 일 말고는 일자리가 없다고 해도 무방한 농촌에서 공장은 드문 직업 ‘선택지’였다. 학령기 자녀를 키우는 젊은 농민일수록 농사와 공장 일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인근 군산농공단지로 나가는 것보다는 걸어서 다닐 수 있는 가까운 공장이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농업은 하늘의 뜻을 살펴야 했지만, 공장 일은 사장의 뜻을 살피면 되었다. 더 안전하고 안정적인 수입을 보장했다.

가끔 주민과 공장 간 다툼이 벌어졌지만 큰 소동은 드물었다. 그사이 문병준은 2012년 위암을 얻었고, 손평숙은 2017년 심장 스텐트 시술을 받았다. 그리고 마을의 수많은 사람이 아프거나 죽었다. 2020년 4월30일 기준 마을 주민 88명 중 18명이 암으로 숨졌고 12명은 암으로 투병 중이다. 절반 가까이가 암을 겪은 셈이다. 이미 마을을 떠난 사람 중에도 죽거나 투병 중인 사람의 소식이 건너오곤 했다. 금강농산 노동자 중에도 암 환자가 있었다. 이갑찬 금강농산 대표도 피해 가지 못했다. 그는 2018년 폐암으로 숨졌다. 마을 주민들이 걸린 암의 종류도 다양했다. 금강농산발 발암물질은 암만 일으킨 게 아니었다. 암은 마을을 덮친 대표 질병일 뿐 각종 피부질환과 우울증 등은 일일이 집계하기도 어려웠다.

2019년 11월 환경부는 690쪽에 달하는 ‘장점마을 환경오염 및 주민건강 실태조사’ 보고서를 내놓았다. 장점마을 집단 암 발병의 원인이 금강농산이라고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목숨을 증거 삼아 얻은 결과였다. 농업용수로 쓰는 소류지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하고, 밭과 논에서 나는 농작물이 형편없이 망가졌을 때도 꿈쩍 않던 지자체가 보고서 앞에 고개를 숙였다. 익산시장과 전북 도지사, 지역구 국회의원, 환경부 장관과 국무총리까지 사과가 이어졌다. 복잡한 심사였지만 손평숙은 일단 안도했다. “역학조사 결과를 받고 마음이 참 복잡하데. 이래서 사람들이 아팠구나. 이래서 남편이, 내가 아팠구나. 우리 몸땡이가 증거인데 어째서 이걸 이렇게 오래 방치했을까. 왜 외면했을까.”

ⓒ시사IN 이명익최재철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은 역학조사 결과를 이끌어낸 주역이다. 장점마을은 최초로 비특이성 질환의 역학적 관련성을 인정받았다.

최재철(59)은 2016년 주민대책위원회(주민대책위)를 만들고 2019년 역학조사 결과를 이끌어낸 주역이다. 나고 자란 집을 떠나 살다가 ‘돌아온 아들’이었다. 아내와는 오래전 이별했고, 성장한 아이들은 결혼을 하거나 유학길에 올랐다. 혼자 몸만 책임지면 되는 가뿐한 상황에서 고향에 돌아와 제일 먼저 한 일이 주민대책위 조직이었다. 사망자와 투병자를 자체적으로 조사해 금강농산으로 인한 피해 규모를 확인하고, 기자회견을 여는 등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지역 공무원들을 움직이려면 언론을 잘 활용해야 했다. 매체를 가리지 않았다. “거짓말 아니고 인터뷰를 한 1000번은 한 거 같아.”

고향으로 돌아온 건 2012년 피부암과 폐암을 진단받고 와병 중인 아버지 최옥엽을 돌볼 사람이 마땅치 않은 점도 한몫했다. 가려움 때문에 피가 날 때까지 긁고서야 겨우 쪽잠을 주무시던 아버지는 큰아들이 마을 문제에 앞장서자 긍긍했다. “내가 해코지당할까 봐. 어른들이 뭘 아나. 저놈의 공장 때문에 죽는다고는 생각 안 했다고. 나이 먹어서 아픈가 보다, 나이 먹어서 죽는가 보다 했지.”

2019년 1월 최옥엽은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장례를 치르고 한참 지나 보니 그때 받은 조의금이 주민대책위 활동비가 됐다. 집에 찾아온 손님이 한라봉 상자를 건네자 최재철은 잠시 말없이 눈으로 훑었다. 하나를 골라 껍질 일부를 조심스럽게 뜯어냈다. 제일 좋아 보이는 과육이었다. 대화 중이라는 것도 잠시 잊은 듯했다. 최재철이 한라봉을 들고 아버지 영정과 위패를 모신 방으로 들어갔다.

장점마을은 인근 30여 부락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부촌이었다. 부촌임을 짐작하게 하는 조명 전등갓과 천장에 그려넣은 화려한 무늬는, 그러나 촌스럽고 오래전 것이었다. 한때 대가족이 살았던 최재철의 집에는 냉장고가 두 개, 김치냉장고가 하나 있었다. 그 안의 물건들은 어딘가 풀죽어 있거나 상해 있었다. 주민대책위 위원장을 맡은 이후 “화를 추스르기 어려웠다”라는 그의 속내가 냉장고 속 음식으로도 드러나는 듯했다.

그 와중에도 마당을 드나드는 길고양이 밥을 챙기고 유난히 많은 식물 화분에 물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모두 아버지가 해오던 일이다. 생명이 있으나 말없는 것을 돌보고 가꾸는 동안 최재철은 아버지가 지녔을 내면의 풍경을 떠올렸다. 불같은 성격의 최재철과 달리 최옥엽은 장점마을에서 유순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어른이었다. “아, 내 성격은 어머니 쪽이지.” 어머니 안병심은 요양원에서도 ‘대장’을 하고 있다고, 최재철이 웃었다.

악취와 매연은 고스란히 마을로 고였다

텔레비전 볼륨은 둘러앉은 사람들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컸다. KBS1 〈뉴스 9〉를 보는 와중에 코로나19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73세 노인이었다. 하영순(78)이 혀를 찼다. “일흔셋이면 한창 땐디….” 김영환(82)은 콜라 반 잔을 마시더니 거실 소파에 잠시 앉아 졸았다.

부부의 발밑으로 셋째 딸이 보낸 신발 상자 세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하영순 앞으로 두 개, 김영환 앞으로는 하나였다. 그중 두 켤레는 모양은 같고 색만 다른 커플 운동화였다. 250㎜, 키 차이가 제법 나는 두 사람이지만 발 크기는 똑같았다. “병원 갈 때 신고 다니라고 보내준 거여.” 하영순의 설명에 부스스 눈을 뜬 김영환은 무심한 얼굴로 상자에서 신발을 꺼내 끈을 뀄다. 신발을 신고 거실을 걷는 걸음은 신중했다. 2013년 위암 수술 후 67㎏ 나가던 김영환의 몸무게는 51㎏으로 줄었다.

ⓒ시사IN 이명익하영순(왼쪽)은 피부병과 우울증을 앓고 있고, 남편 김영환은 위암 수술 후 67㎏이었던 몸무게가 51㎏으로 줄었다.

“주민들을 돌라먹은(속인) 거야. 역학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우리가 꼼짝 못하고 당했어.” 금강농산이 처음 장점마을에 들어온 2001년, 김영환은 이장을 맡고 있었다. 이갑찬 대표를 만났다. 비료공장이 들어선다는 소식에 주민들 걱정이 많으니 마을회관에 와서 설명회를 하라고 요청했다. 늦게나마 오긴 왔다. 이갑찬은 당당했다. “마을 주민의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야. 대답이 간단하더라고. 나중에 냄새가 하도 나서 쫓아 올라갔더니 그래. ‘빵 냄새, 땀 냄새처럼 사람마다 좋아하는 냄새가 다 다르다. 공장에서 나는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걸 다 어떻게 맞추나.’ 참 뻔뻔하지.”

금강농산에서 나온 유해물질은 암 외에도 각종 질병을 유발했다. 대표적으로 피부질환이다. 하영순은 피부 가려움증과 우울증으로 이틀 걸러 하루꼴로 병원에 간다. “수면제 없이는 잠을 통 못 자. 우리야 이제 둘 다 밥보다 약이 더 많아. 하이고, 폭폭하니 못 살아, 아주.” 하영순이 매일 먹는 약을 한보따리 들고 나왔다. 자녀들은 장점마을을 떠나라고 몇 번씩이나 권유했다. 말이 쉬웠다. 평생 살던 땅을 두고 떠난다는 게 내키지 않았다.

하영순이 지금도 아프게 기억하는 ‘사건’이 있다. 2015년 정부 부처 공무원인 셋째 딸이 군산에 출장 온 길에 동료들과 함께 집에 들렀다. 음료라도 좀 준비해달라는 말에 하영순의 마음이 바빴다. 한창 음식을 마련하고 있는데 딸과 동료들이 탄 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어, 이게 무슨 냄새야?’ 하면서 손으로 숨을 못 쉬겠다고 코를 잡고 뛰어 들어오는 거야. 나보고 그래. 어머니, 이 냄새 맡고 살면 안 된다고. 얼마나 미안했는지 몰라. 속도 상하고…. 직원들이 나가면서 마스크 있으면 좀 달라고 해. 있는 거 다 집어줬지.” 딸과 동료들은 그동안 맡아본 적 없는 악취였다. 함라산이 둘러싸고 있는 분지 형태의 마을은 기류 확산이 잘 되지 않았다. 공장에서 시작된 악취와 매연은 고스란히 마을에 고였다.

ⓒ시사IN 이명익하영순이 내보이기 싫다던 피부질환을 드러냈다. “하이고, 폭폭하니 못 살아, 아주.”

현재 생존한 장점마을 주민 대부분은 이곳에서 태어났거나 20대 초반 결혼과 함께 인근 지역에서 이주해 마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40가구 중 2000년대 이후 장점마을로 이주해온 집은 여섯 가구이며, 이들 중 속초에서 온 한 가구를 제외하고는 모두 익산 인근 마을 출신이다. 1940~ 1950년대생이 제일 많고, 평균연령은 59세다.

이미은(57)은 장점마을에서 드문 ‘외지인’이다. 1998년 추석 때 시댁에 내려왔다가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눌러앉았다. ‘1년만 몸조리하고 가라’는 시어머니의 말이 20년이 될 줄 그때는 몰랐다. 농사를 짓고 마을 이장도 하면서 마을 주민들과 부대끼는 동안 세월도 속절없이 흘렀다. 이미은은 이웃 마을에서 장점마을에 보내는 ‘호기심’이 불편하다.

“정말 장점마을 꼬리표를 떼고 싶어요. 보상 얼마 받느냐고 물어봐요. 이 마을 사람들이 무슨 보상받으려고 아픈 사람들도 아닌데. 저도 텔레비전에서 철거민 같은 사람들 보면 ‘왜 이사를 안 갈까’ 생각했는데, 이번에 제가 정말 잘 알게 됐어요. 이사를 쉽게 갈 수 있는 게 아니구나. 내가 어딘가로 이사 갈 때 그곳에서 뭘 먹고 살지, 그런 계획이 다 세워져야 가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천주교 신자인데 지금은 냉담자예요. 하느님은 아시겠죠. 제가 왜 성당에 안 나가는지.”

장점마을은 종교적 동질성이 매우 높다. 마을 주민 90%는 천주교를 믿는다. 익산은 대표적인 천주교 성지 가운데 한 곳이다. 장점마을에서 17㎞ 떨어진 곳에 나바위성당(1907년 건립)과 성지가 있다. 김대건 신부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사제로서 첫발을 내디딘 곳에 세워졌다. 전북 지역에는 지금도 약 100여 곳에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교우촌이 있다. 곳곳에서 공소를 찾을 수 있다. 공소는 사제가 없는 교회를 말한다.

장점마을에도 세워진 지 60년 넘은 공소가 있다. 공소는 한 달에 한 번 열린다. 미사는 오후 7시에 시작되지만 9년째 공소회장을 맡고 있는 최석환(65)은 공소가 열리는 날이면 오후 일을 뺀다. “신부님 의자 싹 닦고 그랄라믄 일찍 와야제.” 최석환은 일일이 전화를 돌리면서 출석 여부를 확인하더니, 미사 시간이 가까워오자 자신의 트럭을 몰고 각 집 앞을 돌며 픽업 서비스에 나섰다. 공소 뒤로 금강농산이 보였다. 금강농산 건물은 마을 어디에서나 잘 보였다. “저 공장이 멈추고 나서는 공기가 아주 싱겁더라고요. 제가 아들한테 이 말 했더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난리야(웃음).”

할머니들은 평소에는 보기 힘든 복장을 하고 공소 방향으로 난 언덕길을 올랐다. 가장 깨끗한 옷과 구두를 갖춰 입고 화장도 했다. 김광석 요아킴 주임신부는 단상 아래에서 주민들과 눈을 맞췄다. 강론은 설교라기보다 대화에 가까웠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 사람만의 이야기, 그걸 우리는 다른 말로 표현해서 역사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고통스럽게 경험했던 금강농산 문제도 여러분만의 역사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흔적이나 기록을 남겨두지 않으면, 흐지부지 날아가버리는 거예요. 남기지 않으면 평가를 할 수 없어요. 이 문제를 기억하고 있는 여러분이 죽어버리면 다 끝나버려요. 우리가 걸어온 길이 정리가 돼야만 앞으로를 설계할 수 있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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